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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Dec 22. 2024

쪼개지는 노동자들

이승윤,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2024)


이승윤의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문학동네, 2024)을 읽었다. 이제는 대한민국에서도 일반화된 '불안정노동'의 구체적인 단면들을 추적한 연구 노트다. 과거엔 특수하고 예외적인 형태였지만, 이제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생존 방식이 되어버린 이 불안정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고, 어떻게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어떻게 사회의 보호로부터 외면받고 있는지를 훑는다. 동시에 연구 대상인 노동자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학자로서의 자신의 자리에 대한 성찰도 함께 담겼다.


저자는 '액화노동'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형태의 노동을 포착하고자 한다. 정규직-비정규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이 노동은 모호한 고용 관계에 놓여 있고, 잘게 분리되고 통제 불가능한 노동을 수행하고, 그로 인해 일과 휴식 사이의 경계가 시간적-공간적으로 모호해지는 특징을 지닌다. (물론 비정규직은 이러한 특성 가운데 상당수를 공유한다) 이 노동의 특징은 불안정성이다. 자신이 행하는 노동에 대한 통제 권한이 자신에게 없으며, 예측 불가능한 업무 할당이 이루어지는데, 정작 기존의 법과 제도의 보호막으로부터는 뽑혀나와 있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노동의 형태 역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들이 법과 제도의 보호막의 바깥에서 겪어야 하는 현실은 비참하다. 한국의 사회복지제도가 보장해주지 못하지만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선 필요한 재화들을 구매하려 과로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상해나 산재는 오로지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패자부활'이 쉽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한 번 장애를 입고 나면 더 불안정한 노동을 반강제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노동자들이 많다.


여성은 두 겹의 불안정에 시달린다. 경력 단절과 재생산 노동에 대한 무시. 출산과 결혼으로 인한 경력 단절은 가뜩이나 낮은 여성 임금을 억제한다. 경력 단절 이후 중년이 된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노동은 대부분 저임금의 불안정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 불안정한 노동이 저임금을 받는 건 가정 내에서의 여성 노동이 무급인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여성노동은 여전히 남성의 노동보다 쉽거나 부가가치가 창출되지 않는 저가치의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113)


불안정노동의 최전선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청년 세대 역시 MZ세대론이라는 환상에 가려진 현실에 고통받고 있다. 모호하고 스펙트럼이 넓은 청년을 위한 '정책'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MZ세대론이 범람했지만 계층, 지역 격차, 젠더, 인종 등 청년이 가진 다른 정체성과의 상호작용이 무시되고 모순적으로 정체성의 단편화가 이루어지고 있다."(132) 더 큰 문제는 청년들이 불안정노동에 내몰리면서 "제도적 구조적 환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환경적 필요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141) 


저자는 노동자들을 보호막 바깥으로 밀어내는 '오분류'를 해소하고, 기존의 법과 제도를 재정비해 새로운 형태의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존엄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일하는 사람과 노동자가 기본적인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보다 더 진화된 노동법과 사회보장제도, 분배제도의 마련, 새로운 형태로 일하는 노동자의 권리 강화, 그리고 기술 발전에 따라 확대되는 비대칭적 정보 독점 해소 등이 필요하다."(227)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제도 변화를 촉진할 주체는 어쩌면 패자집단의 연대로부터 시작되지 않겠느냐는 전망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곧바로 떠올린 영화가 있다. 영국의 영화 감독 켄 로치의 영화『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 2019)다. 평생 건설 노동자로 일한 리키는 조금 더 안정적으로 일하고자 택배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프리랜서로 계약해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당장 돈도 없었지만 자영업자이기에 승합차도 할부로 구매해야 했다. 그래도 일하면 차를 사느라 진 빚도 갚고, 돈도 모을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택배업을 시작한다.


그가 맞닥뜨린 상황은 녹록치 않다. 정해진 배송 시간을 지키기 위해선 쉼없이 일해야 한다. 문제 없이 일해도 제대로 달성하기가 어려운 할당량이지만, 언제나 사고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오배송과 주차위반은 리키의 잘못이 아닐 때에도 그의 '무능'을 모욕하는 근거가 된다. 휴식 없는 업무는 그가 가족의 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가지만, 그에겐 고용자를 위한 보험도, 휴식 시간도 없다. 쉰다는 건 곧 거대한 빚더미에 올라앉는 걸 의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울면서 출근을 말리는 아들을 뿌리치고, 망가진 몸으로 운전대를 잡은 리키의 모습은 불안하다. 리키는 그날 무사히 출근하고, 퇴근했을까, 아니면. 


