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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온함의 밑바닥에

싯다르트 카라, 『코발트 레드』

by 오학준 Jan 06. 2025


10년 전, 나는 가나의 타말레 북부에 있는 국경 검문소 앞에 있었다. 부르키나파소로 입국할 허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종종 덤프트럭이 국경을 지나갈 때마다 바닥에선 붉은 흙먼지가 일었다. 프랑스어는 전혀 할 줄 모르는데 어떡하나 고민하던 때에 눈길을 잡아끄는 작은 트럭 한 대가 보였다. 열살에서 열세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1톤 트럭 짐칸에 열 명 가까이 올라타 있었다. 몇몇은 아슬아슬하게 트럭 끝에 서 있어서 떨어질까 조마조마했다. 한 아이가 나를 보더니 큰 소리로 웃고는 옆에 탄 친구가 입은 옷을 가리켰다. 눈을 의심했다. 옷에 한글이 써 있었다. 어디서 구했을까? 선교사가 줬을 수도 있고 도로공사 하러 온 한국 기업 직원이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티셔츠에 써 있는 문구는 그런 '점잖은' 분들의 것이라 하긴 어려워 보였다.



누군가로부터 직접 받았다기보다는, 어떻게든 이 지역에 의도치 않게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아마도 이런 경로가 아니었을까. 한국에서 젊은 친구가 이 옷을 사서 잘 입고 다니다가 모종의 이유로 헌옷수거함에 던져 넣는다. 수거된 옷들 가운데 내다 팔만한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컨테이너에 쌓인다. 쌓인 헌옷들은 '재활용품'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도상국에 팔린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으로 흘러들어온 이 옷들 중 소각을 피한 약간의 옷들이 그들의 일상복이 된다. '짜식 눈 높네' 티셔츠를 입고 트럭에 매달려 사라진 친구와 나 사이엔 이런 긴 생산과 소비와 폐기의 사슬이 연결되어 있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과 연루되어 있다는 감정은 흥분을 일으키기보단, 당혹감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는 말이 단절된 개인들을 지탱해주는 버팀목 역할만 하는 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누군가의 비참에 연루돼 있다’는 회피할 수 없는 진실까지 들춘다. 그중엔 우리를 세상과 연결시키는 스마트폰·태블릿 피시·노트북·전기차와 은회색 광물 코발트를 둘러싼 진실도 있다." (이문영, 「스마트폰이 감추고 있는 '핏빛 연루'」, 『한겨레』, 2025년 1월 3일)


한글 티셔츠가 아니었다면, 나는 '연루되어 있다'는 감정을 끝내 몰랐을 수도 있다. 거대한 사슬의 양 끝에서 서로가 서로를 인지할 수 있는 경험은 드물다. 지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티셔츠'가 나에게서 버려져 그들에게로 향하는 쓰레기의 사슬을 떠올리게 한다면, 반대로 그들로부터 나에게로 향하는 또 다른 사슬은 없는가. 우리와 공간적-심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으면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물건들 중에 이런 사슬에 매달려 있는 것들은 없는가.


싯다르트 카라의 『코발트 레드: 콩고의 피는 어떻게 우리의 일상을 충전하는가』(조미현 옮김, 에코리브르, 2024)는 그 사슬 끝에 매달린 물건들의 목록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이 책을 구매하기 위해 앱을 구동한 스마트폰, 어제 아내의 출근을 책임진 하이브리드 전기차들이 그 목록의 일부다. 우리의 편안한 삶을 지탱하는 다양한 기기들이 그 긴 목록을 채우고 있다. 저자는 이 거대한 사슬을 "절대적 착취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를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현존하는 식민주의로.


