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6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정치로서의 '내전'

피에르 소베르트 외, 『내전, 대중혐오, 법치』

by 오학준 Dec 29. 2024
브런치 글 이미지 1


최근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피에르 소베트르, 오 게강의 『내전, 대중혐오, 법치』(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원더박스, 2024)을 다시 읽었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독재를 꿈꾸며 내전을 일으킨 자들과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만들었다. 이전엔 조금 후루룩 읽고 지나갔던 "사회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갈수록 노골화하는 오늘날 벌어지는 일들은 실제로 내전이다."(10)와 같은 문장이 더는 이전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저자들 중 두 사람,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앙 라발의 전작인『새로운 세계합리성: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에세이』(오트르망 옮김, 그린비, 2022)에서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사상사적 계보를 추적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대한 반론들을 제기한 바 있다.(어쩌면 그 반론조차 이제는 익숙하다...) 고전 자유주의의 약점과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경제 프로젝트'로서 신자유주의는 1)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하고,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다양한 사회적 협약과 제도, 단체를 파괴하며 2) 이러한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수행할 '자기계발'의 주체를 재생산하는 데 목표를 둔다. '작은 정부'라는 것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우며, 실상은 반평등주의의 유토피아를 현실화시키려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주체 개조 기획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전, 대중혐오, 법치』도 이 논의의 연장선이며, 다만 조금 더 자세히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정치 전략을 다룬다. 저자들은 전후 노동과 자본의 대타협으로 유지된 '사회국가'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합리성을 구축하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을 통해 기능하는지를 훑어본다. 그 중 책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내전'이다. 여기서 내전이란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17-18)이다. 


"각 국가들은 온갖 수단과 정동을 동원하여 평등과 사회 정의에 대한 요구와 기대를 외부 또는 내부의 적, 성가신 소수자들, 지배적인 정체성이나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집단들에 대한 적대로 유도한다."(18)


신자유주의는 꾸준히 인민 내부의 해묵은 균열들을 호출해 일부의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내고, 그 힘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가 권력을 휘두르며 내부의 '적'을 진압해 나감으로써 사회 개조의 목적을 달성해 나간다. 그 균열이 힘을 다한다면, 또다른 해묵은 균열들이 호출될 것이다. 노동자, 빨갱이, 종북, 이민자, 소수자... 불러낼 수 있는 균열들은 다양하며, 이를 다스리는 방법 역시 문화적, 법적, 물리적 조치들로 그 한계가 없다. 신자유주의는 그 유연성을 바탕으로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가장 권위적인 방식으로 국가 폭력을 활용하길 서슴지 않는다. 1973년 칠레 아옌데 정권을 무력으로 뒤집은 피노체트 군부는 경제정책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시카고 보이스'들을 적극적으로 초빙한다. 1975년 재무부 장관에 임명된 세르히오 데 카스트로는 권위적인 국가 권력을 활용해 노조를 파괴하고, 금융 규제를 완화하는 등 급격한 경제 개조에 나섰다. "냉혹한 시장 법칙에 의해 모든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조"(52)한 칠레는 몽펠르랭협회의 참석자들에게 중요한 참조점이었다. (얼마나 중요했는지, 하이예크는 1981년 피노체트 독재 정권을 지지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자유주의를 결여한 민주 정부보다 자유주의적 독재를 선호합니다."(33))


"신자유주의는 잠재적으로 자유를 말살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국가 개입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에 완전한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식의 정치 설화"(59)는 환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묘한 개념의 조합('자유주의적 독재')이 가능한 것은, 그들의 철학 밑바탕에 강력한 대중혐오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이들에게 있어 우민의 선동과 도덕적 타락에 휘둘리는 '민주주의'는 "자유와 문명에 적대적인 위협"(58)이었다. 그들은 평등과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초를 세운 선구자들(월터 리프먼,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예크 등)은 여론의 지배나 대중의 어리석음이 자유주의를 위협하기에 이 '인민주권'을 제한할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역설했다. (월터 리프먼의 『여론』에서도 이 '민주주의' 혐오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들은 항상 근본적으로 대중을 혐오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무제한적' 혹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구별하며, 전자를 수단으로 후자를 무력화하는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다."(63) 그들에게 있어 '자유민주주의'란 단지 책임감있는 최상의 전문가를 올바르게 선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넘어서는 모든 '민주주의'는 '병리'일 뿐이다.


