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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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를 유영하다 요새 출간되는 책들에 대한 푸념을 마주했다. 다들 책을 내고 싶어하는데, 그 책 내용이란게 아무말인 경우가 많아 실망스럽다는 거다. 근데, 언제는 안 그랬나? 헌책방엔 오래도록 주인을 찾지 못한 책들이 널려 있는데, 그 책들도 사실 별 쓸데 없는 이야기로 가득하여 버려진 게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어한다. 단지 이제 책을 좀 더 내기 쉬워졌으니, 책을 통한 헛소리가 늘어난 것 뿐이다.
정말 그런가? 그게 자연스럽긴 한데, 책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둬도 될까? 합의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저자의 자격이나, 글의 품격에 대한 기대... 이런 게 무너지면 책 전체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도 무너지는 건 아닌가? 가령 예전엔 서가를 훑다가 서너 권 정도 시덥잖은 책을 건너 뛰면 나름 읽어보고 싶은 저자의 책이 나왔다면, 요샌 느낌상 열 권은 뛰어 넘어야 손이 갈만한 책이 보인다. (내 책이 그런 징검다리가 되지 않게 필사적으로 수정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고 내버려두었다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시대가 오는 건 아닌가?
좋은 책을 고르는 데 들이는 노고가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책에 손을 대길 꺼려할 것이다. 가격은 오르지, 부피는 크지... 책을 사지 않을 이유는 넘쳐난다. 그나마 책이 사람들에게 썩 괜찮은 정보 습득의 수단이니까 여전히 읽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블로그를 생각해 보라. 여전히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고, 멋진 글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상한 캐릭터가 난무하는 판에 박힌 홍보글들이 늘어나면, 좋은 글을 고르는 시간은 배로 는다. 누가 이곳에 와서 글을 볼까? 아무도 오지 않으면, 아무도 쓰지 않는다. 글이라는 건 여러 포맷으로 쓸 수 있는 거고, 책은 그 중 하나다. '기대'가 전부일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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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쓰는 사람과 좋은 글을 읽는 사람을 연결할 수 있을까? 서평은 꽤 적절한 연결 통로다. 책에 대한 자기 감상만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적절한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사람들에게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서평 자체도 문체가 있어 읽기 까다로울 수는 있지만, 어쨌든 한 번은 누군가가 소화를 해서 정리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 책을 읽는 일보다는 수월할 거다. 여기 좋은 책이 있다고 잘 설득할 수 있다면 최선의 결과를 내겠지. 그러나 서평은... 생각보다 쓰기 힘들다. 서평은 책의 밑바닥보단 쓰는 사람의 밑바닥을 더 보여주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해서 서평을 써서 얻는 게 없다. 『서울 리뷰 오브 북스』를 창간호부터 구독해서 읽고 있지만, 서평으로 매문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의 시대는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도 계속 꼼지락대고 있긴 하다만)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 사람들이 읽기를 싫어한다는 착각』을 쓴 김지원은 뉴스레터라는 방식을 시도했다. 자신도 좋은 글을 찾아 읽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읽을 맛이 있고 읽을 가치가 있는 텍스트들을 소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런 좋은 텍스트들이 높은 확률로 책이었기에 책을 소개하게 되었다고 했다. 수많은 텍스트들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 책이 여전히 사람들의 '읽기'에 대한 욕망을 가장 잘 만족시켜줄 수 있는 매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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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책의 형태로 제공된 텍스트가 신실한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제공한 진실된 읽기 경험"을 영상이라는 텍스트로 재현해보고 싶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이 "진실된 읽기 경험"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영상도 때때로 가능할 것이다. 그 작은 가능성을 내 손으로 이루어내는 일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책이 진실한 읽기 경험을 생산해낼 수 있었던 건, 어떤 주제에 오래 천착해 그 사유의 흔적을 물리적 매체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정보들 가운데 무엇을 담아둬야 할 지 알 수 없을 때, 좋은 책은 등대의 역할을 했다.
교양 프로그램의 존재 의의도 비슷한 건 아닐까? 밀도 높은 정보들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떻게 세상을 바라봐야 할 지 알려주는 기준점을 제공하는 것. 아니면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하여 언제나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제공하는 것. 글로 쓰인 것에 비해 인지적 부담이야 더욱 적겠으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마음에 확실하게 호소할 수도 있다.
영상이 누군가에게 진실된 읽기 경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지만, 갈수록 밀도를 낮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어렵고 복잡한 정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이유로, 말초적인 재미만을 더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 부서의 필요성을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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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세상에 너무 빠르게 적응해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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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국 선배들은 언제나 책을 읽었다. 그들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한가득 책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책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 말한다.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지 않아." 그럼 당신들은 사람이 아닙니까?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재미는 자신들만 얻을 수 있는 건가? 사람들이 이 고급진 재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 그렇게 만들어서 당신같은 사람이 되게 하면 안 됩니까?
영상을 '읽게' 만들어야 할 이유는 우리 스스로에게 있었다. 독자를 만들지 않고서는 교양 프로그램의 시청자는 계속해서 사라질 것이다. 믿을만한 정보, 깊은 정보,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영상을 만들어내지 않고서 교양 프로그램을 계속한다는 게 앞 뒤가 맞는 이야긴가? 교양의 핵심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울타리 안에 있고 싶어하긴 한 건지 항상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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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레스토랑, 파인 다이닝, 그리고 길거리 음식점의 공략 방식이 다르고 대상으로 하는 고객이 다르듯이 예능과 교양, 드라마가 대상으로 하는 고객은 명확하게 나뉜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하나일 수 없다. 파인 다이닝에서 떡볶이를 판다고 해서 사천 원에 팔 수는 없듯이, 아무리 맛있게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벽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벽이 ‘재미’와 ‘읽기’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깊이가 없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재미는 사람들을 사로잡지만, 언제나 갈대처럼 흔들린다. 이 때 재미있던 것이 저 때는 재미가 없다. 취향은 변하고, 세상의 기준은 언제나 변한다. 한 때 재미있었던 유머가, 다시는 사용해선 안 되는 방식의 놀림이었을 때 우리는 그 영상을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다. 그런 게 한 두 개인가? 편견은 이용할 땐 편하지만, 오래 지나고 나서 우리가 활용할 수 없는 거대한 짐짝이 된다. 그것도 교양 프로그램이 그런 일을 나서서 해야 할 이유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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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질문으로 끝을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