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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Dec 12. 2024

새 이름 붙이기의 어려움

야니스 바루파키스, 테크노퓨달리즘

출처 : 북21 페이스북


지난 주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을 여유는 없었다. 오래 전에 예매해 둔 공연을 포기하고 광장으로 나갔다. 벌벌 떤 시간이 아깝게, 105명의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자기 소임을 포기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 했다. 이어지는 뉴스에 분노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짧은 단문들을 연이어 SNS에 며칠간 쏟아냈다. 어이없는 계획의 전모가 실체를 드러내고 나서야 오히려 책을 손에 쥐었다. 긴 싸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짧은 순간에 폭발하듯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야 바짝 드러누운 저들과 장기전을 치르기엔 불리할 거란 생각에. 호흡을 고르고, 읽고 있던 책을 마저 끝내고 간단히 정리해 본다.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테크노퓨달리즘』(노정태 옮김, 이주희 감수, 21세기북스, 2024)을 읽었다. 그리스의 경제학자이자 시리자(급진좌파연합-진보동맹)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한 경력의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체계를 자본주의 대신 '기술봉건제(왜 테크노퓨덜리즘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는지를 납득할만한 이유를 역서 내에서 찾지 못했다)'라 부른다. 질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독점적 지위를 가진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지대를 추출하는 클라우드 자본가 계급이 이제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되었으며, 이것이 마치 과거 토지에 대한 독점적 지배력을 바탕으로 추출한 지대로서 잉여를 전유하던 봉건 영주와 닮았다고 본다. 그리하여 지금이 발달한 기술로 인해 도래한 새로운 봉건제, 기술봉건제라는 것이다.


새롭게 부를 쌓은 계층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넘어서기 위해, 저자는 발전한 기술이 생산양식 차원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 냈는지를 분석한다. (이 점에서 그는 자임하듯 '맑스주의'의 자장 안에 있다) 바루파키스는 자본주의의 두 기둥인 이윤과 시장이 각각 지대와 디지털 영지로 변모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클라우드 자본가들은 시장에서의 등가교환이라는 외피를 통해 상품 생산 과정에서 획득되는 이윤보다, 정교하게 짜여진 디지털 영지의 독점적 소유권으로부터 유래하는 지대(수수료)를 핵심 목표로 삼는다. 그들은 상품을 아주 헐값에 판매하는 대신, 그로 인한 시장 지배력을 활용해 막강한 수수료를 수취한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무제한으로 은행과 기업들에 풀린 구제금융은, 대부분 주주와 경영자들의 배당금 잔치와 부동산, 사치품 구입으로 흘러갔다. 강력한 긴축정책의 여파로 소비력을 상실한 대중 대신, 막대한 자금을 대여받은 기업가들은 그 유동성을 금융 삼품과 디지털 플랫폼 산업에 투자했다. 이 투자금은 많은 플랫폼 기업이 자신의 '디지털 영지' 규모를 넓히는 데 쓰였다. 이 플랫폼 기업들은 이윤 대신 점유율을 통한 지대 추출이 사업 목표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매년 발생하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은 투자에 고삐를 죄지 않았다.


그렇게 성장한 플랫폼 기업은 본격적으로 수수료 장사에 나섰다.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입점한 자영업자들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수수료를 받았다. 구글과 애플은 앱스토어 '생태계'를 구축하고, 아마존과 쿠팡은 빠른 배송과 저가 정책을 바탕으로 출혈을 감수하며 이커머스 시장을 석권했다. 우버, 리프트, 카카오T, 배민, 요기요 등 시장 지배력을 확보한 다양한 기업들이 등장했고 이 '봉건 가신 자본가 계급'은 기존 계급을 대체한 새로운 엘리트가 되었다. 이들이 거두어들이는 막대한 이익은 그 기업의 숫자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높다. 더욱이 팬데믹은 사람들이 클라우드 플랫폼에 자연스럽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그들의 디지털 영지를 대가 없이 가꾼다. 몇몇 영민한 자영업자들은 자기 자신을 콘텐츠화함으로써 일정한 수익을 얻어갔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저 무료로 디지털 영지에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이 글을 포함해 SNS에 올리는 사진과 글, 다양한 정보가 늘어날수록, 플랫폼 기업은 나를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올리는 개인정보들은 디지털 영지를 개간하는 자동로봇인 AI를 학습시키는 중요한 먹이가 된다. 그들은 나로부터 길어올린 정보들을 바탕으로, 내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내게 가져다 댈 것이다. 우리는 정체성 일부를 플랫폼 기업에 넘김으로써, 그들의 디지털 영지를 더욱 촘촘하고 자연스럽게 만든다.