정치의 경제화라는 '사회병리'를 치유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 국가는 권위적인 수단들, 폭력에 의존해서라도 시장 질서를 방어해야 한다는 게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다. 특정한 신자유주의만이 권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는 이미 내재적으로 권위주의적이다."(79) 신자유주의 국가는 법적, 정치적 틀은 대중 유권자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제한할 수 있어야 하며, 시장경제의 근본법을 보호하기 위해서 튼튼한 '제도적' 방벽을 갖춰야 한다. 특히나 공산주의, 사민주의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서 독재와 국가 폭력의 동원은 초기 논자들로부터 꾸준하게 고려되었다. 가령 미제스의 경우 파시즘을 "자유주의를 위한 문명의 수호자"(97)로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다.


또한 이들은 단지 시장 질서가 위협받을 때 이를 구하고자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말하기를 넘어서서, 아예 시장 질서가 헌법화하고, 이를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상시적인 폭력 수단을 활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 독재와 파시즘은 '경제의 입헌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헌법'은 현존하는 주체들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 질서처럼 스스로 성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시장 질서를 가장 상위의 법령으로, 어길 수 없는 자연법으로 자리잡게 하려는 정당화의 수단일 뿐이다. 이들이 말하는 '법의 지배' 그 어디에도 '인민'의 의지는 개입의 여지가 없다.


대체 누가 신자유주의의 적인가? 가장 큰 적은 '집산주의'와 '사회주의'다. 이 둘은 "자유로운 시장 가격 결정, 소유, 사기업, 경쟁 등에 기초한 건전한 경제를 변경하여 통제하고 대체하고자 하는 모든 형태의 국가 주도 계획경제를 가리키며, 그 정점에 공산주의 계획경제가 있다."(137) 신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시장의 자발적 질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들의 목표가 이에 대항하는 것임을 천명한다. 정부의 복지, 재분배는 시장 질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기인한 미신적 행위에 가까우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민주주의'를 "그 자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부의) 힘을 제한"(138)하길 요청한다.


문제는 정부의 재분배가 일어나지 않는, 만인이 경쟁하는 시장에서 불평등은 숙명에 가까우며 이것이 쉽게 다수 대중들로부터 도덕적으로 정당화가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떻게 하면 다수가 신자유주의 기획에 동의할 수 있을까? 신보수주의의 이념은 신자유주의 기획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이예크는 "'전통'과 '자발적인 순응주의'에 기초하는 종교와 가족 등 인습적인 가치들이 시장 질서의 작동을 위해서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167)고 보았으며, "전통적 도덕을 근본주의적인 원칙으로 정당화하기보다는 그것에 규범적 기능을 부여하려"(175) 했다. 위험에 빠진 서구 문명을 수호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지도적 원리가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기획은 일국적 차원을 넘어서, 국제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세계 질서 성립도 목표로 삼았다. 이 체제는 국제 경제 관련 조직에 민주주의적 원칙이 도입되는 것을 저지하고, 국민국가의 책임 영역을 정치적 차원에 한정시키며, 창조된 세계 경제 질서에 경제를 내맡기는 체제다. 이는 이중적 목적을 가지는데, 하나는 세계 경제 질서에 국민국가를 조응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세계 경제 질서 규범이 탈선할 경우 이를 바로잡을 전초기지로서 국민국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즉 "공동의 규칙이 자유의 도그마를 침해할 때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강대국들의 국민주의"(183)도 신자유주의 새로운 세계 질서 조직 계획의 일부분인 것이다.


