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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Dec 16. 2024

이젠 남의 이야기가 아닌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박세연 옮김, 어크로스, 2018)를 읽었다.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 : 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18)와 함께 나오자마자 사두고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얼마 전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를 겪은 이후 다시 집어들었다. 민주주의 제도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내파하는 일이 이제 더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으므로. 원서가 출간된 트럼프 집권 1기 초반인 2017년이고, 그래서 트럼프 정권 이후의 전망이 살짝 낡아있단 생각은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는 지점들이 있다.


저자들은 민주주의가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고 마는 상황이 미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오랜 기간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로 인한 '가드레일'이 붕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제도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를 굴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규범을 준수할 때에 굴러가는 것인데, 잠재적 독재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민주적 절차를 활용해 민주주의를 해체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로 이런 일은 기존 정당이 집권에 실패하거나 장기적으로 집권 가능성을 낮게 예측하는 등 다가올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서, 아웃사이더로 존재하던 잠재적 독재자를 기성 정치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정치적 아웃사이더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지만,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 미국 민주주의는 그러한 자들이 일시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정당을 장악하고 선거에 나설 수 없도록 하는 규범과 제도를 통해 민주주의를 방어했다. (선거인단, 밀실합의, 슈퍼대의원 등 가능한 한 많은 '간접'민주주의 절차들이 인민의 직접적 의지 표출을 제한하는 방법을 통해)


트럼프와 윤석열과 같은 아웃사이더들을 끌어들이는 기성 정치인들은 (주로 우파들이다) 그들이 아웃사이더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이념적으로 서로 닮아있으며 서로의 이익이 겹친다는 점에서 침묵한다. 1933년 히틀러를 끌어들인 독일 우파 정당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1당이었지만 과반은 아니었던 히틀러에게 총리 자리를 맡기기로 한 건, 독일 우파 정당 지도자들의 오판 때문이었다. 그들은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그 결과 짜여진 헌법을 바탕으로 바이마르 공화국과 독일 민주주의는 전장의 잿더미가 되었다.


극단적이진 않더라도 이와 비슷하게, 민주주의를 껍데기만 남긴 사례들이 많다. 저자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좌우 가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내파하려는 시도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도 보통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파들이 민주주의의 규범을 내다버리는 데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는 데엔 동의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반복되는 민주주의 내파 전략은 서로 닮아있다. 가령 헌법재판소의 판사 임명을 거부한다든지, 행정명령으로 의회의 견제를 우회하려 한다든지, 각종 독립 심사 기관들의 장을 매수하거나 자기 사람으로 임명한다든지, 선거를 다양한 입법 방식으로 제한한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비상사태'를 일으켜버린다든지. (우리에겐 너무나 낯익은 방법이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 ― 즉 상대방도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이 나라를 걱정하고, 민주주의와 헌법을 존중한다는 생각,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제도적 권한을 극단적 수준으로 사용하길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생각 ― 는 민주주의라는 취약한 제도를 보완하고 굴러가게 만드는 규범이자 동력이었고, 이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효과적으로 작동해 오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전복'을 막아 왔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물론 이는 비열한 타협에 의한 것이다. 1877년 남북 전쟁 이후 북부가 흑인의 보통 선거권을 남부에 강제하려는 연방 정부의 압력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남부가 공화당 후보를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대타협'이 발생했는데, 이 결정은 흑인을 정치의 장에서 지우는 대가로 공화당-민주당을 서로의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는 '관용과 자제'의 정치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1964년 시민권법, 1965년 선거권법이 통과되면서 미국 사회는 뒤늦은 인종 포섭을 시도했고, 이 민주화의 결과는 민주당-공화당의 지지 지역 재배열과 함께 그간 유지되던 관용과 자제의 규범에도 균열을 만들어냈다. 