우리가 가꾸는 그들의 디지털 영지에서, 그들은 수익을 거둔다. 공정한 시장처럼 보이는 그들의 디지털 영지는 실은 정교하게 짜여진 무대와도 같다. 수수료를 결정하는 것은 플랫폼 자본을 소유한 이들의 몫이지, 그 안에서 실제 노동과 상품을 제공하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처럼 보이지만, 언제든 '디지털 영주'의 지대 추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세조정이 가능한 공간이다. 


클라우드 노동은 자발적 무급 노동의 일반화를 유도한다. "수십억 명의 평범한 우리가 자발적으로 클라우드 농노로 변해 아무런 보상도 없이 클라우드 자본의 소유주를 위해 자본의 재생산에 우리의 노동력을 바치고 있다는 것"(147)이다. 이 글과 같은 정보성 콘텐츠, 릴스와 쇼츠, 별점 리뷰,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 트위터의 농담과 욕설 모두가 클라우드 자본이 이윤을 창출하는 '콘텐츠'의 일부이자 우리가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일상이며, 그것들이 '무상'으로 지급된다는 거다.


우리는 자발적인 '무급' 노동으로 이 영지를 풍족하게 만들고, 다른 한 편으로는 AI 학습을 위해 분절된 노동을 헐값으로 제공한다. 콘텐츠의 생산과정을 전담하지만 정작 그 결과물로부터 이익은 디지털 영지가 가져가는 상황, 바루파키스가 노동하는 우리들을 '디지털 농노'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들의 입점 수수료는 우리의 불안정노동과 자발적 정보 제공으로부터 발생한다.


여전히 몇몇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기업은 여전히 이윤 생산을 목적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자본을 축적하려 시도한다. 하지만 바루파키스가 보기에 너무나 거대해서 한 나라, 세계의 경제조차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한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이 상품 생산으로부터 얻는 이윤을 자본 축적의 핵심 목표로 두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도 물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투자한다. 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새로운 상품들도 꾸준히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관심을 더 가져가는 게 진짜 목적"(215)이기에, 손해만 간신히 면할 정도로 낮은 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클라우드 영주들의 투자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시장 내에서의 경쟁을 지향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다함께 자본주의 시장에서 탈출하도록 만드는 게 목표죠."(215)


이들이 생산하는 부의 규모가 압도적이고,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주도적' 생산양식이 되었다면, 바루파키스의 말대로 기술봉건제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대가 사회 변화의 핵심 동력의 자리를 되찾았다는 점에서, 저는 테크노퓨달리즘보다 더 나은 이름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어요."(218)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윤-지대, 시장-디지털 영지의 대립이 도식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도 지적했듯이 디지털 영지의 독점적 소유권을 바탕으로 지대를 추구하는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한 편에 있는 동시에, 여전히 이윤을 통한 자본 축적을 목표로 하는 기업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을 자본주의 시대라 받아들일 때에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우세종인 동시에 총체화하려는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뜻하며, 이는 역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공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기술봉건제라는 명명은 이를 도식적으로 이분화하려는 것은 아닌가?


더 나아가 지대-이윤은 서로 배치된다기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에 가깝다. 시장에서의 교환을 통해 생산되는 이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자본 축적은, 잉여가치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유하는 시초 축적과 분리할 수 없다. 오히려 강력한 의존 관계로 학자에 따라 영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때때로 이윤을 제대로 착취하기 어려운 자본이 경제외적인 방식으로 잉여가치를 수탈하는 일을 목격하기란 어렵지도 않다. 클라우드 자본의 '지대 추구'란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의 등장을 의미한다기보다, 단지 자본 축적의 새 주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사회적 합의를 파괴하고, 노조를 파괴하고, 단일 국가의 경계선 바깥에서 법적 제재의 한계를 이용하는 등 끊임없이 경제외적인 방식으로 잉여가치를 전유하려는 초국적 자본의 양태가, 과거와 지금이 크게 달라졌는가? 상품화할 수 없는 것들을 파괴하고 상품 생산의 경로로 밀어넣어 '자유롭고 공정한' 등가 교환의 외피를 뒤집어쓰게 만드는 자본의 고유한 축적의 욕망이 질적으로 변모한 적이 있는가? 이것은 섣부른 체제 이행 선언은 아닐까?


