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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31. 2023

초심으로 돌아갈 것

23.01.31. 미카엘 뢰비 외 - 마르크스를 읽자(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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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령이 났다. 내일이면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3년 전 이 곳에 올 때와 비슷하게, 또 다시 새 회사로 이직한 것 같이 낯설다. 8년 넘게 일했던 곳인데도 어색한 걸 보니, 나도 여기 사람이 다 된 모양이다. 새 팀에서 아이템 회의를 했는데 어색해서 혼났다. 다른 사람들이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는 동안, 나는 여러 갈랫길을 돌아다녔으니 당연한 결과다. 후회는 없다. 다행히 이곳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사람이 하나의 책이라면, 꽤 두꺼워졌다고 생각한다.


구태여 다시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을까, 내게 남은 미련이 뭘까 고민했다. 한참 고민한 끝에 다다른 결론은, 오래 전의 기억만 곱씹으며 살고 싶진 않아서다. 현장을 떠나 있으면 보이는 것도 있지만,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 있다. 이야기가 축적되지 않으니, 계속 과거의 '영광'만 되뇌이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섬뜩했다. 소진된 경험의 빈 자리를 채우고 싶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워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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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새 일에 적응하느라 며칠간 책을 손에도 못 댔다. 그 사이 몇 권의 책을 펼쳐보긴 하였으나 끝을 내진 못했다. 스티브 존스의 <안토니오 그람시 비범한 헤게모니>는 대략 마지막 챕터를 남겨두고 마무리했지만, 샹탈 무페-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은 딱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의 난점까지 설명하는 부분에서 끝났다. 그 사이에 기욤 시베르텡-블랑의 <국가에 관한 질문들>은 2부까지 간신히 읽고 나서 체력을 소진했고, 케이트 크로퍼드의 <AI 지도책>과 그레이스 블레이클리의 <코로나 크래시>는 사 놓고 책상 위에서 여전히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어제 밤에 아내가 막 출간된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을 집에 가지고 왔다. 업무상 황민구의 <천개의 목격자>도 봐야 한다. 볼 목록만 정리해도 하루치 글을 쓸 수 있겠다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지금 손에 붙잡고 있는 것은 미카엘 뢰비, 에마뉘엘 르노, 제라르 뒤메닐이 함께 쓴 <마르크스를 읽자Lire Marx>다. 2장까지 간신히 독서를 끝냈고, 이제 3장을 읽기 시작했다. 2장까지 읽기 위해 굳이 카페에 가서 온전히 몇 시간 몰입하는 게 필요했다. 독서 근육이라는 것도 계속해서 쓰지 않으면 약해질텐데, 게을리 해서 그런지 몰라도 확실히 예전보다 책을 읽는 속도나 지식을 흡수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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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로제 에스타블레, 자크 랑시에르가 함께 쓴 <자본을 읽자Lire Capital>을 떠올리게 만드는 제목을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읽자'고 강조하는 행위는 어떤 계기를 바탕으로 한다. 1960년대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요구하며 자본을 '읽자'(여기엔 '다시' 또는 '새로이'의 의미가 반드시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 것과 비슷하게, 2007~8년에 벌어진 전세계적 금융위기의 여파는 이 세 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마르크스를 새로이 소환하길 요구하며 마르크스를 '읽자'는 책을 쓰게 만들었다.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의 약속의 파산과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비판을 요구하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재평가의 기회를 만들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국가의 귀환'을 요청하게 되는 것처럼) 책은 그런 위기의 순간에 나왔다. 그렇다면 나는 왜?


