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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09. 2024

글쓰기 싫어증

나태지옥

1

책 쓴다고 기력을 소진했나, 거의 몇 주간 시간이 꽤 있었는데도 한 줄의 글도 쓰지 않고 한 장의 책도 넘기지 않았다. 거의 3주쯤 되어가는데, 이제는 그나마 기력을 회복해서 주말에 서점에 나가 책이라도 몇 권 넘겨보고 사오긴 했지만, 정작 집에 오면 그대로 드러누워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 


2

사온 책들이라도 읊어보자. 더 나태가 길어지기 전에.


주톈원, 우녠전, 홍지영 옮김, <비정성시 각본집>, 글항아리 : 비정성시를 보지 못했다. 이름은 무수히 많이 들어보았으나 정작 볼 기회가 없었다. 각본집이 나왔다는 말에 손부터 먼저 뻗었다. 판권 문제로 재개봉도 쉽지 않고 블루레이 발매도 꼬여 있다고 한다. 언젠가 이 문장들을 화면으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경철, <아무튼, 헌책>, 제철소 : 나는 호더다. 무엇이든 일단 집에 쌓아두고 본다. 특히 책에 대해서는 더 그런데, 나중에 절판되면 구하기 어려워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구한다고 개고생도 많이 했다) 무리하게 쌓아둔 책 감옥에 오래 수감되어 있었다. 수집가는 끊임없이 헤매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고, 익숙해졌기 때문에 목표 없이도 그냥 길을 나온다. 그날도 헤매러 나왔다가, 목적없이 걷던 곳에서 발견한 책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이 책을 발견해 집어들고 왔다. 인생은 언제나 우연의 연속. 


이윤영, 이상길, <우리를 읽은 책들>, 이음 : 이상길 선생의 책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집어들게 된다. 이번에는 서평집이다. "우리를 키운 책들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이다. '배운' 망덕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이 책의 필자들은 자기들을 키운 책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그간 읽어온 책들 가운데 세계를 보는 법을 바꾼 책들에 대한 서평을 모아둔 책이다. 이 책 중 태반이 나를 키운 책이기도 했다.


패멀라 폴, 이다혜 옮김,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 생각의 힘 : 사은품으로 받은 키링이 귀여웠다. '유실물'이라는 표현이 흥미로웠다.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나.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첫 피씨방의 기억, 첫 메신저의 기억, 첫 컴퓨터의 기억, 첫 인터넷 연결되던 날의 기억. ADSL을 설치한 첫 날 받은 파일이 마이크로소프트 홈페이지에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체험판을 받았다는 건 왜 아직도 기억이 선한가. 그 불편했던 시대를, 나는 왜 아직도 뭔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이 자꾸 되짚어보고 마는가.


김가람, 조민조, 김진호, 구민정, 손승우, 이도경, 강민아, 노광준, <카메라로 지구를 구하는 방법>, 느린서재 : 이제는 대표 환경 다큐멘터리 PD가 되신 가람PD의 글이 있다고 해서 샀다.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건 뿌듯하다. '어떻게 전할까'라는 부분에 천착했다는 사실에 기대가 크다. 방송쟁이인 우리에게 중요한 건 어떤 것이냐보다, 어떻게 전할 것이냐일 것이므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김호영 옮김, <다르덴 형제>, 마음산책 : <내일을 위한 시간>이라는 영화를 보고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켄 로치와는 미묘하게 다르게 '연대'를 그려내는 방식,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힘을 여전히 믿고 있는 듯한 감독들의 태도. '인간을 존중하는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에 다시금 집어들었다. 무엇이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인가. 위악도 위선도 아닌 방법이라는 것은 있는가.


박상현, <친애하는 슐츠씨>, 어크로스 : 예전에 생각을 빼앗긴 세계 북토크에서 수줍게 싸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꾸준히 좋은 글을 쓰신다는 생각에 오래 팔로우했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책이 나왔다. 관성적인 차별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누군가 그것이 차별임을 지적하는 순간부터 더는 자연스럽지 않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덕에 우리는 이만큼 나아졌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차례인지도 모르지.


3

이 중에 뭔가 길게 써야 할 것 같은 유혹에 시달리는 책들이 있고, 조금 짧게 줄이고 싶은 책들도 있다.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최근 며칠 집어든 책은 서가에서 꺼내지 않았다. 일단 밀린 책들부터 다시 좀 더 읽고 글다운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다시 의지가 살아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의지가 살아나야 쓰는 게 아니라 쓰다보면 의지가 살아나고 그런 거 아닌가... 일단은 손가락이 뛰놀 수 있게 뭐라도 쓰긴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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