저자들은 1960년대 문화 전쟁에서 좌파가 승리하고, 그로 인해 서구 사회의 전통적 문화나 가치가 불안해진 시기, 대안 우파가 이를 서구 문명의 종말로 재정의하고 도덕적 질서의 복구를 목표로 신자유주의 기획을 불러온 상황에서, 정작 신좌파가 인민계급을 포기함으로써 그들로부터 버려졌음을 지적한다. "요컨대 좌파는 유럽과 전 세계의 새로운 신자유주의 질서에 별다른 조건 없이 항복했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항하는 싸움을 단념하고 중산층의 좀 더 '현대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선택한 것이다."(216) 그리고 우파는 "인민계급의 가치(노동, 능력, 가족, 권위)를 회수함으로써 각 사회 계급이 정당들과 맺는 관계가 재정의되었다."(221)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동을 해방과 자기 실현이라는 '신좌파적' 언어들을 자기들의 방식대로 재전유하여 덧붙임으로써 노동자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했고, 그리하여 '계급의식'이 출현할 조건들을 파괴해 모든 투쟁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집단적 힘이 가장 필요한 노동자들이 동료와 자기 자신을 경쟁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각자도생을 통해 생존하는 것만이 유일한 승리임을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다. 이는 "노동이 토론과 협력을 통해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발명하는 중심 공간이라는 의미에서"(238) "노동 자체가 지닌 '민주주의적 잠재력'"(238)을 위협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국가의 직접적인 폭력 사용은 점점 더 정당하고 당연시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인민 대중은 질서를 교란하는 '적'이 된다. 국가의 '적'인 그들은 테러를 유발할 위험이 있고 사회 질서를 흐트러뜨릴 수 있기에 그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경찰의 권한과 수단을 강화하는 일이 정당화된다. 비상 사태를 통제하기 위한 '예외적 조치'들은 점차 일상적인 저항에도 적용된다. "법치국가와 완전히 반대되는 '예외 상태'에 의해 법적 질서가 단순히 중단된다는 생각과 다르게, 우리는 지금 법적 질서의 근본 규범을 상당한 비중의 안전 관련법으로 대체하는 관리 및 치안 방식의 변형을 목격하고 있다."(269)


물론 군사적 개입보다 더 효율적인 법률전(lawfare)도 동시에 작동한다. 법률을 통해 원하는 만큼의 정치-전략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굳이 군사적 조치보다 법률적 조치로 '합법성'의 틀 내에서도 내전을 진행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입헌주의는 사실상 대의제도를 무시한 채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 향상을 가로막는 방벽으로 기능한다."(274-275) 특히 인민의 의지로 선출되지 않은 법 전문가들이 대의제에 대한 회의를 틈타 자신들을 유능하고, 중립적이며, 부패와 무관한 엘리트로 포장해, 법을 구실로 정치적 행동을 일삼는 일이 발생한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법의 전쟁은,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모든 형태의 '인민주권'에 대한 법적 부정을 체계화한다."(277) 남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은 한국에서도 자주 벌어진다.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을 남김없이 가부가 존재하는 사법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는 정치의 '사법화'와 맞물려, 사실상 인민주권이 '법치'에 완전하게 종속되는 상황이 가속화되고 있다. 물론 이 법 전문가들이 지키고자 하는 법 질서는 사실상 인민의 요청과는 무관하다. (내란 수괴를 단죄하는 일이 '입법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법부'에 있고 그로 인해 인민 다수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전이 장기화되는 지금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맞서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저자들은 내전에 대항하는 '혁명'을 이야기한다. 국가 권력을 탈취하자거나 국가를 포기하고 다른 무언가를 세우자고 말하자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공동체 집단들을 가로질러 평등과 민주적 자치를 위한 투쟁을 중심 축으로 삼고 "모든 분야에서 평등을 우선으로 하는 모든 요구를 결집"(333)하자고 말한다. 경제적 투쟁, 문화적 투쟁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평등을 위한 사회적 투쟁이 있는 것"(333)이다.




끔찍한 문장들은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설명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공산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거짓된 대립을 꾸준하게 밀어붙이고,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노동조합을 반국가세력으로 몰고, 거부권을 마치 법안 심의권처럼 남발하며 입법부를 사실상 무력화하던 자가 끝내 군대를 동원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시도하면서 정작 발표문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자의 얼굴이 문장들 사이를 비집고 떠오른다. 어쩌면 이 책만큼 지금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책도 없지 않은가 싶다.


