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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15. 2023

블록 형성하기

23.01.15. 파올로 제르바우도, 거대한 반격(2022) 3

점점 플래그가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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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에 취해 헤롱거리는 와중에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 책을 펼쳤다. 이런 건 보통 소설을 읽을 때나 일어나지 않나? 이러니 내가 대중적 취향이 없어서 회사 생활이 어려운 것인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지 않나. 곧 죽어도 읽고 싶은 건 읽고 죽어야 한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6장의 <새로운 사회적 블록>은 읽고 생각을 정리해야 속이 좀 덜 답답한 채로 죽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저자가 앞의 장들에서 길게 논의한 내용들을 짧게 요약하면, 신자유주의라는 외향정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포퓰리즘이 등장하고, 신자유주의라는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을 대신할 신국가주의라는 내향정치가 새로운 정치 투쟁의 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민들의 삶을 보호하던 국가 주권의 행사를 제한하고, 통제력을 약화시키며 근본적으로 불안에 노출시킨 신자유주의는 적어도 40년간 더 많은 번영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불평등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키는 결과만 낳았으며, 2008년의 경제위기와 2020년의 팬데믹은 이 이데올로기의 윤리적 한계를 드러냈다.


지지자들조차 옹호하기 버거운 황폐한 결과 앞에서 사회주의 좌파가 민족주의 우파와 신자유주의 중도파에 맞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계급을 하나의 전선으로 묶는 '정렬'이 필요한데, 제르바우도는 이 정렬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계급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려 한다. 단순히 내키는 대로 다양한 정치행위자들을 묶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무질서해 보이는 양태들 아래에는 비교적 명료한 균열이 있음을 파악해야만 경합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폐기할 수 없고, 주권은 다양한 국가 장치들을 통해 행사된다. 좌파든 우파든 자신들의 서사를 완성하고 실현하려면 국가 권력을 쟁취해야만 한다.


계급은 "현대 정치논쟁에서 매우 논쟁적인 주제인 데다가 현재 정치 균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범주"(254)다. 물론 속류화된 건축적 도식으로 계급과 계급의식을 설명할 수는 없고, 많은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정치 행동과 선거 행동을 좌우하는 요인으로서 계급의 유의미성"(254)이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애초에 라클라우와 무페가 그람시와 라캉을 이용해 '헤게모니 전략'을 이론의 핵심 주제로 끌고 들어온 이유가 계급이 정치를 지배한다는 도식적인 이해에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제르바우도 역시 게급만이 선거 행동을 좌우하지 않고, 사회인구학적인 경향들 가운데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인정한다. 나이, 성별, 민족, 문화적 태도, 지리적 위치는 중요한 변수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포퓰리즘 국면 자체가 애초부터 경제 위기의 심화와 불평등 확대를 특징으로 하는 시대에 나타난다.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고 배제와 하락의 공포에 시달리는 계층에게 호소하여 정치 권력을 획득하고자 애쓰는 것이 포퓰리즘 정치의 핵심이지 않은가? "계급은 현대의 사회적 블록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핵심적이다."(256)


포퓰리즘 운동의 부상과 정치적 양극화의 증가는 경제 위기 심화와 불평등 확대를 특징으로 하는 시대에 나타나는 사회 불만과 계급갈등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단단히 엮여 있다. 실제로, 우리가 주장한 대로 포퓰리즘은 분명한 구조적 차원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차원은 후기 신자유주의 영향 아래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하는 상황, 그리고 빈곤과 배제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회 부문에 민족주의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 양측이 호소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256)


여기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정렬'이란 용어는 경제와 정치에 관한 오래된 논쟁을 상기시킨다. 왜 노동자들은 노동자 정당에 투표하지 않는가? 계급 '배반' 투표는 왜 일어나는가? 노동자들은 왜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20세기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랜 고민 중 하나였다. 이 논쟁을 되짚을 역량은 되지 않지만 이러한 질문에 전제된 숨겨진 질문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이 '탈구'의 느낌은 어떻게 가능한가? 계급 정당이 계급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계급 정당이 그 계급의 해관계를 정치 공간에 적절하게 관철시켜 왔다는 감각이 선행해야 '탈구'의 감각은 느낄 수 있다.


정렬이 이루어지려면 계급의 요청이 명확히 드러나야 하고, 그 요청에 정확히 응답하는 정당이 정치 제도 안에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전자나 후자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계급배반' 투표란 사실 꽤나 어색한 용어다. (대한민국의 상황이 그렇다. 배반을 하려면 충성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충성할 대상으로서의 정당도, 충성할 주체로서의 계급도 소위 '의식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사회주의 정당이 합법적으로 정치 공간 내에서 활동했던 몇몇의 국가들에서만 '계급 배반'은 가능하고, 문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역사적 맥락에 꽤 의존하는 감각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좁힐 수 없는 감각의 차이를 가늠하고 독서할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의 한 부문이 우파에 투표한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이런 증거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노동계급 대다수가 좌파에게 투표했던 포드식 산업주의 황금시대에도, 노동계급 투표에서 우익 몫은 늘 존재했다. (265)


서유럽의 좌파 정당은 오랜 시간동안 그 충실한 지지자로서 블루 칼라 노동자들을 배후에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블루 칼라 노동자가 좌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까지 노동과 자본의 대타협을 이끌어내고, 각종 사회 복지를 확대하고 임금 상승을 이끄는 등 좌파 정당은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을만한 정책들을 실현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적극적으로 좌파 정당이 수용하게 되면서, 신자유주의의 압력에 분쇄되는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는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제조업 노동자들의 분노는 커졌다. 게다가 1960년대 이후의 신사회운동이 수용한 성적, 문화적 해방이라는 대의명분에 의구심을 가진 제조업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정치 세력의 부재를 느꼈다. 이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이민자들을 문제의 원인으로 돌리는 민족주의 우파의 서사다.


