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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12. 2023

반작용의 정치

23.01.12. 파올로 제르바우도, 거대한 반격(202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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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라는 책은 안 읽고 갑자기 정치철학 책들을 몇 권 읽어나가고 있다. (책모임에서 읽어야 할 책들이 여전히 침대 머리맡에 널브러져 있는데 잘 하는 짓이다...) 이번엔 간만에 두께가 있는 책을 골라왔다. 파올로 제르바우도의 <거대한 반격 :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다. 한 번에 다 읽을 체력도 시간도 없어서 책의 대강에 대해 설명하는 서론과 1장 정도만 일단 먼저 읽었다.


어쩌다 읽게 되었냐면, 이것은 다 배세진 선생과 장석준 선생 때문인데... 어느날 헤비 트위터리안으로서 하릴없이 손가락을 위로 튕기다가 예전부터 팔로우하고 있던 배세진 선생이 이 책을 읽고 매우 좋다고 하는 트윗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이 대체 무슨 내용인가 싶어 검색엔진의 힘을 빌었더니 장석준 선생의 서평이 가장 앞에 보였다. 서평이 길어서... (존경하지만) 이 서평을 다 읽느니 책을 보는 게 안 낫겠나 싶어 집어 들었던 것이다.


배송 완료 문자에 신나서 돌아와 박스를 풀어보니 참 묘한 파란색 배경에, 붉은 색 글씨로 원제가 써 있고, 각종 시위와 팬데믹 상황이 담긴 사진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무서운 디자인과, 최근에 읽었던 책 세 권 정도 합하면 비슷할 것 같은 두께는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심지어 뒷면엔 홉스의 <리바이어던> 표지 그림이 있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디자인이니? 서점에 이 책이 놓여 있었다면, 나는 무조건 집어들었을 것이다. 엔지니어가 디자이너를 이긴 제품이 보통 내구성이 좋듯이, 이런 책들은 보통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히, 심각한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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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의 풍경은 그 이전과 너무나 크게 달라졌다. 해외여행이 어려워지고, 업무 환경이 변했다. 성장은 길게 지체되고, 사람들 사이의 예의범절도 변했다. "지난 40년간 민간부문의 주도권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인함으로써 자유의 이름으로 세계를 재구성한 경제와 정치철학은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역사적 딜레마들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11)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그 이전의 브레턴우즈 체제의 보호 무역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등장했다. 다국적 기업과 자본의 세계화는 다양한 국제적 무역 장벽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이것이 사회의 생산력에 장애로 작용한다는 정치적 주장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사회민주주의적 타협의 기반이 된 포드주의의 생산성 감소 때문이다. 자본과 노동 이동을 자유롭게 한다면, 그러니까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이루어진다면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다는 전망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경제위기와 팬데믹으로 인해 격퇴되기까지는 4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왜 똥은 (글로벌 자본인) 너네가 싸고 치우는 건 (글로벌 인민인) 우리냐?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은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위기로 인해 그 정당성을 의심받았다.  그동안 상찬하던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아주 취약한 기초를 가지고 있고, 이 위기가 글로벌 금융 엘리트들의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되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대중은, 그들이 만든 손해를 조금씩 나눠 져야만 했다. 신자유주의의 약속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았다. 


새로운 운동은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좌우 양쪽에서 출현했다. 한쪽에는 트럼프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제러미 코빈과 샌더스가 있다. 국경을 봉쇄하고 이민자를 막아 '순수한' 우리를 유지하자는 주장과, 국가가 자본을 통제하고 사회에 침투하기를 요구하는 주장이 신자유주의의 반동으로서 힘을 얻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가 헝클어뜨린 삶을 회복하자는 목소리로 힘을 얻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포퓰리즘 정치의 작용-반작용 과정에서 새로운 '신국가주의'로의 수렴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회를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경제영역에 더욱 강하게 개입할 것을 국가에게 요청하는 신국가주의"(12)다. 이 신국가주의는 2010년대 포퓰리즘 국면에서도 등장한 이데올로기지만, 코로나와 같은 국제적인 보건 위기는 이 경향을 심화시킨다. 이것이 좌든 우든 이제 안전, 주권, 보호, 통제라는 개념들을 '정치적 뉴노멀'로 받아들이게 만든 힘이다.


신국가주의는 정치적 뉴노멀, 곧 사실상 모든 정치적 행위자들을 굴절시키는 메타 이데올로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우리의 정치적 미래에 관한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전망들이 충돌하는 새로운 전장이 됐다. (12-13)
거대한 반격은 신자유주의 테제와 포퓰리즘 안티테제가 신자유주의 팽창 국면에 지배적이던 이데올로기 교리의 대부분을 퇴색시키면서 국가주의 종합테제를 낳는 순간이다. (22)


이렇게 오래, 깊이 상흔을 남길 거라고 예상한 사람이 있었을까?


한 때 낡은 것으로 여겨졌던 국가 주권은 신국가주의자들의 투쟁 대상이 되었다. 한 쪽에서는 이주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한 쪽에서는 자본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 주권을 획득하려 경쟁한다. 무능해 보였던 국가의 조종능력(steering capacity)은 이제 또 다른 만능 열쇠처럼 받아들여진다. 신국가주의로의 수렴 경향에는 사회적 불확실성을 제거해 달라는 안전에 대한 요구가 밑바탕에 있으며, 이것은 주권-보호-통제라는 핵심 개념들에 대한 호소로 이어진다.


