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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09. 2023

꽤 많이 지쳐버린 우리

23.01.09. 조무원, 우리를 바꾸는 우리(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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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일찍 잠들었는데, 재난 문자에 잠이 깼다. 지진 알림이라니. 필로티 구조의 집에 살고 있으면 가장 걱정되는 게 지진인데, 멀지 않은 곳에서 진도 4.0 이상의 지진이라니 걱정이 되어 잠이 안 왔다. 다행히 진동은 못 느꼈는데, 잠이 쉬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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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짬을 내어 조무원의 <우리를 바꾸는 우리>를 마저 읽었다. 얇은 책인데, 밀도가 높아서 진도가 잘 안 나갔다. 문장들이 깊이가 있다. 쓰기 위해 고단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설명을 하기 위해 든 비유들도 그렇고,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참조한 문헌과 작품들이 그렇다. '정치철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작품들을 예시로 들 거라 생각을 못했는데, 참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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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짜> 후반부에 가면, 고니가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려는 함정인 줄 알면서도 굳이 아귀의 도박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그리고 그가 선실에 마련된 도박장으로 들어가면,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장면이 천천히 재생되며 부제가 화면 위에 등장한다. "문은 항상 등 뒤에서 닫힌다." 고니는 이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물론 고광필은 손목이 잘린 채 다른 선실에 감금된 상태고, 자신이 사랑하는 화란도 위험에 처해 있으니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귀는 고니가 도박장으로 들어왔을 때, 바로 처리하지 않고 함께 도박을 했을까? 자기가 짜놓은 판에 걸려 들어왔으면 굳이 살려둘 이유도 없는데. 악인들의 '답답함'은 꼭 타짜만 그런 게 아니다. 대부분의 느와르 영화에서 악인들은 '약속'을 한다. 가령 주인공이 혼자 아지트로 오면 가족의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들은 밀실로 초대한다. 바깥의 세상이 개입할 수 없는 공간으로. 그 곳에 들어오면 약속은 사실 지킬 필요가 없는데도, 그들은 약속을 한다. 그리고 그 약속으로 인해 파멸한다.


약속이 가진 힘은 느와르 영화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악인들은 지킬 마음이 없는 약속을 굳이 하고, 주인공은 그 약속을 믿고 권위자의 밀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약속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는 상황에 처하며 악인은 몰락한다. 이것은 약속의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하나는 약속할 때 당사자들은 서로 권력 관계가 동일하지 않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서로가 동등한 상태에서 맺었다는 전제에서 무자비하게 당사자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한다는 점.


거기에 약속은 언제나 깨질 위험이 있고, 동시에 약속이 지켜질 때 가져올 거대한 변화가 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약속을 함으로써 당신과 내가 동등한 사람이라 주장하지만 정작 그것을 지켜야 할 때는 권력의 차이를 통해 회피한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약속에 필요한 동의가 강제와 얼마나 다른지 체감하지 못하지만, 약속을 제대로 수행하라는 명분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약속은 교착상태이자 동시에 해방의 기회다. 이것을 조무원은 '아슬아슬'한 상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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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회계약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약속을 통한 정치의 성립을 딱딱한 문헌들로 설명하기보다는 다양한 문학 작품과 영화들을 통해 설명한다. 특히 홉스에 많이 기대어 설명하는데, 이 홉스가 우리가 익히 알던 홉스는 아니다. 그는 홉스의 작품들 사이에 놓인 긴장관계를 가지고 약속의 아슬아슬한 측면을 설명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불안하고 위험한 상태에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 경외감이 느껴지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만한 인공적인 신으로서 국가를 형성하는 데 동의한다. 