불안정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는 동료와 가족들의 삶도 언제든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내 역시 간병인으로 일하며 시간에 쫓긴다. 간만에 마련한 저녁 식사 시간도 갑작스러운 호출에 침범당한다. 서로를 보듬어 줄 여유가 없는 부부는 과로와 함께 점차 시들어간다. 그 사이 자식들은 사실상 방치되고, 일탈을 반복한다. 언젠가 분명히 노동자들의 빛나는 성취였을 사회보장제도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므로. 하지만 리키가 불량배들에게 맞아 온 몸이 부서진 날에도 할당량을 재촉하는 관리자에게 아내는 소리친다. 이것이 무슨 자영업자인가.


1960년대 신좌파의 정치적-문화적 선전에 대응하기 위한 신우파의 반혁명 기획으로서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후반의 경제 위기로 인한 좌파 정권의 실각을 계기로 현실 정치에 반영될 기회를 얻었다. 이 시기에 영국과 미국에서 집권한 우파 정부는 노동 조건의 약화에 반대하는 노동조합을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고, 계급 대타협의 결과물로서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들을 '급진적으로' 해체하는 정치-경제 기획을 안착시켰다. 이 과정에서 '경영 혁신'의 결과물로서 외주화를 확산시키고, 노동자를 인적 자본으로 대체함으로써 자발적 계약의 외양을 띈 '종속적 자영업자'가 확산될 계기가 마련되었다.


책에서는 깊게 언급하지 않지만, 이 '자발성'의 외양은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 담론을 연상시킨다. 노동자가 아니라 인적자본으로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증진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적 정신을 장착한 주체를 재생산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기획의 핵심에 있고, 그것이 'High risk, High Return'을 감내하는 '프리랜서'를 누구나 따라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빚어내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실질적으로는 노동 과정에 대한 감독을 받으면서도, '자유롭고 창의적인' 존재로서 노동자성을 상실한 주체. 그래서 기존의 계급 대타협을 통한 사회적 보호 장치들을 우회할 수 있는 '종속적 자영업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법의 사각지대는 빠르게 넓어졌다. 법이 변화하는 속도에 비해, 기술 발전과 제도 해킹으로 법의 사각지대가 넓어지는 속도는 훨씬 빨랐다. 2000년대 들어 등장한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 기업은 그 법의 사각지대로부터 노동자에게 '지대'를 추출해내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플랫폼 기업의 노동자들은 단순하고, 일시적이며, 조각난 노동에 종사하지만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나 법에는 저촉되지 않는다. 그들은 법의 그림자가 넓은 나라로 외주와 하청을 준다. 이 '미캐니컬 터크'들은 저임금과 노동 통제권 상실에 시달리며 자기 삶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있다.


기술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는 서사는 자잘하게 쪼개지고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삶을 체계적으로 은폐한다. '혁신'을 강조하는 테크 기업들은 우리 삶이 얼마나 편해졌는지는 홍보하지만, 그런 기술을 누릴 수 있는 계층이 누구의 착취를 통해 기능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혁신'이 법과 제도로부터 노동자를 뽑아내 추출한 지대에 의존하고 있음은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테크노퓨달리즘』(노정태 옮김, 이주희 감수, 21세기북스, 2024)에서도 지적한 바가 있다.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러한 사회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 새로운 '노동'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




"문제는 선행해서 할 일들을 따지는 사이에 그 어느 하나도 '먼저' 실행되지 못해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노동자가 쓰러진다는 점이다."(91)


산적한 과제들이 눈 앞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해고는 여전히 쉽고, 실업 급여는 받기 어렵다. 받아도 눈치를 주고, 그마저도 적다. 아프면 쉬어야 하지만 상병수당도 없어서 살기 위해선 부러진 팔로도 운전을 해야 한다. 산재수당은 어떤가, 산재인정 비율이 높은 회사는 '그나마 처리를 해주는 곳이라서 인정 비율이 높더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우리 팀의 프리랜서 PD가 몸이 아파 나오지 못한 모습을 보고 '아파서 쉬면서 돈까지 받으니 참 편하고 좋네'라고 말하는 다른 프리랜서 PD의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란?) 


여성의 무급 재생산 노동에 대해선 제대로 된 계산조차 시도하지도 않고, 왜 재생산 노동이 저평가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주류 언론은 무관심하다. 말하기 좋고 화제성 있는 '세대' 담론, '성별' 담론에는 열광하지만 정작 그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계급 균열에 대해선 정부도 제대로 된 정책을 노정하지 못한다. 연구자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해도, 정작 일을 해야 하는 부서가 갈피를 못 잡고 정치는 지지부진하다. 무기력과 자괴감이 연구자인 저자를 감싸는 사이, 매일 산재로 과로로 자살로 노동자가 죽는다. 법 밖에서, 제도 밖에서. 


