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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an 16. 2023

더 포스트

230113

  <더 포스트>를 틀어놓고 잤다. 언제 봐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다 떠나서 언론, 그것도 신문이 가장 강한 화력을 지녔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전까지 좋게 본 '언론 영화'는 대부분 방송 기자 이야기였다. 미드 <뉴스룸>, <프로스트 vs닉슨>, <트루스>, <굿나잇 앤 굿럭>, <나이트 크롤러>... 예외가 있다면 <스포트라이트>인가(<조디악>은 언론 영화라고 보기 어렵다). 감사합니다 스필버그 선생님. 신문쟁이 가슴이 바운스 바운스하네요.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말할 것이다. 편집장 벤 브래들리 말고,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을 주인공으로 세운 것이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다. 그 덕에 언론사 구성원들이 마주할 법한 복잡다단한 갈등을 단순화하지 않았고, 여성이 목소리를 좀체 낼 수 없던 시대상을 세심히 보여줄 수 있었다. 이 얘긴 여기까지.

  이번에 보면서는 드라마의 다층성이 흥미로웠다. 브래들리와 베그디키언을 비롯한 보스턴글로브 기자들이 뉴욕타임스의 '펜타곤 페이퍼' 보도에 낙종한 뒤 기사거리를 찾아 헤매는 과정은 마치 첩보 드라마 같다. 캐서린이 보스턴글로브의 주식 발행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한 편의 오피스 드라마이며, 그 안에서 목소리를 내기까지 과정은 여성의 성장을 그린 페미니즘 서사다. 여기에 저널리즘의 본질 탐구가 더해진다. '이걸 왜 한번에' 싶은데, 이게, 되네?

  스필버그의 솜씨는 일품이다. 온갖 갈등이 숨쉴틈 없이 몰아치는 통에 영화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정도다. 여성 사주를 무시하는 편집장과 사내 이사들(젠더), 경제논리와 언론의 공적 가치(오피스1), 타사의 특종과 자사의 반까이 노력(오피스2), 사주와 기자(저널리즘1), 기자와 취재원(저널리즘2), 정치권력과 언론(저널리즘3)처럼 층위와 종류가 다른 갈등이 번갈아 등장해 지루할 틈이 없다. 이정도면 각기 다른 영역의 갈등을 일부러 넣은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각각의 갈등을 심층적으로 해소다. 하나하나 특출나느냐면 그렇다고는 못하겠는데 모아놓고 나니 이거 뭐, 장편 구성의 교과서로 내놓고 싶습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유튜브 채널 '파이아키아'에서 '남성 편집장이 아닌 여성 사주를  특종한 뉴욕타임스 말고 낙종한 워싱턴포스트를 서사의 중심에 둔 이유를 생각해보라'는 취지로 말했는데, 동의한다. 뉴욕타임스가 주무대였다면 정보를 처음 어떻게 발굴하는지, 취재원을 어떻게 설득해 내는지, 정치권력의 압력에 어떻게 맞서는지 등 저널리즘 이야기만 줄창 하게 됐을테고, 첩보드라마적인 요소가 두드러졌을 것이다. 낙종한 언론사를 앞세웠기에 '언론이라는 이름의 연대'를 비출 수 있었다.


물론 '받아쓰기' 해야 했던 다른 언론사들은 괴로웠을 것이다. 심심한 위로를...


  여성-사주도 마찬가지인데, 캐서린의 결단이 두 번 이뤄진다는 게 흥미롭다. 이사진과 기자, 법률가들이 모두 모였다는 점은 같다. 첫번째는 비대면 상황에서 전화를 통해, 한번은 그녀의 집에서 이뤄진다는 게 차이다. 고민의 수준도 다르다. 처음 갈등은 주식 발행 후 일주일 사이에 큰 사건이 벌어지면 발행이 취소될 수 있다는 약관 때문에 생긴다. 뉴욕타임스가 법원의 보도 금지 명령을 받은 상황인데, 워싱턴포스트가 같은 자료를 보도하면 주식시장에서 위험요소로 받아들이지 않겠냐는 거다. 반면 두번째 결단은, 이 보도로 캐서린이 형 선고를 받을 수 있다는 판단 이후에 이뤄진다.

  아무래도 두번째 결단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캐서린이 매번 그녀에게 반대 논리를 편 남성 이사의 면전에 대고 '사주인 내 판단을 마냥 무시하는 이사는 필요없다'며 한방 먹이는 순간이어서 더 그렇다. 반대로 나는 첫째 장면에 더 끌린다. 이후 결단은 심화판일 뿐, 첫번째 고뇌에 이미 예비돼 있다. 첫번째는 캐서린이 홀로 방에 선 순간이어서 그녀의 '고독한 결단'이 두드러진다(진행이건 포기건, 전화할 때 어쩐지 더 적극적으로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심리적인 면까지 나타난 듯해 더 재밌다).



  워싱턴포스트의 보도 이후 법원 앞에 모여든 인파 장면은 낯설었다. 언론이 보도한 사실 앞에서 슬퍼하거나 분노했을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있어서 '그려진다'고 쓴 게 아니다. 반대로 상상의 산물이다. 내게 더 익숙한 장면은, 언론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매도하는 정치인과 욕설 메일을 보내는 지지자들의 모습이다. 보도를 보고 모여드는 시민 없지 않으나, 대개는 반대자들도 함께다. 보도에 긍정 반응하는 시민도 실은 언론을 믿고 사실에 반응한다기보다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행동하는 때가 더 많은 듯하다. 사실과 진실이란 말이 냉소받고 오용당하는 시대다. 그래서 저 장면이 낯설었다. 가진 적 없어 부러웠다.

  아래는 스필버그의 신문을 향한 애정이 드러나는 장면. 프린팅 과정 자체가 주는 미적인 즐거움이 일단 크지만, 신문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인문 군상이 차례로 등장하는 것이 눈길을 끈다. 편집, 교열, 조판, 인쇄, 상하차, 운송, 배치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워싱턴포스트'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그들이 느꼈을 자부심이 눈에 선하다. 물질을 매개로 해야 비로소 가능한 연대다. 책이고 신문이고 촌스러운 것이 된 시대지만, 아날로그한 감성이 주는 실감이란 게 있다면 저런 것 아닐까.


https://youtu.be/rIW8Z74e7r8



P.S. 이건 걍 듣고 외워야 합니다.

https://youtu.be/6SlFv5iZP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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