오래 전부터 독특한 색을 내는 성질 때문에 안료로 쓰이던 코발트는, 오늘날 전 세계 패권 국가들과 글로벌 자본이 확보하기 위해 쟁탈전을 노리는 전략 자원이 되었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각종 스마트 기기에 들어가는 충전식 배터리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충전식 배터리의 주류가 된 리튬 이온 배터리에 들어가는 원료들인 리튬, 니켈, 코발트는 매장량이 많지 않고, 그마저도 몇몇 국가에 매장지가 집중되어 있다. 코발트의 주요 생산 국가는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콩고민주공화국이다. 2022년 기준으로 전 세계 코발트 생산량의 73%를 담당하고 있다. 2위는 인도네시아인데, 고작 5%에 불과하다. (Reuters, Indonesia became second largest cobalt producer in 2022 - Cobalt Institute, 2023년 5월 9일) 스마트 기기들의 유행과 발전은 콩고민주공화국의 기회이기도 하다. 풍부한 자원으로 발생한 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콩고민주공화국이 코발트 생산 과정을 어떤 식으로든 바꾸려고 시도하면, 전 세계의 스마트 기기 산업도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직까지 리튬 이온 배터리에 쓰이는 코발트를 대체하려는 시도들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그것이 성공해서 전 세계가 코발트를 더 이상 지금처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면, 콩고민주공화국의 경제는 (과거 구리 산업에 의존하던 칠레와 같이) 휘청거릴 수 있다. 그러니 콩고민주공화국과 이 자원에 투자한 산업 자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상 유지'다. 여기서 말하는 '현상 유지'에는 이러한 상황들이 포함된다. 코발트 광산의 채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하는 '장인 광부'들의 품삯을 계속해서 후려치는 것, 이를 국가가 알면서도 방관하는 것, 그리하여 발생한 초과 이윤이 국가를 개인의 치부 수단으로 활용하는 독재자와, 그들 편에 붙어 자원을 싼 값에 추출하고자 하는 글로벌 산업 자본의 몫이 되는 것. 콩고 인민들에게는 폐허만 남게 될 땅과 병든 몸만이 허락되는 것.


"우리의 일상은 콩고의 인적·환경적 참사에서 동력을 얻고 있다."(16)


콩고가 서양인들의 눈에 띈 이후, 콩코 지역의 풍부한 자원으로 형성된 부가 콩고 주민들의 몫이었던 적은 없었다. 19세기 후반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가 드넓은 콩고를 자신의 개인 식민지로 삼은 이래 콩고의 부는 오로지 지배자의 몫이었다. 레오폴드 2세가 자행한 노예 학살이 문제가 되어 벨기에에 땅을 팔아 넘긴 후에도, 2차 세계 대전 후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 신생 독립 국가인 콩고공화국의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만이 이 흐름을 뒤집어보려 시도했지만, 이 지역에서 확보한 이권을 놓을 생각이 없었던 산업 자본과 서구 국가들은 옛 동료들과 결탁해 그를 살해했다. ('친소' 성향인 루뭄바를 제거하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도 깊게 배어있다) 그 뒤로 집권한 독재자들은 자기를 도운 자본가들을 위해 광산을 헐값에 넘겼다. 과거엔 서구 열강들에게, 냉전 이후엔 중국에게 넘겼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외국 광산 회사들은 대규모 토지를 몰수하고, 주민을 몰아내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현지 주민에게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다시피 했으며, 그들이 예전에 살던 땅에서 장인 광부로 위험한 조건 아래 간신히 연명하게 방치했다."(175)


콩고 인민들의 삶은 그 사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가가 인민을 보호해야 할 임무를 방기하고, 독재자의 치부를 위한 장치로서 충실하게 기능하는 사이에, 기업들은 최대의 '채산성'을 내기 위해 최소한의 조치들조차 실행하지 않았다. 코발트 광석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오염 물질들은 아무런 처리 없이 광산 주변에 버려지고, 근처의 주민들은 분진과 폐수에 건강을 잃는다. 망가진 몸을 이끌고 하루 종일 작은 곡괭이 정도를 들고 작은 굴을 파 코발트 광석을 채굴하지만, 불법 채굴이기에 제대로 된 값을 받지 못한다. 하루 1달러 남짓의 월급으로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기에, 아이들마저 위험한 광산으로 향한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운 작은 굴은 쉽게 무너지고 때때로 물에 잠긴다. 젊은 여성들은 성폭행의 위협에 시달리지만 공권력은 오로지 광산으로 진입하려는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할 때에만 드러난다. 병들어 죽고, 뼈가 부러저 죽고, 굶어 죽고, 아니면 굴이 무너져 산 채로 죽는다. 도처에 죽음이 만연한 모습을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무덤에서 일하고 있소."(307)


"콩고 최빈층에 대한 부유층 권력자들의 지속적 착취는 현대 문명의 이른바 도덕적 토대를 백지화하고, 아프리카 인민을 그들의 대체 원가로만 평가하던 시대로 인류를 되돌리는 짓이다."(13)


'장인 광부'들이 비공식적으로 채굴한 이 코발트 광석들은, 기업들이 '공식'적으로 채굴한 광석들과 뒤섞여 공식적 채굴 과정의 일부로 융합된다. 공식적인 자원 거래 시장에서 이 불법 채굴의 결과물들이 거래되어선 안된다고, 불법 노동으로 채굴된 코발트 광석을 사용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는 스마트 기기 생산 업체들이나 국가가 있지만, 정작 그들은 이 코발트 광석의 생산 과정의 가장 말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보려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안다고 달라질까? 콩고민주공화국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면서도 이를 방조한다. 그것이 독재자와 지역 유지의 재산을 불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식 광산업체의 '채산성'을 맞추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장인 광부의 노동에 대한 착취는 공식적인 코발트 시장을 '건실하게' 굴리는 소위 '시초 축적'의 역할을 한다. 


