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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25. 2023

아니 왜 계속 무페만 읽지

23.01.24. 샹탈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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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PD 저널에 <포퓰리즘은 죄가 없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분명히 책을 다 읽었는데, 오늘 다시 펼쳐 보니 그 때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부끄러워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오해한 부분들도 있고, 몰랐던 부분들도 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을 나는 별로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은 부분들도 있어서 다시 생각을 정리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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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얇은 책을 읽기 위해서는 사실 예비적 독서가 필요하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부터 읽는 것이겠지만,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당시의 국면에 개입하는 성격도 있기 때문에, 당시의 정세도 이해해야 한다.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는 저 책을 쓴 이후에 달라진 정세에 대한 판단이 담겨 있고,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위하여>에는 2019년까지의 좌파 포퓰리스트의 선거 패배의 경험들도 반영되어 있다. 무페의 저작들은 이론서인 동시에 정세에 개입하려는 당파적인 목적도 강하기 때문에 동시에 읽어야 할 텍스트가 한 둘이 아니다. 요약이 쉬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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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짧게 이야기하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은 정치적 공간을 경제에 의해 결정되는 타율적 공간으로 이해하는 해석에 기대는 좌파가 소위 신사회운동(지금은 더 이상 '신'사회운동도 아니지만, 그 당시엔 새로웠던 다양한 인권운동, 생태운동 등 계급 문제로 환원하기 곤란해 보이는 다양한 저항의 형태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에 기초해 있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토대-상부구조라는 도식적 이해 아래에서, 상부구조에 속하는 다양한 장치들, 특히 국가는 단순히 지배계급의 도구에 불과하다. 또한 역사가 필연적으로 특정한 방향으로 이행할 것이라는 믿음은, 정치적 행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기다리면 알아서 노동계급의 승리가 이루어질텐데, 정치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19세기 말의 대공황은 이러한 '대기'가 정당한 기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공황은 곧 끝났고, 20세기 초까지 호황이 이루어졌다. 자본주의는 곧바로 붕괴하지 않았고, 노동조합은 경제 투쟁에 몰두하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왜 노동자는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에 맞서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 이 시기의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의 '안주'를 설명하기 위한 지적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정통'마르크스주의자는 역사의 필연적 진행을 포기하는 대신, 이 필연성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위치에 '당'을 위치시켰다. 해방의 (예비된) 담지자인 노동계급은 이 전위대로서 '당'의 지도에 따라 허위의식과 기만을 걷어내고 역사적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러시아에서 발생한 혁명은 이 역사적 필연적 단계를 건너뛰는 사건이었다. 부르주아 혁명 이후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도식은 러시아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부르주아 계급의 과업을 임시로 떠맡아야 했다. 반절대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임시적 과업을 노동계급이 떠맡은 이례적 상태를 레닌은 '헤게모니'라고 불렀다.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을 단축하기 위해 반절대주의 투쟁에서 중요한 농민은 계급동맹의 중요한 파트너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처지에 정치적 주도력의 대상일 뿐이다.


그람시는 레닌과 다른 처지에 있었다. 레닌은 단계를 '건너뛴' 러시아의 상황에서 노동계급이 떠맡아야 하는 과업들을 사유해야 했다면, 그람시는 전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사유해야 했다. 왜 전복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탈리아의 노동계급은 왜 혁명에 참여하지 않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을 정치적 차원만이 아니라 지적, 도덕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단순히 노동계급을 기만하는 게 아니라, 노동계급도 동의할 수 있고 동일시할 수 있는 '집합 의지'를 만들어내는 데 지배계급이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의 토대 위에 라클라우와 무페는 핵심 개념들 몇 가지를 덧댄다. 가장 먼저 접합은, 여러 대상들의 우연적인 결합이다. 그리고 우연적인 결합이지만 이것은 결합하는 대상들을 변화시킨다. 각각의 뼈는 그 자체로는 단순히 뼈지만, 그것이 관절을 중심으로 연결되면 움직임이 가능한 부분들이 된다. 접합의 과정을 통해 접합되는 대상은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 것이다. 근대는 고정된 사회적 정체성이 해체된다. 이는 정체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 주체를 만드는 다양한 담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엮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노동자인 동시에 남자이거나, 아시아인이거나, 가부장이기도 하다. 그것들 중 어떤 담론이 '닻'의 역할을 하는지는 우연적이지만 그러므로 꽤 중요하다. 이 '닻'이 바로 정치적 실천의 핵심이 된다.