(독서엔 독자의 계기가 있다. 책을 집어드는 데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의 말과 글이 세상에 나온 지 한참 지났고, 그 사이는 세계도 참 많이 바뀌었다. 그의 주장에도 한계점들이 보이고, 그의 말을 인용하여 정치적 기치로 삼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비극적인 결과들은 참혹하다. 이대로 시대의 뒤안길에 내버려 두어도 좋으련만, 그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환된다. 이것은 마치 유령과도 같아서, 완전히 해치울 수도 그렇다고 예전의 모습대로 소환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미 그가 남긴 문장들에 대한 도전 과정에서 우리는 그의 말을 넘어서는 지식들을 얻고 또 영감을 이미 얻었다. 그러니 훈고학적으로 문장 하나하나를 따져서 그의 말을 전능한 '저자'의 입장에서 오독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소환되는 유령을 온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등장하지 못하게 한들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행위는 왜 계속 일어날까? 그것은 그의 문장들이 가지는 힘이 여전히 있고, 사회의 발전과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명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다양한 방식으로 접한 그의 텍스트들을 적절히 정리해두지 않았다는 불편함도 독서에 한 몫을 했다. 


이 책은 그의 저작을 정치학, 철학, 경제학의 세 장으로 나누었다. 저자도 그에 맞춰 셋이다. 그의 글을 연대기적으로 인용하고, 그 글에 대한 간단한 해석을 덧붙인다. 해석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이는 산발적으로나마 그의 텍스트를 접했거나 그에 대한 다양한 주해를 접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느끼는 편견일 수도 있다. 물론 그럼에도 철학 장의 난이도는 꽤 높은데 이는 청년헤겔학파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학 텍스트를 주로 접했던 나의 편식의 결과일 수도 있다.) 조금 고통스러운 구간들을 지나고 나면, 그 문장을 두고 벌어진 논쟁과 통상적인 오해들에 대한 짧은 평가가 덧붙고, 이것이 현재의 정세에 어떤 방식으로 달라붙을 수 있는지 평가하는 부분들이 이어진다. 그의 글이 가진 한계들은 명확히 지적을 받는다. 덕분에 독자는 그와의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그의 사유가 '형성'의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을 꾸준히 지적하는 부분은 이 책의 미덕이다. 그의 사유는 어느 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체계적으로 발전하긴 하지만 끊임없이 발전한다. 애초에 그때그때의 정치적 국면에 개입하기 위한 글들도 많고, 벌어진 사건을 해석하고자 하는 글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은 시대와 함께 공명하며 변한다. 예컨대 그의 국가론은 1871년 파리 코뮌의 경험 이전엔 무정부주의자의 조악한 판본에 가깝다.(그 이후에도 국가론은 없다시피 하다고 생각하지만) 완성된 '최후의'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은 없다. 그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 소위 '마르크스주의자'들 - 에게 보내는 비판의 글을 함께 읽다보면 그가 말년에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동시에, 그를 읽고 그를 활용하는 이들 역시 각자의 시대에 개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그의 주장이 '현재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혁명적' 변화를 추구하는 계층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이유다. 


책을 읽는 이들은 이 지면에 인용된 그의 글을 보며, 익숙한 마르크스와 낯선 마르크스를 함께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 책의 저자인 세 사람의 의견과 학술적 배경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덕에 이 책을 읽으며 그의 텍스트를 '다시' 읽는 과정에서 나 역시 두터워지고, 그 전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된다. 동시대의 철학, 경제학, 정치학과 대결하는 과정은, 독자들 역시 자기 사유의 뼈대를 찾아내기 위해 반복해야 할 과정일 것이다. 텍스트 그 자체보다, 그가 텍스트를 형성해내는 과정이 어쩌면 더욱 엄격하게 요구되어야 하는 덕목은 아닌가 싶다.


나는 그의 사유에서 세계의 분열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지울 수 없는 적대를 감지하고, 그것을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 정치를 사유하고, '계급'이라는 명쾌하지만 또한 그 경계면에서 끝내 흐려지는 매혹적인 대상을 우리에게 제공한 문제적인 그의 사유의 윤곽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참으로 흥미롭다. 그 즐거움이 다른 독자들에게도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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