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 마리, 기억-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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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패망하리라. (그러고 있다) 여전히 원고와 씨름중이다. 다행인 건 덧붙일 말들이 있다는 거고 불행인 건 거의 다 뜯어고치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거다. 매일 울고 있다. 새로이 써넣을 내용들을 고민하다 책을 읽었다. 아마도 이 내용 중 일부는 책 어딘가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메모들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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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을 접하는 주요 루트는 세 가지다. 하나는 직접 발품을 팔아 서점을 둘러보는 방법이다. 직접 책을 펼쳐볼 수 있으니 가장 확실하게 이 책이 살만한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집이나 회사 근처에 서점이 있는 축복받은 환경이 아니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게다가 서점에 모든 책이 들어오는 건 아니니 크로스 체크가 필요하다. 두번째 루트는 주간지와 신문이다. 한 주간 출간된 책 가운데 기자들이 엄선한 양서들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어서 좋지만, 내가 관심이 있는 주제는 분량이 적어 매번 아쉽다. 마지막 루트는 트위터다. 왜 하필 트위터냐면... 애초에 트위터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SNS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간 루트가 셋 정도 있으면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날 확률이 급격히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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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도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좋은 책을 만났다. 오카 마리의 『기억-서사』다. 교유서가의 '어제의 책' 시리즈로 새롭게 출간되었는데, 원래 20년 전인 2004년 소명출판에서 출간된 책을 복간한 것이다. 어제의 책 시리즈가 좋은 책이지만 아쉽게 절판된 책들을 다시금 복원하려는 취지로 시작된 것인데, 그 덕에 20년의 시차를 두고 다시 만나게 된 것이려나. (원서가 출간된 시기가 2000년이니 그것까지 감안하면 24년이군)
이 책은 '탈 자아타르'로 시작한다. '시간의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난 언덕'이라는 뜻인 탈 자아타르는 레바논 베이루트 교외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다. 이곳엔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머물고 있었다. 1975년 레바논의 우파 기독교도들의 민병대가 이곳을 포위했다. 머리 위로 포탄을 쏟아붓고 물을 긷는 여인들을 저격했다. 오카 마리는 이 사건의 존재를 1991년 팔레스타인 여성 작가 리아나 바드르의 소설 『거울의 눈』을 읽고서야 알았다.
나는 바드르의 작품을 통해 탈 자아타르 '사건'에 대해 생생하게 알게 되었지만 내가 그 '사건'의 기억을 더듬기까지, 말하자면 그 '사건'을 나누어 갖고자 하는 일의 단서를 포착하는 데 이르기까지 그 '사건'이 발생한 뒤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그 시간의 길이, 지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18)
인칭과 시선이 오가는 바드르의 작품은 리얼리즘 소설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오카 마리는 말한다. 우리는 바드르의 작품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고. 하나는 기억은 말해져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바깥의 사람들이 사건 안의 일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여기서 해결이 어려운 질문이 하나 도출된다. 어떻게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가? 기억을 나누려면 누군가에게 그 사건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언제나 이야기는 불완전하다. 때로는 불완전한 이야기가 그 기억 자체를 대체할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나눔은 어떻게든 달성해야 할 목표가 된다. 이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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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사건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 언제나 사건의 외부에서 관찰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마치 사건의 전모를 다 파악하고 있는양 군다. 사건을 공유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달한다는 말은 자기 변명일 때가 많다. 하지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피해자의 고통을 전파하는 일이 언제나 정당할까. 특히나 영상처럼 '사실'과 혼동할 여지가 있는 이미지들을 만들 때엔 훨씬 더 신중해야 하는데, 정말 우리는 신중했을까. 아니 나는 신중했을까. 방송국 PD의 일이란 이미지들이 더욱 그럴듯해 보이도록 다양한 기술들을 활용하는 것일텐데, 그런 매끄러움이란 종종 역겹지 않은가? 타인의 고통이 여기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이 고통은 오직 재현된 것에 불과하며 언제나 외부자의 시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잉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TV 프로그램에서 전달할 수 있을까? 영화처럼 은유적일 수도 없는 TV 매체에서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게 근본적으로 가능한가?
우리는 계속해서 그녀들에게 그 육신을 더욱더 깊이 파헤쳐 당사자밖에 알 수 없는 고통을 증언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얼만큼 그 육신을 찢어발기고, 얼만큼 그 육신을 파헤치고, 얼만큼의 고통으로 육신을 헤집고 증언해야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것일까.(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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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서로 제각각의 위치에서 사건을 경험한다. 누군가는 당사자로, 누군가는 지인으로, 누군가는 뉴스로, 누군가는 취재 인력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이 한데 모여 사건의 전모를 형성한다. 각자의 시선에는 고유한 맹점들이 있다. 사건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사건 그 자체가 있고, 사건을 관통하고 있는 사람이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는 일상이 바깥에 있다. 이 맹점은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다. 사건은 좋든 싫든 사람들을 영원히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영원히 사건의 관찰자로 또는 사건의 경험자로서 살아간다. 모든 것을 파악한 것과 같은 서술은 언제나 거짓을 포함할 수밖에 없으나, 우리는 좋든 싫든 관찰자로서 일정한 형태의 서사를 완성하여 전달해야 한다. 우리는 신이 아님에도 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설명하고 싶어하는 욕망에 시달린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게 모든 것을 말해줘“라는 욕망을 내비친다. 나는 이것이 나(또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사를 공유한다고 할 때 그 목적은 무엇인가. 어쩌면 사건을 반복적으로 곱씹으면서,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위치를 계속해서 인지하고 안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겐 평화가 허락된다는 믿음 아래에서 ‘서사’를 공유한다는 어떤 정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가. 그들의 고통을 리얼하게 재현해 달라고 요구하고, 눈물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끔찍한 사건을 증언해 달라고 말하면서 그 말의 ‘리얼함’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영원히 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끔찍한 폭력의 결과로부터 나는 자유롭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그 리얼한 재현을 원하고 그 리얼함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정의감이나 분노감을 영화관이나 TV앞에서 끝내버리고 싶은 건 아닌가. 마치 주중 내내 죄를 짓고 주일에 회개하면 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사건은 우리의 ‘속죄’를 위해 리얼하게 재현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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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의 일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그로테스크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우리는 사건 외부에 있으므로, 그러한 서사에 목마르다. 지옥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 보여준 ‘인간애’ 같은 것에 집중하고 눈물 흘리고, 그들의 인간됨을 슬픈 음악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팔아먹는 일이 대체 무슨 의미로 공유될 필요가 있는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