"이 기업들은 하나같이 콩고의 열악한 코발트 채굴 환경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물론 다른 어떤 누구도 이런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기울이지 않는다."(29) 끔찍하게 길게 늘어진 공급망이 빚어내는 구멍들에 대해선 로리 파슨스의『재앙의 지리학』(추선영 옮김, 오월의봄, 2024)에서도 잘 언급되어 있다. "법 시행에 따른 직접적인 영향은 다른 형태의 공급망 규제에서처럼 많은 공급망들의 길이, 복잡성, 모호성에 의해 제한된다. 만일 기업이 공급망에서 어디까지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 선택할 수 있고, 그마저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기만 한다면 그런 선언의 의미는 생각만큼 크지 않을 수 있다."(『재앙의 지리학』, 86) 생산이 한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흩어진 생산 공장들과 하청업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오늘 날, 국가의 국경 안에서나 영향이 있을 '선언'들은 발표와 동시에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이는 의도된 무책임이다. 국가간 체계의 변화 없이 일국적 차원에서의 선언이나 기업 단위의 성명 같은 건 현실을 바꾸기보다 현실을 바꿨다는 안도감만을 줄 뿐이다.


"그게 썩어빠진 정치인이든, 착취하는 협동조합이든, 고삐 풀린 군인이든, 아니면 갈취하는 보스든 현지 행위자들을 대학살의 주체로 지목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이들은 각자 수행하는 역할이 있었지만, 보다 악의적인 질환, 즉 아프리카에서 미쳐 날뛰는 글로벌 경제의 징후이기도 했다. 틸웨젬베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겪는 윤리적 패륜과 무관심은 국제 공급망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가난과 취약함과 실추된 존엄성을 먹이로 삼는 세계 경제 질서의 직접적 결과다."(207)


나는 이 문제를 마치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일로만 치부하는 듯한 몇몇 기사들에 환멸을 느낀다. 위험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노동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아동 착취, 성착취가 저 멀리 나와는 분리된 곳 (나에게 '안전한 곳')에 있고, 우리는 그 사태에 연민을 느끼는 관람자인듯한 문장들을 볼 때마다 증오를 느낀다. 어떤 칼럼은 이 책을 언급하며 '중국'이 코발트를 독점해 앞으로 우리 산업에 악영향이 있을 수 있으니 빨리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고통보다 우리가 뒤쳐질 수 있다는 '공포'가 앞서는 문장들이었다. 책에서도 몇 번 언급되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기업들 가운데엔 한국 기업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생산된 코발트로 만들어진 스마트 기기에 삶을 의존하는 이 나라에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연루됨'에 대해 언제까지 무책임할 수 있을까.


'공급망 관리'라는 이름으로 해외 광물에 대한 채굴권을 확보하는 행위에서 '국격'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이 모든 일이 지금까지 이뤄놓은 1세계 말석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식민지 사냥'에 동참한다는 부끄러움을 일으킨다. 제국주의의 결과로서 잔혹한 압제를 받았던 나라가, 그 체계를 그대로 답습해 반복하는 일이지 않은가? 2008년 대우가 마다가스카르 정부와 맺은 비밀협약은 그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마다가스카르 농경지의 절반을 무상으로 임대받고 대신 고용 창출과 사회기반시설을 설치한다는 협약인데, 정작 그곳에서 재배하는 작물은 죄다 수출용 옥수수와 팜유였다. 성사되었다면 '땅'이라는 자원으로 일군 부는 마다가스카르의 인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스테파노 리베르티의 『땅뺏기』(유강은 옮김, 레디앙, 2014)를 참조하면 좋다.) 


한 때 피식민지의 위치에서 착취와 추출의 경험을 했고, 한 세기만에 이 식민주의 시스템의 상부에 올라타 호시탐탐 새로운 경제 식민지를 노리는 기묘한 위치에 놓여 있는 한국. 그 나라의 인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제대로 행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다. 식민주의가 피식민국의 탓이 아니듯, 이 시스템은 책임져야 할 주체가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이 그 나라 자신의 목소리로 문제를 고발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강고한 식민주의 체제를 모른 체 유지하는 패권 국가의 정치인들에게 우리는 변화를 요구하고 책임지길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말석에 이 나라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이 말석의 나라의 정치인들에게 어떤 책임있는 행동을 요구할 것인지 논의하는 데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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