그가 마이클 부라보이의 공공사회학 이론을 언급한 부분을 재차 읽는다. "학자가 단순히 지식 생산에 그치지 않고 이를 사회와 공유하고, 사회구성원들의 시각이 새롭게 구성될 수 있도록 연구자가 담론 형성에 기여해야 한다"(194)는 문장은 그를 어쨌든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한 발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기 프로그램이 없는 PD가 무엇을 통해서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가? (무언가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끊임없이 주절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격으로라도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망설임 때문에.)




방송국이라는 공간을 돌아보며 책의 문장들을 가져다 대본다. "한국의 청년들은 특정 계층에 진입한 후에는 높은 수준의 숙련 직종이나 더 좋은 일자리로의 수직적 이동이 활발하지 않았다."(147) 어쩌면 가장 젊고, 가장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젊은 시절에 프리랜서들이 간신히 생계만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급여를 받거나, 자기 시간을 전부 갈아넣어야 하는 상황이 만연한 데에 '원청'인 방송국은 책임이 없나? 혹은 그 일을 전면적으로 항의하지 않는 나는 책임이 없나?


"이미 기득권층이 된 학자는 주류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평범한 이들'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203) 한 때 매일 자식이 사립고에 입학해서 고생하는 이야기, 인서울 대학 입학을 하기 위해 애쓴 부모의 이야기, 유학 가서 좋은 교육 받는데 돈이 많이 들어 걱정이라는 이야기만 울려 퍼지는 곳에서 일하던 때, 나는 '평범함'이란 무엇인지 매일 곱씹었다. 그들도 자신을 평범하다고 했다. (거주지는 부유하다) 그들의 눈에 매일을 간신히 버티는 친구들이, 당신들의 월급을 위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들어올지가 궁금했다.


"지배적 사회집단이라는 기득권이나 특권층에 속한 학자는 빈곤층도 불안정노동자 당사자도 될 수 없다(청년시절 한때 나도 어려웠다는 고백을 바탕으로 당사자이자 대변자임을 자처하는 연구자는 이미 학문적 엄격성에서 낮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202) '나도 한 때 가난했으므로' 가난을 안다고 말하는 부유한 사람들을 마주쳤다. 자기 자신의 위치가 시점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닌 듯했다.




그래도 냉소로 끝내진 말고. '패배자들의 연대'를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희망을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사이의 경계는 희미하고 모호해지고 있고, 더 중요한 구분은 고용 여부보다 업무의 종속 여부가 아니냐는 지적은 이 회사에서 근무하는 다양한 계약 형태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일정한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통의 저항 지점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회사와 관계 맺는 다양한 종속적 자영업자들의 악화되고 있는 노동 환경을 임금노동자의 '노동조합'이 함께 논의할 수 있도록 해볼 수도 있지 않겠냐 하는 그런 생각. 물론 법과 제도가 재정비되어야 하고, 노동 조합의 구성원들이 종속적 자영업자를 '동료'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하겠지만.


"종속적 자영업자가 어떻게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되는지, 사회적 보호제도가 오히려 어떻게 계층화와 불안정성 확대에 기여하는지"(222) 고민한다면, 임금노동자와 종속적 자영업자 사이엔 공통의 이해관계를 찾아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컴퍼니 인 컴퍼니나 각종 인센티브 차등 도입을 통해 노동자들 사이의 평등을 해체하고,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종속적 자영업자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자본의 압력이 여전한 상태에서,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는 우산이 남을 보호하는 우산이 될 수 있도록 계기를 뒤바꿀 필요가 있지 않은가. 노동자의 미래가 종속적 자영업자라면, 종속적 자영업자를 위한 조치는 결국 노동자를 위한 조치가 될 것이므로.


"다양한 패자 집단들이 서로 연대한다면, 정책 표류로 인한 불안정성에 맞서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 우리 시대의 노동은 더이상 단일한 형태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복잡성 속에서 집단 간 경계를 넘어 불안정노동의 새로운 연대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233)


끊임없이 갈라지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어떤 '단결'이 가능할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종의 '교차성' 뿐이다. 나는 정규직인 동시에 노동자이고, 남성이다. 어떤 점에서는 프리랜서 PD들과 이해관계가 상충되지만 노동자로서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 반대로 정규직 여성 PD와 프리랜서 여성 PD 사이에서는 '여성'이라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 서로를 가를 수도 있고 붙일 수도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서로를 붙이는 고정점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서 더 단단해져야만 한다. 노동조합이 그 점에서 반드시 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의 접합 지점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고, 노조원으로서도 이 부분을 더 깊이 탐색해 들어가야 하는 것일테고. 


노동자로서 말하고 읽고 쓰고 생각하기, 그 밖에는 지금 내가 가진 별다른 수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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