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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Mar 24. 2024

책 이야기인가 영화 이야기인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내전, 대중혐오, 법치>


1

호기롭게 일주일 전에 연재를 하겠노라 장담을 해놓고, 정작 오늘이 될 때까지 한 줄도 완성을 못했다. 주중에 미리 쓸 수 있을 줄 알고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까지 예매해 놨는데 (심지어 언택트 톡이라 거의 세 시간을 잡아먹었다)... 게다가 어제 저녁엔 편집자님이 정성스레 교정을 봐 준 원고가 도착했는데, 열어보니 고쳐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업보다. 부랴부랴 신촌역 근처 카페에 앉아 자판을 두들긴다.


2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봤다. 두 시간도 안 되는 상영시간이라니, 이것이 감독님의 은총이다. 게다가 대사도 많지 않고 롱테이크가 대부분이라, 잠깐씩 눈을 감았다 뜬다 해도 감상엔 큰 무리가 없다. 물론 졸지 않고 끝까지 봤다. 4분 가까이 이어지는 롱테이크 오프닝을 참을 수 있다면, 그 이후엔 상당히 흥미롭게 볼 수 있다.

리뷰가 풀려 있는 수준에서만 이야기를 하자면, 마지막 시퀀스는 관객들을 충격에 빠트린다. 비극적인 사건의 피해자는 관객들이 가장 이해할만한 인물이다. 동기도, 행동도 이해할 수 있고 연민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피해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왜 하필 그여야 하지? (아래 문단은 살짝 스포가 될 수 있다)

영화는 영화의 편집 방식으로 대답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관객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이 '짐작하던' 그 장면이 아니라는 사실에 당혹스럽다. 감독은 누군가의 시선인 줄 알았더니 롱테이크 끝에 그 시선의 주인공이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온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편집해서 쇼트에 대한 관객의 믿음을 계속 배신한다. 왜 마지막이 당혹스럽지? 당신이 정말로 주인공의 속마음을 본 적이 있나? 영화는 당신이 정말로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준 적이 없다. 무표정한 그 사람이, 네가 생각한 대로일까?

그래도 왜 하필 그 사람인 걸까? 사실 '악'이 있다면 더 고통받아 마땅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사냥당하는 사슴이 꼭 그 사슴이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같은 건 없다. 단지 조준하고 있는 총구 앞에 우연히 서 있었을 뿐이다. 부조리하지만, 그게 자연이 굴러가는 방식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당황스러운 공격성을 드러내는 존재.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자연에 둘러쌓인 채 살고, 자연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는 당황스러울만큼 표정이 없다.


3

영화를 보고 나오니 뒷맛이 쓰다.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이 험한 꼴을 당했으므로. 원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글램핑장 건설 철회가 아닌 다른 모든 타협은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이 그곳에서 일한다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것이란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사슴은 어디로 갈까?"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마을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영화는 계속해서 타카하시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가 어떤 생각을 품고 살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결정들을 내렸는지 긴 대화들로 보여준다. 설득력이 어찌나 좋은지, 나는 마치 내 마음에 감시 카메라를 달아뒀나 싶었다. 내가 겪는 고민들이 그대로 여기 담겨 있지 않나. 부당한 명령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먹고 살아야 하므로), 타협안이라는 것을 들고 내려가면서도 마음에 없어서 끊임없이 자조하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당신의 곁에 서겠다고 가벼이 말하다가 미운털만 박히는. 타쿠미와 같은 사람들이 타카하시 같은 촐랑대고 염세적인 사람을 과연 어떻게 바라봤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4

어느 순간부터 나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꽤 괴롭다. 내가 속한 공간의 부조리에 대해서 말할 때, 내가 그 부조리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외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처한 모순을 고백하는 일이, 종종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 된다. 똑똑한 사람들은 동료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침묵을 택한다. 나라고 고결한 게 아니므로, 나 역시 악인이므로 침묵이 이득이다. 먹고 살려면, 튀지 않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을 안 하기 힘들고, 그게 자기 파괴적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방법이 없다. (세상 만사 다 고결하게 사는 사람도 어딘가는 있으니, 우리 다 조금씩 악하다는 말이 꼭 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유즈미는 죽지 않았다. 차이가 있을까? 운이 가장 크게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마유즈미는 훨씬 더 빠르게 주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정당한 의견이 묵살되고 나서,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간 쌓아둔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로, 동시에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맡은 일을 한다. 여전히 바보같고, 모르는 게 많아서 질책도 듣지만 그 대신 비극에 휘말리지는 않는다. 내던질 각오로 말하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건가. 어제 원고 교정본에서 동료들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은 말이나 너라고 뭐 다르냐는 말을 들을 것 같은 부분들을 한가득 빼냈는데, 그래서야 죽는 꼴밖에 더 안나는 거 아닐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덕에 원고가 이렇게 완성이 되나...


