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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10. 2023

경합주의적 민주주의는 경합의 대상인가?

23.01.10. 샹탈 무페,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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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롱하다. 잠을 거의 못 잤다. 1시에 깨서 책을 덮으니 6시였다. 처음엔 잠이나 왔으면 해서 조무원의 책을 펼쳤다가, 읽다보니 경합주의적 민주주의자 중 한 사람인 무페의 책이 생각나 펼쳤고, 그의 예전 책들을 사둔 것이 기억나 하나씩 꺼내어 넘겨보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온다 싶어 침대에 도로 누웠다. 그리고 울면서 일어나는 데 채 두 시간이 안 걸렸다. 그래도 월급쟁이는 일을 해야지. 다행히 아슬아슬 지각은 안 했다.


요샌 책을 한 번에 몰아 볼 시간이 없어서 새벽에 책을 펼치면 어떻게든 끝을 보려고 한다. 중간에 끊어서 보면 다음날 이어볼 때 앞 내용이 기억이 안 나기도 하고, 며칠 끊어서 봐야 하는 책은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가 편치 않다. (나이는 이렇게 물리적인 측면에서 독서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얇은 책들을 찾아다니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최근 읽은 책 몇 권 다 300쪽 이하다. 오늘 아침에 마저 다 읽은 샹탈 무페의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도 판형도 작은데 번역 후기까지 더해 122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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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간결하다. 그간 샹탈 무페의 책을 읽어 온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론적 기반 위에서 팬데믹과 기후 위기라는 새로운 국면에 대응하기 위해 환경운동과 반신자유주의 운동을 결합하기를 요청하는 짧은 팜플렛이다. 게다가 몇몇 부분은 전작인 <좌파 포퓰리즘을 향하여>에서 떼어다 붙여넣었다. 오히려 이전 책이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도 있다. 정세에 개입한다는 목적에는 부합하지만, 한 권의 책으로서 무게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무페는 1980년대 '계급'이라는 가장 최종 심급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 심지어 정치적 입장까지도 - 주장과 사회주의는 과학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적 주장에 반기를 들고, 모든 것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최종 심급같은 건 없으며, 예정된 역사적 결론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했던 학자다. 그 대신 다양한 목소리를 한데 묶어서 저항할 수 있는 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표를 활용하려 했다. 


무페의 사상을 두 개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하나는 확장적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공동 의지의 구성이고, 다른 하나는 국면에 개입하는 창의적인 접합일 것이다. 정치는 어쨌든 집단의 문제고, 집단의 형성은 반드시 집단으로부터 배제되는 존재를 형성한다. 배제된 이들은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수 있기에, 정치는 적대를 없앨 수 없다.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이 합의할 수 있는 건 없으며, 승패는 언제나 갈린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모을 것이고, 무엇이 사람들을 강력하게 접착시키느냐는 것인데, 이것을 무페는 '정동'이라고 부른다. 정동을 통해 사람들은 집단에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이 집단의 접합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기 때문에, 우발적이다. 무페는 정치를 윤리로부터 구별해 내어 승패를 결정짓기 위해 결합하는 적대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제도로서의 정치는 이 적대의 장 안에 있다.


포퓰리즘에 대해 적대감이 적은 것도 이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의견에 동조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정치적인 것의 근원, '적대'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람들을 한데 묶는 정동의 힘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말한다.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접합 가능하다면, 좌익 포퓰리즘이 불가능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정동을 억제하고 이성보다 하등하다고 여기는 합리주의적 좌파의 태도로 인해 이것이 제한되어 왔을 뿐이다.


어떻게 조직하고, 동원할 것인지 고민하며 정동의 힘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우익 포퓰리즘과 좌파 합리주의자들의 함정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 <좌파 포퓰리즘에 대하여>에서 무페가 당시를 포퓰리즘적 계기라 본 것도, 이 틈새가 금융위기와 그로 인한 정부 대응의 실패로 인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에 등장했고 인기를 얻었던 다양한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대부분 권력 획득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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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기후위기와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찾아왔다. 팬데믹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여파로 그 기능이 축소된 국가가 전염병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생명의 위협 때문에 그 헤게모니를 뒤흔들 가능성이 발생한 사건이다. 좌파는 이 사태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몰락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하지만, 무페는 오히려 이 사건이 안보에 대한 정동을 불러일으키고 좌파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기술에 의한 관리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QR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기후위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충분히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충동하지만, 동시에 위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망에 제대로 좌파가 대답할 수 없다면 결론은 민주주의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안전한 곳에서 '오염'되지 않은 채로 살아가겠다는 욕망을 건드리는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균열은 보이지만, 마냥 희망적이진 않다. 그가 '정동' 개념을 공들여 설명하고, 이것을 통해 대중의 열망을 조직해 내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이유다.


세계가 기로에 서 있다. 그는 선거에서 이기길 바란다. 사회운동도 중요하지만 결국 선거에서 승리하고 공식적인 국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궁금증이 인다. 애초에 선거 제도 자체가 좌파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경우에 대해선 생각하는 바가 있나? 그의 민주주의론에는 경합주의적 민주주의가 이론상 옳다는 논증은 있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들로 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적절한 설명이 없다. 게다가 제도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미승인 이민자들 같은 존재들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의 적인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의 주장을 오래도록 읽어오고 있지만 달라지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팜플렛에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가 어째서 현존하는 제도들이 경합주의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적절한 것인지 묻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제도' 이외에 무엇이 그에게 남아있는가? 그가 요청하는 연합은 상대하는 세력의 그것에 비해 얼마나 강고한가? 김은숙 작가가 집필한 더 글로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피해자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연대, 어느 쪽이 더 견고할까 연진아?"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은 박연진뿐만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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