'국가' 권력의 획득을 두고 각축을 벌이는 오늘날, '좌파'는 어떻게 이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에서 경쟁해야 할까? 그간 성공적으로 권력을 획득해 온 우파-신국가주의 서사에 맞서, 저자는 '사회보호주의'라는 이름 아래 주권,보호,통제에 대한 진보주의적 서사를 마련하길 요청한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거지지를 확장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사회경제적 사안들에 다시 주목하는 동시에, 인민주권, 사회보호, 민주적 통제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이런 위태로운 줄타기를 감수하는 모험을 통해서만 좌파는 거대한 반격의 자극과 함께 곤경을 헤쳐 나갈 희망을 품을 수 있고 뒤돌아보거나 내면을 성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기 시작할 수 있다. (30)


하필 며칠 전에 무페의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를 읽었는데...


이전에도 포퓰리즘 국면을 분석한 정치철학자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형식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한다. 담론 전술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계급 연합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지, 그 사례는 어떠한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것은 실제로 내가 무페의 책을 읽으며 느낀 갈증이기도 하다. 어떤 선거제도, 어떤 동원 전략이 필요한지를 그람시처럼 실제 지역에 대한 분석과 연결시키는 부분이 부족해 보였으니까.


그는 6장에서 거대한 반격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계급갈등과 계급동맹의 다양한 양상을 탐구하여, 계급이 여전히 새로운 사회적 블록 건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접합부분임을 역설한다. 민족주의 포퓰리스트들로부터 블루칼라 노동계급을 분리시키고, 새로운 좌파 블록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의 설득력은 이 장에서 어느 정도 가늠이 될 것이다. 또한 9장에서 이야기하는 '민주적 애국주의'(사실상의 공화주의?)를 어떻게 확산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문화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이것은 이 책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아닌지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정체성 정치의 단점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정체성 정치의 무용함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뒤에 이어질 내용들에서 저자가 이에 어떤 태도를 보여줄지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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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말해 "냉전종식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한 정치적, 경제적 교리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용어"(39)다. 규제를 완화하고, 민영화하고, 자유무역을 활성화하고, 세계화를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노동-자본의 대타협으로 형성된 사회민주주의적 합의들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국가가 사회의 각 부분에 개입하고, 세계적인 자본-노동의 이동에 규제를 가하고, 다수 구성원들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 시기를 지나며 정지되었다. 더 많은 '자유'(이동? 경제? 자본?)는 더 많은 '부'(누구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약속은 오일 쇼크와 포드주의의 위기로 경제 성장이 저하된 선진국 국민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건 정치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집권에 성공한 1980년대 이후, 소련도 끝내 붕괴되며 냉전마저 종료되자 신자유주의 이외의 이데올로기는 그 힘을 잃었다. 


예전에 이거 진짜 재밌게 읽었음...


승리를 구가하던 신자유주의가 삐걱거리면서, 샹탈 무페와 같은 이론가들이 이야기하는 '포퓰리즘 국면'이 등장했다. 이 국면에서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극단에서 유사한 전략과 레토릭이 발전될 필요를 낳는 공통의 구조적 조건"(49)이 포착된다. 노동계급의 빈곤화, 중간계급의 분화는 포퓰리스트들로 하여금 계급적 또는 평민적 레토릭을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급격한 불평등은 쇠락한 유권자들이 정치의 중요 주체로 등장하는 상황을 예비했다. 저자는 "포퓰리즘 국면에서 새롭게 나타난 구체적인 정치적 태와 새로운 계급정렬을 포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포퓰리즘 국면에서는 세 가지의 주요 정치 집단이 등장한다. 민족주의 우파는 불만을 품은 노동자와 쇠락한 중간계급의 '분노와 원망'을 가로채기 위해, 외국인 혐오, 여성 혐오, 쇼비니즘을 받아들인다. '순수했던' 과거라는 상상의 공동체로 돌아가기 위해 불순한 존재들인 이민자들, 장애인들, 여성들 같은 비-국민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사회주의 좌파는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제3의 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공공의료, 공공교육에 대해 투자하고, 복지를 확대하고, 자본을 통제하는 국가의 귀환을 요청한다. 신자유주의 중도파는 이 양대 세력의 발흥 앞에서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국가주의는 새로운 포스트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미리 보여주는 한편, 또한 국가와 그 임무에 관한 매우 다양한 전망이 새롭게 출현하는 전장이자, 화급한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들이 부각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와 비슷하고,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정치 공간 전체에 속속들이 스미는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이다. 포퓰리즘 국면에서도 등장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반작용' 수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장이 되어버린 신국가주의의 세 가지 '주인 기표'는 주권, 통제, 보호다. 국가가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통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에 따라 좌파와 우파의 서사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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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성장과 지배, 그리고 그것의 균열과 붕괴에 대한 역사를 다룬다. 심호흡이 조금 필요하다. 내일 마저 읽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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