민주주의 제도를 무력화하고 사실상 종신 집권을 기도한 이를 '신자유주의자'라 말할 것인지 아니면 '극우 파시스트'라고 말할 것인지는 다소간 고민이 있다. 군대를 동원해 입법기관을 봉쇄하고 무력화한 후, 모든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박탈하려는 조치를 포고령으로 내세운 그도 이 책에서의 분류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때로는 파시즘과 독재도 '자유주의적' 질서의 확립을 위해선 필요하다고 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미래를 꿈꿨는지는 모르지만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회복'을 내걸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간발의 차이로 끔찍한 결말을 피하고 식은땀을 닦으며 읽은 이 책의 결론을, 처음엔 좀 싱겁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항상 하던 말들의 반복처럼 들렸다. 일상에서의 민주주의 실천, 서로를 지우지 않으면서 함께할 수 있는 연대, 공통의 이해관계를 찾아내어 형성하는 단일 전선 등등. 그가 비판하는 다른 이들에 비해 특별히 더 구체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가 비판하는 라클라우와 꽤 닮아 있는 부분도 있다고 느꼈다. (평등과 민주주의 전략이 라클라우-무페의 반자본주의 전선 전략과 얼마만큼 차이가 있는 걸까?) 게다가 전선 형성에 어찌 성공한다 하더라도 일국적 차원에서의 국가 권력 획득과 생활세계 개조를 넘어서는 국제 질서의 개조까지는 또 거대한 무력감의 벽이 있는데, 어떤 청사진이 있는지가 보이지 않았다. (생활세계-국가권력-국제질서라는 세 단계를 동시에 고민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냈던 것이 단순히 반혁명의 성공뿐만 아니라 경기 침체와 그로 인한 이윤율 저하, 복지국가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인한 것이기도 한데, 이러한 경제적 원인들에 대한 별도의 언급이 없다는 건 신자유주의를 온전히 '상부구조'의 차원에서만 다루는 느낌이다. (신자유주의를 '경제-정치-사회-문화' 차원에 걸친 개조 계획이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계엄과 탄핵 국면을 거치면서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데모스'의 형성에 대한 약간의 낙관이다. 저자들은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위한 투쟁과 여성, 민족, 인종, 성적 소수자, 세대 등을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투쟁을 분리하거나 대립시키지 않아야 한다"(333)고 말하며 "다소 자의적인 '부유하는 기표'를 통해 위로부터 혹은 외부로부터 그러한 요구들을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들이[요구들을의 오타로 보임] 서로 '교차시키는 것"(333-334)이 새로운 좌파의 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 과정이 순조롭거나, 조화롭거나, 합의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대립과 복수의 의견이 표출될 것이다. 하루 아침에 탄생하지도 않으며, 단지 "권리 행사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한 집단적인 행동과 실험 속에서 세워지는 것"(335)이다. 


탄핵 집회 과정에서 우리는 평소에 머리채를 붙잡고 싸울만큼 다른 존재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장에 몰려들고 서로를 발견하는 경험을 했다. 으르렁대며 비난하다가도 민주주의의 파괴를 막기 위해 잠시 싸움을 멈추고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거대한 신체의 일부가 되기로 동의하는 경험을 했다. 그 공간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통해, 호명을 통해 우리는 서로 정말로 다르고 그렇기에 싸울 것이지만, 잠시나마 함께 할 수 있음을 배웠다. (물론 여전히 난무하는 혐오들에 우리는 절망하고, 분열되기도 한다.)


2016년의 촛불 시위의 경험이 우리를 쉽게 '낭만'으로 빠져들지 않게 막아주고 있지만, 여의도가 남태령으로, 남태령이 혜화역으로, 혜화역이 다시 부산 남구의 국회의원 사무실로 옮겨붙는 모습에서 우리는 계산 바깥의 힘을 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탄핵 국면이 끝나고, 다시 87년 체제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지금처럼 이 '해묵은 의제'들에 그만한 관심을 보여줄 진 모를 일이다. (비관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농민을, 성소수자를, 장애인을, 지방을 '시민'으로 주조해내는 자발적인 사람들을 목격했다. 지금 필요한 건 우리가 하나의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참여자들에게 남기는 흔적이다.


내일 다시 머리채를 붙잡고 싸울 사람들이, 어제보다는 조금 더 가까이서 서로 덜 불편한 곳을 붙잡고 싸울 수 있게 만드는 건 하나로 만드는 경험이다. 물론 그것이 온전히 참여자들의 자발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음을 물론이다. 광장을 구성하고, 시민을 조직하고, 참여를 독려하고, 권력에 맞서 싸워 온 수많은 운동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거멀못이 되지 않았다면 광장은 더욱 빠르게 한산해지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남은 흔적도 희미했을 것이다. 


우리는 짧은 순간 거리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합리성'을 보았다. 그것이 새로운 주체들을 탄생시킬지, 아니면 또 다시 쓰라린 상처로 남을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독재를 관철하려는 내란 세력을 처벌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이들을 양산하는 사회 구조를 새롭게 고민해야 할 때다. 그것이 단지 '개헌'이나 '내란죄 강력 처벌'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이 벼락같은 경험을 어떻게 공고하게 만들 것인가. 광장에 울려 퍼지는 '사회대개혁'은 무엇을 단단한 토대로 삼을 것인가. 고민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일요일 연재
이전 22화 쪼개지는 노동자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