우파가 이 닻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대처주의다. 그가 보기에 대처는 노동자들이 새로운 '닻'에 동일시할 수 있는 전략을 활용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적 대타협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의 한계도 명확한데, 대처주의의 승리는 포드주의의 한계와 그에 따른 생산성의 둔화로 자본이 축적의 위기 앞에서 새로운 형태의 생산양식을 요청하는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담론의 경합의 결과라기보다 사회적 실재의 변화로 산출된 위기의 결과다. 사회 분석이 담론 분석으로 과도하게 축소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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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요약하고 있었는데, 일단 여기까지만 하고... 간단한 설명에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를 덧붙여 보면, 이 책은 2008년 경제 위기와 그로 인해 정당성을 상실한 신자유주의의 합의를 대체하려는 다양한 정치운동들 가운데 '포퓰리즘'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그는 이 포퓰리즘을 라클라우의 정의에 따라 쓴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즘 이성에 대하여>에서 포퓰리즘을 "사회를 두 진영으로 분리하는 정치적 경계를 구성하고, '권력자들'에 맞선 '패배자들'의 도원을 위한 담론 전략"(23)으로 정의한다. 이는 정치적 영역 내에서 화해가 불가능한 집단적 경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정치 활동 방식이고, 이는 소위 지배 헤게모니가 그 정당성을 상실할 때 주로 불거진다. 사회질서를 재배열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기가 바로 '포퓰리즘 계기'다.


그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구성체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는 지난 30년간 평등과 대중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의 두 축이 침식된 결과라 본다. 1970년대 이후 경제적 불평등은 심각하게 증가했고, 대중은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고 제도 참여의 효능감을 상실했다. 국가는 시장을 위해 재정렬되고, 중도화된 정치는 정치를 취향의 수준으로 축소시켰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축소에 대응하는 민주주의의 본원적 반응이지만, 문제는 오늘날 다양한 저항들이 제도를 무시하거나 우회하거나 파괴하려는 방향으로 진전되며 그 영향력이 제한되고 있다는 게 무페의 진단이다.


포퓰리즘 계기에서 헤게모니를 상실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우파 포퓰리스트들이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패배자들을 자신들이 유일하게 신경쓰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패배자들 중 하나인데, 그들의 보수적 성향도 분명한 영향을 미쳤겠지만 이들이 전통적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좌파 정당을 지지하지 않게 된 것은 그들의 '패배감'을 중도 좌파 정당들이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대로면, 신자유주의의 몰락은 연장되거나 더 위험한 '국민주의적 권위주의'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무페는 이러한 정세에 개입해 '좌파 포퓰리즘'을 요청한다. 1970년대 성장의 정체로 인한 국가 재정 위기는 집권 노동당으로 하여금 노동 계급에게 국가 권력을 사용하도록 만들었고, 이는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정당성 위기를 낳았다. 여기에 새로이 등장한 신사회운동은 보수 우파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였지만 노동당은 이러한 (비계급적인?) 운동을 포섭하는 데 망설였다. 그 사이 대처는 포퓰리즘적 전략들을 시행했다. 대처는 "다양한 관료 세력과 이들의 여러 동맹 세력에 의한 희생자들인 성실한 '대중' 사이에 정치적 경계를 구성"(51)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공격의 주요 표적은 그간 사회민주주의적 합의를 이끌어 낸 노조였다.


대처는 개인의 자유를 칭송하고 "억압적 국가 권력으로부터 이 분야들을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을 통해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노동계급은 더 이상 사회민주주의의 우군이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노동계급 내의 새로운 전선을 형성했다. (물론 나는 이것이 단순한 담론 경합의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특정한 담론들에 유리한 사회적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낸 정치/경제 권력의 의도가 담론들 사이의 경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나?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데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유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유산은 분명히 담론의 지형을 결정한다. 완벽한 '우연'은 없다.) 이러한 '동원'과 '동의'로부터 무페는 지금 이 전략을 전유하길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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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려워서 대의제에 대한 이야기, 대중의 구성,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에서 나타나는 차이, 적대 개념의 발달 등 정리해야 할 부분들이 많은데 일단 내버려둔다... 그리고 무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비판 지점들에 대해서도... 무페가 이야기하는 '대중'은 결국 모호하고, 서로 상충하는 이해들에 의해서 아무런 전략적 실효성도 없는 호명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인지, 무페가 중요하게 바라보는 담론 경쟁이 사실은 자본축적의 위기의 결과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건 아닌지, 무페가 '공산주의'의 자리에 '민주주의'를 단순히 갈아 끼운 것은 아닌지... 혼자 공부하는 데에는 참 한계가 많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사람을 계속 보고 있나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 드는 그런 밤인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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