<시민론>에서의 홉스는 동의와 강제를 구분한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에서의 홉스는 동의와 강제 모두 권력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약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맺은 약속이므로, 내가 존속해야 할 권리가 있다. 이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약속의 당사자들은 위정자를 향해 약속을 지키라는 요청을 할 수 있다. 내전은 약속이라는 형태 안에 언제나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의라는 것은 계약의 당사자들이 있어야 한다. 누가 동의했는가? 이것은 경계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가 경계짓기를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은 그래서 적절하다. 헌법의 저자는 누구인가? 기원은 닫혀 있는가, 아니면 열려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오래된 기원을 찾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금 동의하지 않는 헌법을 지켜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약속은 매번 새로 쓰인다. 이소라의 가사마냥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그 경계선상에 있는 존재들이 '우리' 안에 포함되기 위해 어떤 투쟁을 해 왔는지 그는 설명한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넓히는 것 또한 '우리'임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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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은 정치적 행위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적 약속의 실현을 바라는 행위다. 무엇이 기원인지 논쟁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 약속이 실현되기를 바라는지 논쟁하는 것과 같다. 이 공동체는 무엇이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기원은 필연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된다. 여기엔 역사적 사실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기원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삼는' 행위이므로, 무엇이든 기원이 될 수 있다. 즉 어떤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그리고 국민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래에 언젠가 호명될 누군가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국민이라는 호명 아래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라면 지금의 기원 논쟁에 시큰둥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돌이켜 보는 행위는 결국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찾는 행위이기도 하다. 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에 동의하고 있는가? 그것을 바꿀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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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원은 소위 '경합주의적' 민주주의자들 (샹탈 무페와 같은)과는 거리가 있다. 민주주의의 본성상 적대가 내포되어 있고,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본질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공통의 규범을 '약속'을 통해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샹탈 무페와 같은 경합적 민주주의자들은 사라질 수 없는 적대를 제도 안으로 끌고 들어와 내전까지 이어지지는 않는 끊임없는 경합을 민주주의의 본질로 본다. 그것은 공통의 규범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한다. 


물론 약속에 의한 정치 역시 약속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이라고 주장한다. 읽기에 일천한 나로서는 이 둘의 구분선이 아주 모호하다. 특히나 경합주의적 민주주의자들 역시 '전선'의 효율적인 형성을 위해서 '우리'의 범주를 확대하려 시도한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라클라우와 무페가 '계급'이라는 닫힌 범주 대신 여러 사회운동들의 등가적 연쇄(동등한 결합)를 가능케 할 텅 빈 기표로서 '반자본주의'를 내세운 게 1980년대 후반이다. 다만 이 '전선'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내부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잠정적으로나마 공통의 규범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게 아닌가?


랑시에르는 목소리와 소음을 구별하며 소음에 지나지 않던 몫 없는 자들의 외침을 몫을 가진 자들이 강제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도록 하여 '목소리'로서 경청하게 만드는 상황들에 대해 설명한다. 목소리를 가진 자들은 동등한 약속의 주체다. 파업과 점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노동자들의 요구를 진지하게 경청하도록 만드는 강제력인 셈인데, 이 싸움의 궁극적인 결론이 '동등하게' '말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주체'라는 점은 이들 저자에게 민주주의가 일종의 규범으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내전의 가능성은 언제나 내포하지만, 그것의 실현을 억제하는 경합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를 도덕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지 않나? 경합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인 한에서 언제나 규범적이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나?) 그들과 약속에 의한 정치 사이에 남은 것은 '자본'에 대한 태도뿐이지 않나? 그마저도 사실상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비슷한 생각들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종종 이것이 일종의 체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약한 가능성 찾기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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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시민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 이것은 정치체를 구성하고 있는 인민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고, 그것을 단순히 오래된 문헌들 속에서 발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동시대의 작품들 속에서 찾아낸다. 정치 철학의 고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자신의 작은 가능성들을 깨닫게 하는데 분명한 도움을 줄 수 있다. 미래 없이 반복되는 내전과, 내전에 지친 이들의 자포자기가 불러오는 절대군주의 위험 사이에서 민주주의의 남은 길이 무엇인지 탐색해야 할 시급한 상황에서, 이 책을 읽어보는 일은 꽤 수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린이, 여성, 외국인과 같이 '우리'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이들을 '우리'의 안으로 끌고 들어오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약속은 어떤 형태일까?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정치체는 어떤 모습일까? 스스로 소멸의 길에 접어든 듯한 이 공동체가 헌법 조문처럼 '영원히' 존속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빨리 새로운 약속들을 도입해야 할까? 다들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영원하기를 바라지 않고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기를 바라기 전이어야 할텐데. 물론 그 와중에도 몇몇의 사람들은 끝내 새로워지기를 바랄 것이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지친다면 '영원'은 빛바랜 문자들로만 남아버릴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이, 나에게 조금은 더 버틸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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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약속을 지킬 마음조차 없는 인간들이 이제 사회의 '허리'가 되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나는 앞으로의 10년이 무섭고 두렵다. 새로운 약속을 써야 하는 시기는 희망이 될 수도 있지만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새로 쓰기가 언제나 가능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판도라의 항아리 가장 밑바닥에 남아 있는 '앨피스Elpis'다. 때로는 새로 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희망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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