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학준 Jan 11. 2023

이꼴을 보려고 개념을 깎았나

23.01.11. 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

과거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보면 두 가지 점에서 놀란다. 하나는 내가 대체 이 구절에 왜 밑줄을 쳤는지 알 수 없어서고, 다른 하나는 내가 왜 여기를 그냥 건너뛰었는지 몰라서다. 특히나 지우개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연필 자국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읽어놓고도 지우는 수고를 굳이 할 이유가 뭘까? 끝까지 읽고 나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해 나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

오래 전 읽었던 로제 샤르티에와 피에르 부르디외의 대담집인 <시화학자와 역사학자>를 다시 꺼냈다. 순전히 얇아서 꺼냈다. 예전에 정리해 둔 글도 있기도 해서 쉽게 다시 읽고 메모를 적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웬걸, 예전에 썼던 글은 전혀 참고할 수 없었다. 그 글을 쓸 때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놓친 부분들에 무릎을 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놀라웠던 순간은, 예전에 나는 로제 샤르티에의 역할을 그렇게 눈여겨보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을 때다. 그는 부르디외가 했던 말과 하려는 말을 조리있게 정리해서 전달하고, 또 그 사이에 자신의 입장과 만나고 갈라지는 부분들을 조목조목 짚었다. 부르디외의 지성은 샤르티에가 만들어 준 대화의 장 위에서 마음껏 춤을 춘다. 나는 전에 그 춤의 화려함에 홀렸다면, 이제는 그 장을 덤덤히 다듬고 있던 샤르티에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늠키 어려웠다.


사실 대담이라는 것이 좋은 꼴로 끝나는 경우가 드문게, 보통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상대방의 말따위는 제대로 듣지도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시끄럽게 떠들다가 시간을 다 잡아먹어서 그렇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고, 대담을 일종의 정치적 선전의 장소로 삼는다. 학자가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연구 분야에 대해 언급하게 내버려두기보다, 그래서 당신의 연구를 통해 너는 지금 우리 가운데 누구 편이냐고 묻는 질문들로 추궁한다. 이러한 형태의 대담은 보기 드물다. 희생하는 사람이 없으니. 


샤르티에가 비록 이전에 부르디외와 몇 번 대담을 한 경험이 있다지만, 이렇게 상대방의 주장을 '오독'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의 말로 다듬어내는 게 쉽진 않았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상길은 '이인무'라고 했지만 이것은 어쩌면 한 사람이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도록 다른 한 사람이 판을 제대로 깔아주는, 훌륭한 분업 시스템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분업은 그 위에서 뛰노는 사람의 이야기가 독자와 청자에게 온전히 가 닿도록 만든다. 나는 이 지점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

부러움을 뒤에 잠시 미뤄두고 말하자면, 이 책은 부르디외의 사상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다. 번역도 매끄럽지만(한 군데 정도 오타가 있었다. '가운데'와 '중'을 중복해서 쓴 문장), 두 사람 다 조리있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 환상과 인식 사이에서의 사회학자의 역할, 개인과 구조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아비투스와 장 개념과 같이 부르디외의 핵심 개념들이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다. 종종 냉소적인 목소리도 내지만 시종일관 유쾌한 대담이 이어져서 슬슬 따라가다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그는 사회학자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까지도 보게 만드는 무자비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사회학은 정교한 자기 방어의 도구로서, 진실에 직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다양한 환상을 걷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 무지는 우리가 자유라는 환상에 속박되게 만들지만, 지식은 속박의 근원을 알게 해 자유의 계기를 가져다 준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어떻게 '진실'을 아는 특권을 가질까? 


물론 그는 신의 시점에서 모든 것에 답할 수 없고, 우리는 주어진 인식의 도구들을 가지고서 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완벽하게 답해야 한다고 본다. 어쨌든 검증하고 반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탐구하고자 하며, 당연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아주아주... 분열적인 태도가 사회학자로 하여금 환상 너머를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사회공간에 대한] 인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인식의 대상 속에 갇혀 있는 사회과학이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위치를 알게 되며, 바로 그런 위치에서 부르디외 자신이 언급하듯 고통스런 '정신분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19)


그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들, 구분들, 체계들의 자명함에 의구심을 가진다. 분류 체계 자체가 분석의 대상이다. 무엇인가 실재를 지칭하는 용어들도 꽤 많은 수가 최근에 구성된 개념인 경우가 많다. 지금의 용어로 과거의 사례를 재단하다간 시대착오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용어, 단어, 개념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이라는 그의 통찰은 하비투스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힌트를 준다.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꾸준히 축적된 모종의 성향 체계는 그 이후의 경험들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준거점이 된다. 이것은 숙명처럼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보통은 체계와 경험은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이 '하비투스'는 상황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특정한 상황이 하비투스를 구성하기도 한다. 또 같은 하비투스라 하더라도 어떤 장에서 작동하느냐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장은 근본 법칙과 규칙이 존재하지만 규칙을 선언하는 협회가 없는 게임과도 같다. 모든 것은 어느 정도 잠재적이지만 또 그렇다고 무규칙적이지도 않다. 역사적인 깊이를 가지지만, 장기적으로 한 방향을 향하지만은 않는다. 이를 그의 한 마디 말로 정의하면 이것이다.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

최근에 출판된 책 가운데 <아비투스>라는 게 있다. 부제가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이다.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은 최상층에 오를 준비가 되셨습니까?" 몇몇 습관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오를 수 없다. 최상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본성', 그러니까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즐기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를 면밀히 파악해서 그것들을 자신의 본성 수준으로 이식해 내야만 당신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기가 막힌 책이다.


일단은 하비투스를 자기 계발의 목록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발상의 황당함을 잠시 내려놓자. 하비투스는 누적적이고 또한 신체적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부르디외의 개념을 속류화시켜 소화시키는 것 자체도 일종의 지적 과시로서 고상한 취향을 전시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알고 있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는게, 이것이 그의 의식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가 이런 짓을 하도록 만드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그가 알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그는 헛소리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덕에 그가 어떤 선호 체계를 체화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저 책이 전혀 고상해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부르디외는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학자는 유치한 주장들이 난입해도 자신의 세계를 지켜 내기가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60)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주체의 '광공'이 그가 공들여 깎아 놓은 개념들을 이리저리 '쓰까'먹는 모습을 보며 한 문장을 덧붙여 본다. "이 일련의 대립쌍은 사회주의 또는 집단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대립쌍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런 은밀한 유착 관계를 통해서 정치투쟁이 학문 장에 슬그머니 들어올 수 있습니다."(74) 저희 정말 이대로 살아야 합니까, 부르디외씨?

매거진의 이전글 경합주의적 민주주의는 경합의 대상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