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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13. 2023

외향정치와 내향정치

23.01.13. 파올로 제르바우도, 거대한 반격(2022) 2

언제 다 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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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걸려 골골대고 있다. 점심에 간 이비인후과는 아주 허름했다. 집기들이 품고 있는 세월의 무게만큼 느렸다. 연세가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께서는 내 코를 가득 채우고 이마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콧물들을 있는 대로 뽑아가셨다. 얼마나 끈질긴지 코 점막이 다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다. 그래봤자 밖에 나오니까 금방 다시 찼지만... 약을 줄 테니 잘 먹고 따뜻한 물 자주 마시고 사람들 가까이 가지 말고 체력 관리 잘 하라는 말씀을 하시며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때만큼은 단호하고 빠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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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두통이 사라진 순간을 틈타 2장과 3장을 읽었다. 2장은 신자유주의의 간단한 소개와 그것이 득세한 과정, 그리고 뒤이어 정치적/윤리적 위기에 처하는 과정을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해두었고, 3장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등장한 다양한 양태의 포퓰리즘과 새로운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으로서 '신국가주의'가 공유하는 '주인 기표'인 주권에 대해 다룬다. 그것을 어떻게 전유하느냐에 따라 좌파와 우파의 서사가 갈라진다는 '담론 분석'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2장의 내용 가운데 가장 신선한 것은 신자유주의를 '외향정치'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동안 영토의 물리적 제약과 인민의 정치적 제약으로 인해 이익의 잠재적 가능성을들 억제당하고 있던 자본이 소위 '고삐'가 풀리며 전세계로 확장되어 나가는 현상을 '외향정치'라고 구분짓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제시되는 다양한 안전에 대한 요구, 주권에 대한 요구, 보호와 통제의 요구를 '내향정치'로 구분짓는 대립의 틀은 단순하지만 선명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이윤 동기가 가장 큰 동력이었지만, 그것이 일종의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전망이 가지는 도덕적인 힘도 그 확산과 정착에 큰 역할을 했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고립은 자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 포드주의라는 생산관계가 가져온 생산력의 하락 위기에 대응하여 새로운 번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영토 권력에 기초하던 민주주의로부터 자본 권력을 규제할 힘을 박탈하고, 자본에 대항하는 노조 권력을 박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더욱 가난해진 빈곤층과, 착취의 압력에 더욱 전면적으로 노출된 중산층이다.


신자유주의는 끊임없이 '외부화'했다. 노동자를 외주화하고, 생산 수단을 외부화하고, 정치 권력의 통제로부터 국제 자본을 구출했다. 더 나아가 그렇게 외주화와 외부화를 '자연'스럽게 추진하기 위해 국가를 개조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싱크탱크와 그들의 지원을 받은 정치인들, 학자들은 이데올로그로서 신자유주의가 아닌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들을 펼쳤다. 자신들을 '자유의 투사'로 여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 앞에서 인민은 상실한 통제력으로 인한 무력감에 시달렸다. 불평등은 격화되었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것은 세계화의 불가피한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지리적, 그리고 권력의 주변부에서 반동은 시작된다. 가난해진 제조업 노동자들은 자신의 상황에 책임지지 않는 신자유주의 중도파 엘리트들(좌든 우든)에게 실망했다. 그들은 어느 쪽으로든 붙을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통제력을 가지길 원했다. 누가? 무엇에 대한? 무엇을 위해? 이것은 특정한 '영토'와 '국경' 안에서의 독점적인 권력인 '주권'을 어떻게 전유하느냐의 문제다. 국경을 통제하여 '불순한' 이민자들을 격리해 '순수한' 인민의 안전을 획득하고자 주권을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다국적 자본의 미꾸라지 같은 행태를 구속할 수 있도록 사적인 것에 대한 공적인 것의 우위를 주장하는 데 주권을 활용할 것인가? 


이것은 주권이 '주인 기표'와 유사한 무언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중적 욕구와 감정이 누벼지고 '일시적'으로 안정화되는 중심으로서 누빔점을 의미하는 주인 기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다양한 양태의 반작용들을 정렬할 수 있는 텅 빈 기표다. 그 자체의 의미보다 이것이 누구에 의해, 무엇을 위해, 어떤 세력들 사이의 접착제로 활용되는지가 중요하다. 좌파든 우파든 포퓰리즘적 국면에서도 이 '주권' 개념에 대한 재전유를 시도하고 있다. 과거 좌우파가 모두 신자유주의라는 지평 아래에서 그 정도와 취향의 차이를 두고 대결했듯이, 오늘날의 좌우파는 이 신국가주의와 그것의 뼈대를 이루는 주권-통제-보호의 세 기표의 기둥들을 두고 서사를 만들기 위해 대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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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상황은 사람들 사이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신자유주의의 장밋빛 전망에 대한 대중 다수의 불만을 격화시켰다. 오일쇼크가 그러했듯, 이것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내는 사건이다. 특히 바이러스는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이동을 통제하는 권력이 생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아주 직관적으로 깨닫게 만들었다. 통제력을 상실한 국가가 이 위기에 얼마나 취약하고, 그 관할 아래에 속한 인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지 깨달은 이들은 이제 내향정치라는 반동에 몸을 싣는다. 이것은 분기점이다. 민족주의와 테크노크라트들의 지배를 요청하지 않을 거라면, 좌파는 어떻게 이 부유하는 원한들을 절합할 건가? 


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아직 좀 더 뒤까지 읽어야 한다. 오늘도 또 끝까지 가지 못했다. 이래서 독서는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동산과 체력. 둘 다 지금 없는 상황에서 독서란 아주 어렵고 비효율적인 취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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