5

어쩌다 영화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늘어놨는데, 나중에 영화는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책 이야기를 하기 위한 연재니까 책으로 돌아가자면, 이번 주는 서점에 거의 가지 못했다. 책 읽을 시간이 없을 거 같아 어물전 물고기 상태 보러 온 고양이마냥 눈대중으로 표지만 훑었는데 하나 맘에 드는 게 보여서 집어왔다.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피에르 소베르트, 오 게강의 <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원더박스)다.

책을 집어든 이유는 간명하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라는 키워드만큼 신자유주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개념들이 없다는 직관적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제에 오래 천착한 장석준 선생의 해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직 해제까진 가지도 못했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서로의 존재가 절멸되기 전까지는 편안할 수 없는 사람들로 갈가리 나뉘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데, 어쩌면 이 '분리'가 통치 체제를 지탱하는 기술이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전'은 그 점에서 꽤 흥미로운 키워드인데, 끊임없이 공동체 일부의 누군가를 대상으로 편을 가르고 공격하며 절멸을 요구하는 - 사실상 불가능한 - 정치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좌파도 이 전략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만, 우파도 이 전략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을 인종, 성별, 새로운 '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전치시키는 과정이 '내전'인 걸까? 그런데 그러면 내전 개념이 너무 펑퍼짐해지는 건 아닐까? 여러 모로 읽어보고 싶어졌다.


6

코로나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좌우를 막론하고 포스트-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망을 내세우는 '정세 판단'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나 역시 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한 건 마찬가지므로 (내일 죽는다고 해도 내일 날이 맑을지는 고민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정세를 뭐라고 판단하는지 궁금하면 집어들게 된다. 얼마 전(은 아니고 꽤 됐구나)에 본 책 중에선 파울로 제르바우도의 <거대한 반격>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그는 지금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는 순간이고 이 이후의 세계를 어디로 이끌어나갈지 결정하는 건 우리에게 달렸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신자유주의 '이후'를 이야기하는 게 좀 섣부른 게 아니냐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게 생각보다 끈질기게 살아남고, 체제가 붕괴될 것 같을 때엔 적극적인 물리적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상태를 유지하려고 시도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시대는 저물지 않았다. 이 폭력적인 체제의 다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전략적 특성을 꿰뚫어야 한다." 낡은 것은 갔는데, 새 것은 오지 않은 시대라고 인지하는 건 둘 다 같지만, 지금이 '이후'인지 '과정'인지는 다르게 보는 거다.

신자유주의라는 게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거부한다' 정도의 해맑은 개소리면 다행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 이데올로기는 기본적으로 '대중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고, 이 '전제적' 민주주의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지키려면 엘리트들의 '법치'를 통치의 원리로 삼아야 하고, 이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면 군대나 경찰을 동원해서라도 국민 일부에 대한 내전을 벌여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꽤 과격한 정치 기획이다. 그리고 한 번의 내전이 아니라, 애초에 정당성이 시험받는 순간마다 가장 자주 이용하는 수단이 내전이라는 게 핵심이다. 

파시즘의 광풍이 몰고 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 경제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국가가 국민의 경제적 삶을 책임지는 것,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경제 영역에 민주주의적 원칙을 기입하는 것이 목표였다. 수십 년 간 진전된 거대한 결합의 흐름을 끊기 위해선, 과격한 수단이 필요했다. 1970년대 아옌데 정부에 대한 군사 쿠데타는 이 과격한 수단을 실질적으로 '실험'해보는 최초의 무대였다. 성공적으로 끝난 쿠데타는 '내전'의 효과를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스러운 붕괴 같은 건 없다. 신자유주의가 코로나 이후 방기된 사람들의 문제 제기로 무너질 것이란 순진한 믿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꽤나 강고하고, 패배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 신자유주의의 기획을 끝내려면 새로운 정치적 운동이 필요하다는 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일텐데 약간의 비관을 섞어 말하자면, 그렇게 생명력 강한 신자유주의 기획을 끝장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운동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이 체제의 적응력과 생존력을 과하게 평가하고 있는 건 아닐까?


7

재미있는 구절들이 많다. 가령 신자유주의의 투사인 하이예크가 피노체트의 독재 정권을 지지하면서 꺼낸 이런 말들. "주지하다시피 독재자가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의 완전한 부재 속에서 통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자유주의를 결여한 민주 정부보다 자유주의적 독재를 선호합니다."(33) 아마도 지금의 '신자유주의자'들도 표현만 조금 세련될 뿐 근본적인 태도는 비슷할 것이다. 이른바 '성전'에 임하는 자들의 마음.

오늘날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로부터 구원해내려는 가망없는 시도를 반복하는 것도, 신자유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태도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그럭저럭 이해가 된다. "그들은 항상 근본적으로 대중을 혐오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무제한적' 혹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구별하며, 전자를 수단으로 후자를 무력화하는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다."(63) 마치 사찰을 한 것 같은 문장들이 널려 있다. 그 작업이 꽤 효과적이고 이를 다시 되돌리려면 몇 배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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