늘어나는 이민자, 소수자를 대변하는 민주당과 백인 기득권을 대변하는 공화당 사이의 균형은 점차 기울어졌다. 각종 법률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흑인 유권자는 늘어났고, 공화당은 1960년대 말부터 1992년에 이르기까지 하원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새로운 전법이 필요했다. 이 불균형을 깨려면 '내전'에 준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협력적 정치 문화를 폐기해야 했다. 1994년 수십 년만에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의 뉴트 깅리치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대 정당을 무력화하고, 여당일 땐 강력한 권한을 활용해 합법적으로 집권을 영속화할 수 있도록 제도를 오남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트럼프가 규범을 파괴했다기보다, 트럼프가 쉽게 넘을 수 있을만큼 규범 파괴는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30년 넘는 시간동안 정치 문화는 끊임없이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정치 문화 규범 파괴의 결과물이자 그 스스로가 이를 실현하고 있는 존재다. 그는 이제 두 번의 선거에서 승리했고, 저번 선거와 달리 이번엔 전체 득표에서도 승리했다. 처음과 달리 당내에 존재하던 반대파들도 거듭된 공천 학살과 극우파 언론의 선동, 막대한 기업 후원에 힘입은 티파티 등 극우파들의 당내 약진으로 인해 일소된 상태다. 심지어 행정부 내에서도 그의 명령에 반기를 들만큼 강단이 있는 이들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SNS에서 극우파 스피커들의 힘은 더 커졌다. 미국을 '오염된' 인종으로부터 구해내자는 선전에 동감하는 이들이 그의 행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허울이나마 유지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공화당 내부에서의 반란을, 민주당의 전략 수정을 절박하게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더욱 강력하게 민주주의를 위협할 태세로 등장한 트럼프 2기 정부다. (바이든 정부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진다...) 경제 양극화와 대중의 빈곤이 정치 양극화를 부추기고, 극단화된 정치 공간에서 타협이나 협상보다는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매파'들의 주도권이 강화되고, 그로 인해 파국적 결말로까지 이어지는 민주주의 내파 과정이 한국과 미국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민주주의의 세계적 약세? 


한편으로는 이것은 단지 다양한 폭력적 수단을 빼앗기는 보수파들이, 자신들이 더 이상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인해, 아웃사이더를 적극적으로 수혈하고 제도를 적극적으로 해킹해서 영구히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겠다는 파멸적인 결심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아닌가? (책에서 차베스를 제외하고 이 사례로부터 벗어난 경우도 없는데다, 차베스에 대한 설명은 공정하지 않다. 물론 나는 차베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아웃사이더의 등장이라는 건, 어쩌면 다양한 방식으로 민의를 직접 반영하기를 거부하고 각종 장치를 설치한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반작용인 건 아닌가? 그들이 직접 민의를 대변한다는 포퓰리스트로 자임할 수 있는 건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다수의 불만과 분노가 축적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민의에 대한 배신을 양산하는 체제가 아니면, 민의를 직접 반영한다는 포퓰리스트도 없다. 둘을 분리해서 한 쪽의 등장만을 억제하는 일이 가능하긴 한가? (타협을 위해 미뤄둔 것들이, 포퓰리스트의 성장 동력이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확고하게 공화국의 적이 되겠다고 선언한 사람과 세력에 대해 민주정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이 책에선 '적'에 대한 개념이 없고, 그런 사유 자체가 민주주의 규범에 어긋난다고 보는 듯하다. 나는 이러한 '적'에 대한 사유 불가능이 트럼프 2기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하지만. 먼저 공화국을 공격한 이들에 대해 '우리는 타협과 대화'로 대응한다는 말이 힘을 가지려면, 그들이 규칙을 어긴 데 대한 확고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걸텐데, 처벌 없이 보복이 불가능하다고만 하면 이 체제를 대체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많은 '내파'의 시작은 이러한 불신에서 시작하는 건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우리는 얼마 전 마주한 한 독재자의 야욕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났는지를 이해하는 단초들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정세적인 가치가 있다.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자'라고 하는 이가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민주주의 그 자체를 무너뜨린 건 아닌지, 폐허로부터 세우려 했던 것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어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독서의 가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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