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원, 정치적 독자들
오랜만에 책을 들고 망원으로 갔다. 거의 2~3년 만에 퀜치 커피에 갔다. 개점 시간에 맞춰 갔는데 앞에 일곱 잔이나 주문이 밀려 있었다. 자리에 미리 앉아 책을 펼쳤다. 한상원의 <정치적 독자들: 현대 정치철학의 마키아벨리, 홉스, 칸트 독해>였다. 그람시, 알튀세르, 슈미트, 벤야민, 아감벤, 아렌트, 랑시에르, 아도르노 등 다양한 현대 정치철학자들이 자신이 당면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마키아벨리, 홉스, 칸트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해'했는지 정리한 책이다.
"결국 이 책에서 필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정치철학은 언제나 정치적 독자들이 수행한 정치적 독해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과거의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대결 속에서 전개돼왔다는 사실이다." (6)
위에서 언급한 정치철학자들은 각자 고유한 정세에 직면해 있었다. 그람시는 1920년대 이탈리아 북부의 토리노 공장 평의회가 대중의 단단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상하는 파시즘과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알튀세르는 갈팡질팡하며 순진한 낙관주의로 일관하는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이론적 투쟁을 펼쳐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벤야민은 히틀러와 나치가 집권한 독일이 유럽 전역에 몰고 올 전쟁과 파국의 열차를 멈출 수 있는 계기를 찾고 있었고, 아도르노는 이성의 끝에 마주한 광기의 결과물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의 텍스트에서 계기를 찾았다.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이들의 텍스트로부터.
오래 전 내가 정치철학자들의 책을 탐독하던 건 그들이 하나같이 끊임없이 자신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텍스트들을 새롭게 읽어내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읽기가 언제나 온당한 것은 아니고, 때로는 현재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적당히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책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슈미트가 홉스를 부당하게 읽어내듯이)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내게 꽤 매력적이었다. 현실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서 '독서'를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정치철학자들은 '정치적'으로 과거를 읽는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해답을 내놓는다. 그람시는 분열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통일을 위한 결속력을 확보하려는 마키아벨리의 텍스트를 통해 '정치적 지도력'의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헤게모니' 개념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알튀세르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공산당 이론가들에 맞서 이데올로기의 강제성, 물질성을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됐다.
"군주를 '주체'의 테두리로 묶어 이를 다만 개인에서 집합으로 확장했던 그람시는 여전히 '주체의 의식을 통한 역사의 변화'라는 역사주의·경험주의적 사고에 묶여 있었으며, 알튀세르가 보기에 이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즉 의식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우위와 그 '강제력'-이라는 비밀을 알려주는 마키아벨리와도, 역사주의를 넘어 구조적 인과성을 사유한 맑스와도 일치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다." (47)
정치철학의 텍스트를 연대순으로 나열해 오래된 것이 잘못된 것이고 새로운 것이 옳은 것이란 판단은 확정적이지 않다. 애초에 마주한 정세가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대응이 달라질 뿐이다. 물론 뒤따르는 사람이 앞선 사람보다 더 유리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도 모든 상황에 적용되진 않는다.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해 읽느냐, 독서의 목적이었다. 그것이 실천 전략의 확보인지 아니면 이론적 공백의 해소인지에 따라 참조점은 달라진다. 그리고 달라진 참조점이 다양한 정치철학적 논의를 만들어낸다.
"거꾸로 이론가이던 알튀세르에게는 정당의 창설자이며 지도자이자 투옥된 국회의원인 '정치가'로서 그람시가 행한 고민의 실천적 무게에 비교될 만한 전략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는다."(54)
중간중간 '보론'을 통해 저자 역시 자신이 당면한 정세에 대한 대답을 내놓으려 시도한다. 가령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를 통해 공화국이 적대를 다루는 방식을 언급하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 공간 안에서 갈등과 분열이 실상 파벌 사이의 사적 반목이나 상호 혐오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다든지. 예외상태에 대한 슈미트와 벤야민의 논쟁을 다루면서 아감벤의 해석을 비판하고 '진정한 대안주권'의 형성을 더듬어 본다든지. 저자는 정치철학자들의 독해를 소개하는 동시에, 자신의 독해를 곁들이며 그들은 '반복'하려 시도한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하나의 욕망에 시달렸다. 정치철학자들이 대면한 고전 텍스트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을 다시금 읽고 대결하고 싶다는 욕망. 오래전에 어느 정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포기했지만, 여전히 서가에 잔뜩 꽂혀있는 수많은 정치철학 (정치학이 아닌) 텍스트들을 다시금 붙잡고 씨름하고 싶다는 욕망. 왜? 역사와 정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사는 데 바쁘고, 먹고 사는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억압받는 자들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가?"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당면했고 끊임없이 대답하려 애썼던 과제는 다양한 해답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그림자는 조금씩 옅어졌다. 오늘날 비판이론가들의 사유 속에 마르크스주의란 일종의 '참조점' 역할로만 기능한다. 계급은 더 이상 직접적으로 언급되거나 중요한 무엇이라기보다 '부정'의 형상으로서만 등장한다. "계급이 전부는 아닌데..."
"미셸 푸코는 1977/1978년의 한 강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마키아벨리는 맑스이겠죠. 맑스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맑스를 통해 말들이 나오니까요." (13)
애초에 정치철학자들의 읽기도 일종의 '부정'이다. '그들이 언급한 내용은 중요하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혹은 무엇인가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하다. 그러나...' 계급혁명의 유예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한 동의,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의 힘, 고유한 사유의 박탈... 등의 설명을 통해 정당화된다. '왜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을 붙이든, 아니면 '일어나야 할 일이라는 게 있는가?'로 질문을 변경하든... 과거의 악역과의 대결을 통해 정치철학은 그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한다. 그것이 나쁜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대결'할 것.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는 그럼 대체 어떤 '정세'에 직면해 있는가? 무엇인가 제대로 결정하고 변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결정을 유예하는 상태만이 오래 계속되고 있다는 감각은 있지만, 그것을 정합적이고 전체적으로 설명하기란 보통의 시민으로선 어려운 일이다. 이 난감함을 해소하기 위해 독서를 택했고, 나름의 성과(라는 게 있다면)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는 지점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는 점.
하지만 훈련되지 않은 시민 독자로서 이러한 책을 특정한 '정세 판단' 속에서 읽는 일이 나에게 얼마만큼의 도움이 될까? 진지하게 생각하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훈련되지 않은 오독'이 가지고 올 위험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특히 '아, 이 중에서 내가 맘에 드는 사람은 이 사람이니 이 사람의 주장을 인용해야겠어.'와 같은 방식이라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유형이다)
사실 이 책을 통해 일반 독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쩌면 끝까지 읽어보며 서로의 읽기가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를 파악하는 정도일 지도 모른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 등장하는 이들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꽤 '대중적인'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 수많은 논의들의 얽힘의 전모를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논의의 장에 끼어들기 어려운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듬거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하나의 질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 나는 '제대로' 읽었는가? 여기서 말하는 '제대로'란 뜻을 분명하게 정확히 읽어냈느냐라는 것뿐만 아니라, 정확히 정세를 파악하고 그에 부합하게 텍스트를 배치하고 인용하고 있느냐는 것도 포함할 것이다. 읽기 자체도 없지만, '제대로' 읽는 것이 드문 시대에 나는 어느 쪽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가. 갈수록 그 부분에 확신이 없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