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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an 07. 2023

'변화'의 미학

220106

  쉬는 날 아침 7시40분에 눈을 떴고,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피곤해서 일찍 잔 것이 효과를 발휘했구나, 낮과 밤을 꽉꽉 채워 보내야지. 다짐이 무너진 것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2월이 집 계약 마감인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나는 왜 이럴까.



  어제 오피스텔 경비 아저씨와 인사를 나눌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이고 총각(감사합니다 당연히 결혼했을 거라 짐작하지 않아 주셔서)도. 이사 준비는 잘 돼요?" "엥, 무슨 이사요?" "어, 이 건물 사는 분들 다 2월에 나가지 않나?" "아, 저는 24년까지예요." "엇, 이상하네. 그럼 총각이랑은 오래 보겠구만(웃음)." 감탄사로 주거니받거니 이어간 대화를 그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께 "오늘 경비 아저씨가 이상한 얘길 하시더라"며 웃고 말았다. 그게 오늘 아침에야 이상해 계약서를 꺼내봤다. 23년 2월. 이게 왜 이렇지, 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나는 왜 이럴까.

  고민해 봤자 의미없는 일이고, 일단 카페에 와서 백팩을 열었다. 책을 꺼내려다 불현듯 민관에게 전화를 했다. 형, 이러저러했어. 민관은 야, 너, 이런,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외마디 말을 몇마디 하다 크크 웃었고 나는 우하하 웃었다. 엄마도 딱히 놀라지 않은 듯했다. "아이고, 너 참." 어차피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서 일단 웃은 것이겠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자는 이런 류의 실수를 자주 저지른다는 역사 지식과 그럼에도 큰 타격받지 않고 살아갈 사람이라는 믿음이 거기에 있었다. 내 마음의 고무줄 같은 탄성과, 오랜 기간 함께 늘고 줄었던 주변의 너끈한 적응이 함께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꽤 기꺼워 더 많이 웃었다.

  가방 안에 책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다 읽었고, 나머지 한 권을 손에 쥐었다. 김영민 교수의 신간이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긴. 어찌 못한 채 더불어 사는 것이다.




  늘 그렇듯 밑줄 긋고픈 문장이 가득했지만, 유독 마음에 박힌 글만 슬며시 꼽아둔다. 영화 <퍼스트 카우>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대성당>에 대한 독해는 일반과 조금 결이 다르나 고개를 끄덕였고, 정치와 의도의 관계를 곱씹은 글을 읽으면서는 현상을 보도하는 이로서 조금 반성했다. 디저트에 관한 소고는 통찰력과 유머를 함께 갖춰 낄낄 웃었다. "맛있고 아름다운 디저트가 똥이 되었으니 허망하다고? 그럴 리가. 당신은 달콤한 대상이 똥으로 변하는 그 멋진 과정을 한껏 즐긴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며, 변으로도 변한다. 말하자면 '변화便化'다. 이런 변이 있나. 허무라는 말의 자리에 변화라는 조어를 놔둬도 좋겠다 싶다. 탄식하며 싱긋- 썩소와 미소 사이, 변화의 미학이 이 책에는 있다. 허무를 말하면서도 유머러스 인간이란 얼마나 단단한 존재인가.


피터 허턴 영화를 연상시키는 ‘퍼스트 카우’의 도입부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 구호나 표어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고통스럽지만 때로 아름답기도 한 광경을 천천히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아 달라는 요청이다.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말을 하려는 시도는 답이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구체적인 인물과 상황을 경유하지 않고 메마르고 일반적인 정치 비평을 반복해대는 것 역시 그만큼 답이 없다.
... 주인공 쿠키는 날품팔이였지만, 날품팔이에 불과했던 사람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향기로운 케이크를 굽고자 했던 사람이며, 그러기 위해 밤에 소젖을 짜고 싶었던 사람이며, 그것도 가능한 한 다정하게 짜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날품팔이 행인 A의 죽음이 아니다. 언젠가 베이커리를 열겠다는 달콤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구체적인 사람의 죽음이다. 이 생생한 사실을 지긋이 음미하지 않으면, 아무리 영화를 보아도 마음은 밀가루처럼 흩날리기만 할 뿐 빵처럼 부풀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내어 피터 허턴이나 켈리 라이카트의 잔잔한 영화를 보는 일은 현란한 이미지의 야단법석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다. 끝없이 독촉해대는 생활의 속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구체성을 무시한 난폭한 일반화에 저항하는 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란한 연말의 시간을 통과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은 신산한 삶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레시피이기도 하다. - 「느린 것이 삶의 레시피다」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1938~1988)는 소설 ‘대성당’에서 말한다. 대성당을 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맹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대성당을 그리지 못한다고. ‘대성당’에서 맹인은 자신을 환대하지 않던 눈뜬 이에게 묻는다. “뭔가 믿는 게 있나요?” 눈뜬 이는 대답한다. “딱히 믿는 것은 없어요. 사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그래서 가끔 힘드네요. 제 말 아시겠어요?” 그러고는 대성당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한다. 맹인은 눈뜨고 있는 사람의 손을 쥐고 함께 종이에 성당을 그려나간다. 눈을 뜨면 삶의 수단이 보일지 몰라도 삶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보기 위해서는 묵상해야 하고, 묵상할 때는 눈을 감는다. 대성당을 그린 사람들은 험한 시간을 통과해 간 이들이었다. 생텍쥐페리와 스가 아쓰코와 레이먼드 카버는 일찍 가족을 잃거나, 가난에 시달리거나, 알코올 중독에서 허우적대거나, 비참한 전쟁을 겪거나, 시대의 광기를 목도한 사람이었다. 모두 ‘더러운 리얼리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더러운 리얼리즘의 대가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 ‘깃털’에서 이웃이 안고 있는 아기가 정말 못생겼다고 불평하는 부부를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돌아와 섹스에 열중하는 부부를 묘사한다. 그러나 결국 카버는 대성당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생텍쥐페리와 스가 아쓰코와 레이먼드 카버는 더러운 현실을 보았기 ‘때문에’ 대성당을 가슴에 품는다. 혹은 더러운 현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성당을 가슴에 품는다. - 「대성당을 가슴에 품다」