"더 싸고 더 유순한 노동력에 대한 필사적인 탐색"(273)을 통해 생산을 분산하는 신자유주의의 원심력 앞에 산업도시는 쇠락하고 제조업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이들을 보호하는 다양한 국가 장치들은 해체되었고, 예전에는 사회의 안정을 책임지는 보호막이었던 이들은 양극화되었다. 임금 하락으로 인한 분노와 공포는 무분별한 이민자들의 유입을 비난하는 민족주의 우파에 더 쉽게 접합되었다. 자신들이 지켜 온 근면과 성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그것이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하여도) 우파를 지지하는 '블루칼라 보수주의'의 뼈대에는 이런 경제적 구조가 있다.


물론 임금과 노동조건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서비스 프레카리아트들은 반대로 좌파 정당의 새로운 전략적 유권자로 부상하고 있다. 이들 역시 직간접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개혁' 조치들로 인해 양산되었다.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는 이 계급은 노조 조직률이 낮고 선거 참여율도 낮다. 이들은 생산의 분산으로 인해 교외화된 제조업 노동자와 달리,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아직까지는 제한적 성공만을 거두고 있지만 이 새로운 불만계층을 조직화하고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는 시도가 최근 활발해지고 있다. 이들을 좌파가 얼마만큼 동원하느냐에 따라, 블루칼라 노동자의 이탈에 대응하는 난이도 역시 달라질 것이다.


노동자 계급처럼 중간계급 역시 분화하고 양극화된다. 신자유주의의 복음을 가장 열심히 신봉했지만 대다수의 중간계급은 '어중간한 계급middling class'이 되어 계급 하락의 공포에 시달리고 말았다. 소위 '특권 중산층'들은 1%의 엘리트들과 함께 성장의 과실을 누리지만, 노동계급의 바로 위에 존재하는 프티 부르주아지(소규모 기업가나 소매 상인들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는 더 극심한 파산 위험에 노출된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발생한 대침체 과정에서 '어중간한 계급'은 위 아래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세력의 부재를 뼈져리게 깨달았다. 모순적 요구, '나의 자산을 건드리지 않지만 나를 위험으로부터는 구출해 달라'는 요구는 이러한 경험과 계급 성향이 한데 뒤섞인 결과다.


중간계급은 구중간계급(관리자, 기술직, 사무직, 고용주, 소상공인)과 신중간계급(사회문화 관련 전문직, 숙련 서비스 노동자)으로 구별되는데, 구중간계급은 사업가적 기질이 강하고, 강한 조세에 저항하고,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위협하는 인텔리겐치아에 의구심을 품는 반엘리트주의자라면, 신중간계급은 만만치 않은 경제적 난관에 직면하여 재분배 정책과 사회적 자유, 문화적 관용을 요청하는 고학력 계층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명료하게 구별되지는 않지만, 한데 뒤섞여 있던 중간계급의 분극화는 점차 강화되고 있다.


저자는 각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뒤바꾸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한 편으로 묶을 수 있는 정렬의 '축'을 설정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동안 좌파가 과도하게 의존해 온 도시의 '신중간계급' 뿐만 아니라, 교외화된 제조업 노동자들을 다시 좌파의 지지세력으로 이끌어오기 위해 "경제적 요구"에 "우선순위"를 두어 지지자 블록을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려면 각 계급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해 지도 역할을 하는 '행동하고 조직하는 구성원'인 유기적 지식인이 필요한데, 문제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노동계급 출신이 아니다. 이들을 노동계급 커뮤니티 속에 뿌리내리게 하려면 고행 실천이 필요하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 중 눈에 띄는 요소를 버리는, '하방'이다.


경제적 요구를 최우선에 둬야 한다는 것이 "보편주의, 인권, 다문화적 관용에 대한 헌신을 저버릴 필요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293) 하지만 노동계급의 보수성은 엄연한 현실이고 "신중간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윤리적 세계관의 차이가 이들의 계급동맹을 접합시키는 데 장애물이 될지도 모를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294) 그래서 그는 이 잠재적인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 일자리, 공공서비스와 같은 경제적 요구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길 요청한다. 이는 우파의 기만적 전술, 실제로는 노동계급의 이해를 관철시킬 마음이 없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승리하기 위해 유지하는 '환상'을 해체하는 작업과 병행한다.


이 장이 이야기하는 것은 포퓰리즘 국면의 경제적 하부구조이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균열은 있는 그대로 어떤 결과를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균열을 어떤 식으로 연결하느냐에 따라 민족주의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가 자신의 비전과 기획을 실천할 가능성이 달라진다. 계급은 조건을 만들 뿐이며, 정치는 그 명확한 계급 이해 아래에서 전략적인 승리를 위해 활용해야 하는 기예다. 이것은 조야한 경제 결정론이 아니다.


다만 '문화전쟁'이라 격하되는 정체성 정치가 열어젖힌 장을 다시금 닫는 알리바이로서 '계급'을 호명하는 것은 아닌가? 그는 계속해서 아니라고 하지만, 전략 전술의 차원에서 문화 보다는 경제적 요구들을 우선시하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효과적이고 장기적인 연대를 가능케 하는가? "나중에"의 기만에 시달려 본 경험이 우리에게 이미 있지 않은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민의 적들> 장을 읽어보고 대답을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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