낸시 프레이저가 『좌파의 길』(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원제인 '카니발 자본주의'가 훨씬 더 적절했다고 생각하지만)에서 지적했듯이, 애초에 자본주의는 착취를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수탈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이윤 착취에서 지대 추출로의 변환은 돌이킬 수 없는 체제 전환의 징후라기보다, 그의 말마따나 ("자본주의는 카멜레온이 색깔을 바꾸듯 변신하죠. 그. 본질과 보호 기제가 같이 변화합니다. ... 테크노퓨달리즘은 자본주의의 연이은 변신 중 가장 최근 사례니까요." (61)) 새롭게 적응한 자본주의일뿐이지 않은가? 




체제의 '이행'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왜 이행을 고민하고, 선언하는 것일까? 여기서 내가 읽는 것은 일종의 체념이다. 저항의 불가능성.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 - 그들은 체제를 지탱하며 착취의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을 선도하고 현 체제의 붕괴를 이끄는 골렘이다 - 와 바루파키스의 디지털 농노에 대한 체념적 태도를 비교해 보라. 체제의 일부로서 착취당하지만 자발적으로 노동하기를 그치지 않는 디지털 농노는 일방적으로 수동적인 주체에 가깝다. 여기에 어떤 정치적 가능성이 있는가? 대안이 붕 뜨는 것이 그 때문이다. 다른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기를 요청한다기보다, 이 방식으로는 저항이 통하지 않으므로 다른 시대라 진단한다는 '전도'가 발생하는 듯 보인다.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를 및 교류 관계들,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들, 즉 그토록 강력한 생산 수단과 교류 수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내었던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내었던 저승의 힘을 . 더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공산주의당 선언, 54)


봉건제와 농노라는 비유는, 쓰는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강력한 외력을 암시한다. 세상은 더욱 변하기 어려워졌으며, 우리에게 어떤 '재전유'의 가능성이 점쳐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셸 페어의 『피투자자의 시간』(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에서처럼, 우리를 강제로 투자에 의존하는 잠재적인 피투자자로 만드는 금융자본주의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부과한 '투자자' 정체성을 일종의 체제 파괴의 무기로 전용할 수 있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한탄, 노동 없이 부를 쌓아가는 신흥 자본가 계급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넘어서서(그들은 일하지 않고 돈을 번다), 디지털 농노로서 우리가 '전유'할 수 있는 수단들을 강구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루파키스에게 그러한 시도는 어디에 있는가?


'기술봉건제'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시스템의 핵심 구성물이자 동시에 시스템의 위험 요소로서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기술을 누가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호소는, 점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별 - 특히나 일국의 민주주의적 제도와 규제라 초국가적 자본주의에 의해 무력해지는 상황에서 - 이 확실시 되는 지금의 시국에 우리가 그 결합을 어떻게 시도해야 할지 말해주지 못한다. 왜 우리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존재한 특수한 자본주의 결합의 한 양태, 복지국가라는 일국적 사민주의를 대안으로서 낭만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클라우드 조직화, 그리고 반 테크노퓨달리즘 전선을 형성하여 민중의 통제권을 되찾아오자는 주장은, 약간은 낯설다. 그리고 공상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또한 현실적인 막다른 골목에서 무엇인가 새롭게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마지막 움직임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상황이 그렇게 절망적인가? 그래서 우리가 다르게 반드시 조직해야만 하는 이유가 설득력있게 제시되었는가? 더 결정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처럼 프레카리아트와 디지털 농노라는 이들이 반-퓨덜리즘 연합을 형성하고 주도할 수 있는 어떤 '주도적 협상력'을 지닐 수 있는가? 누가 이 싸움을 이끄는가? 누가 이 전선의 핵심인가?


결론은 많이 아쉽지만, 일단은 현재의 상황을 다르게 진단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정말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가? 애초에 우리는 서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란 말이 있듯이. 그러니까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 모두가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수준의 압력으로 같은 수준의 생산양식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우위와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존하는 시스템이 혼재된 상태가 우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상태였고, 그 분포나 농도는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절되기도 한다. 가령, 대한민국의 ‘자본주의’와 유럽의 ‘자본주의’가 같은가? 대한민국의 1960년대의 자본주의와 2020년대의 자본주의는 같은가? 그 질적 차이와 ‘테크노퓨달리즘’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가?


호명은 일정한 욕망을 드러낸다. 바루파키스의 욕망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욕망을 가지고 그 호명에 반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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