이 사회의 사과문은 대개 이렇게 시작하곤 한다. “제 의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런 결과를 빚어서 죄송합니다” 혹은 “제 의도와는 달리 만약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야 비로소 의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으니 절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 주세용~. 의도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책임으로부터 다 면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잘못된 행동을 하고 말았다면, 그것은 의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방만한 평소 습관이나 태도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습관이나 태도 때문이 아니라면, 해당 사회의 ‘언어’를 숙지하지 못해 생긴 잘못일 수도 있다. 거래처 여직원이 미소 띤 얼굴로 사소한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서 자기에게 “꼬리를 쳤다”고 망언을 해서는 안된다. 그 여직원의 친절은 그 직업에서 통용되는 언어이지 의도가 아닐 것이다. 매력적인 여자 후배가 “선배, 맛있는 거 한번 같이 먹어요.”라고 말했다고 치자. 이건 나에게 반했다는 뜻일까. 아닐걸. 공짜밥 정도는 먹어주겠어, 정도의 뜻이 아닐까. 청자뿐 아니라 화자도 용례를 잘 파악해야 한다. 표현은 개판으로 해 놓고, 상대가 화를 내면 “아니 제 의도는 그게 아니라...” 어쩌고저쩌고 해봐야 별 소용 없다. 잘못된 표현을 즉시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적인 차원에서 가시적인 것은 본인도 알 듯 말 듯 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해당 사회에 통용되는 표현이다. 의도는 불투명한 병 안에 담긴 물이요, 결과는 엎질러진 물이다.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쉬울까.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의 의도가 나빴다고 서둘러 넘겨짚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찾을 수 없는 의도를 넘겨짚거나, 갖다 붙이는 일에 유의해야 한다.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나쁜 의도를 가진 나쁜 놈은 아닐 수 있으므로. 그러니 의도를 단정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악행을 저지르려고 의도한 자보다 실제 저지른 자가 더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상대의 의도를 넘겨짚고, 오해에 근거해서 단죄하려 들겠지. - 「좋은 의도의 정치」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대상을 좋아하되 파묻히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은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 경직되지 않아야, 기꺼이 좋아하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또 그 대상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자, 그런 유연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가. 그럼 디저트의 자태를 먼저 눈으로 음미한 뒤, 한 스푼 떠서 잠시 허공에서 멈추어 본다. 그 다음, 간결한 선을 그리며 스푼을 입으로 가져간다. 자기 존재 속에 안착한 달콤한 대상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이제 디저트는 혀의 미각 돌기를 지나서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는 식도를 지나 위장으로 행진한 뒤, 대장을 거쳐 마침내 누런 똥이 될 것이다. 그 맛있고 아름다운 디저트가 똥이 되었으니 허망하다고? 그럴 리가. 당신은 달콤한 대상이 똥으로 변하는 그 멋진 과정을 한껏 즐긴 것이다. 진짜 허망한 것은, 맛있다고 소문난 디저트가 정작 맛이 없을 때이다. - 「인생의 디저트를 즐기는 법」


  그리고 김영민 교수의 산책 예찬. 행복은 '오는 것'이라는 그의 예민한 언어 감각에 무릎을 친다. 예열했으니, 산책할 시간이다.


나에게 산책은 생업이다. 얼핏 보면, 빈 시간을 죽이려고 산책 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나는 산책을 통해 일상의 필연적 피로를 씻는다. 그뿐이랴. 산책 중에 떠오르는 망상은 메모가 되고, 메모는 글이 되고, 글은 책이 된다. 그렇다고 글감을 얻기 위해 산책하는 것은 아니다. 글감은 산책 중에 그저 발생한다. 산책하면 단지 기분이 좋다.
... 산책하러 나갈 때 누가 뭘 시키는 것을 싫어한다. 산책하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줘. 곡괭이 하나만 사다 줘. 손도끼 하나만 사다 줘. 텍사스 전기톱 하나만 사다 줘. 어차피 나가는 김인데. 나는 이런 요구가 싫다. 물론 그런 물건들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목적이 부여되면 산책은 더 이상 산책이 아니라 출장이다. 애써 내 산책의 소중함에 대해 설명하기도 귀찮다. 그냥 텍사스 전기톱을 사다 준 뒤, 나만의 신성한 산책을 위해 재차 나가는 거다. 신성한 산책을 하는 중이라고 해서 걷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길가의 상점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한다. 그것은 미리 계획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발길을 옮기다가 관심이 생겨서 하는 일일 뿐이다.
... 행복하고 싶어! 많이들 이렇게 노래하지만, 나는 행복조차도 '추구'하고 싶지 않다. 추구해서 간신히 행복을 얻으면, 어쩐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가는 대신에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 억지로 가려고 하면 더 안 오는 일. ‘잠이 안 와요’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우리가 잠에게 가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억지로 잠들려고 할수록 잠이 달아나지 않던가. 행복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자네에게 가지 않을 테니, 자네가 오도록 하게. 행복이여, 자네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도록 하게, 셔터가 무심코 눌려 찍힌 멋진 사진처럼. -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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