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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Feb 01. 2023

가슴 뻐근한 헌책방 이야기  

230201

  "내 직업은 작은 헌책방의 주인이다. 표면적으로는 일단 그렇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고책을 사고파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책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 나는 책 찾기를 의뢰하는 손님에게 수수료 대신 책을 찾고 있는 사연을 받는다." - 9~10p


  윤성근의 책 <헌책방 기담 수집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방금 그의 이름을 적으면서 작가라는 칭호를 일부러 달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를 '책방지기'이자 '이야기 수집가'라고 소개해서다. 그는 먼 옛날 어딘가를 다녀온 모험가처럼 이야기 보따리를 푼다. 신화나 전설이나 민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재차 전하는 장돌뱅이와도 비슷하다. 작가랑 뭐가 다르냐고 하면 정확히는 모르겠다. 직관적으로 '이야기꾼'이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린달까.


  책을 팔고, 대가로 책에 얽힌 사연을 받는 사람이라니. 너무나 부러운 직업이다. 이걸 부러워하는 내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다. 생계를 꾸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어렵겠지. 실은 생계 운운하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 저이가 속한 전선에는 뛰어들 수 없는 몸이라고 봐야 한다. 태생이 글러먹은 것이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마음까지 부정할 필요 있을까? 몸바칠 순 없으나, 몸바친 이를 흠모할 만큼은 좋아한다. 그 마음으로 이런 글도 쓴 적이 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3/0000042955?sid=102


  다시 <헌책방 기담 수집가> 얘기를 해보자. 책 속 수십 편 이야기의 구성은 꽤 단촐하다. 누군가 그가 일하는 서점에 찾아오고, 그가 사연을 묻는다. 때로는 서지정보를 명확히 알고 쉽게 책을 찾지만, 사연자가 책 제목조차 모른 채 인상깊은 구절이나 표지 그림만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책이 뭔지 알아도 구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헌책방에 책을 찾으러 오는 손님은 대개 절판 등 사유로 구하기 어려운 책을 찾기 마련이니까.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책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책 스스로 나타나주어야 한다. 헌책방에서 일하다 보니 책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게 됐다. 어떤 책은,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책이라는 걸 아는데도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인데 며칠 만에 나타난다. 그건 어떠한 자연법칙이나 심리학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책이 제 의지로 사람을 찾아 오는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 17p


  헌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도 사업가다. 그는 헌책과 책방을 찾은 손님 사이에 그려지는 수요 공급 곡선을 문장으로 표현한다. 종종 온라인 알라딘 중고서점을 뒤적이고, 쉬는 날 헌책방을 하염없이 돌아다녀 본 사람이라면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분석이다. 나도 절판 등 이유로 구하기 힘들어진 책, 그래서 비싼 중고가에 거래되는 책을 보면 혹한다. 그렇게 사놓고는 팔아본 적 없어서 문제일 뿐. 장서가는 본디 합리적 경제주체가 아니다.


  헌책방은 책 속에 펼쳐진 끝없는 우주와 거기서 반짝이는 보물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심이 어지럽게 엉켜있는 비좁은 시장 골목과 같다. ... 헌책방은 특히 책도둑이 들끓는 곳이다. 절판된 책이 많기 때문이다. 찾는 사람이 많지만 판이 끊겨 다른 서점에서 살 수 없는 책은 정가보다 비싸게 팔린다. 수요가 많은 절판본은 보통 정가의 두세배 정도 값이 올라간다. 어떤 책은 열 배, 스무 배까지 껑충 뛰기도 한다. 191~192p


  윤성근의 서점을 찾는 손님들은 주로 오래된 판본을 찾는다. 절판된 경우가 많지만, 개정판이 있을 때도 과거의 특정 판본을 구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즘 다시 번역된 <롤리타>를 읽어봤는데 예전 그 느낌이 아니더라고요. 그때 읽었던 책이 줄 수 있는 감정의 울림이란, 다른 책에서는 찾을 수 없나봐요."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책은 다 같은 책이지만 꼭 만나야 하는 그때의 책이 있다. 그 책은 그냥 소설이 아니라 젊은 날의 추억, 사랑, 고민, 그리고 망설임과 선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 32p


  사람들이 책을 찾는 사연은 다양하다. 윤성근 '수집가'는 이렇게 쓴다. "책은 작가가 쓴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책을 찾는 사람들은 거기에 자기만의 사연을 덧입혀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23p)"

  사람들은 재밌게 읽은 책을 주로 찾지만, 돌아보니 기억에 남아 찾기도 한다. 전혀 읽지 않았다가 뒤늦게 떠올라 찾을 때도 있다. 발음이 뭉개진 늙은 조부모 대신 책을 찾아 나섰는데, 책이 아닌 사람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끝내 선물하지 못한 책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그 책을 마음에 담은 이를 보며 마음 아파한다. 반대로 재산에만 관심이 있고, 부친이 소중히 여겐 책은 짐짝 취급하는 자식도 세상에는 있다. 책과 독자가 맺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이 애틋하고도 깊다. 그만큼 많은 사연을 마주하고 오래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음악과 비슷해서 그 안에 한 가지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정해진 줄거리가 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읽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 책을 언제 읽었는지에 따라서 의미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내가 일하는 헌책방에 언제나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 이유도 그와 같다. 사람은 음악을 들으면서 여러가지 감상에 젖고, 그것이 자연스레 책와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책과 음악은 한 장소에서 만나 다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 25p


  하룻밤만에도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J씨는 그 책을 마저 읽는 데 4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책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 71p


  "제 생각엔 채고은님, 그러니까 어르신의 손녀 이름을 부르신 게 아닌가 싶어요." ...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름다운 한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수만권 책으로 가득 찬 서재와 바꿀만큼 소중했던 것이 아닐까. 105~106p


  기억이 흐릿한 책을 찾을 때는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추억을 말하도록 이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딱히 책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즈음 있었던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친구들 얘기를 하다 보면 갑자기 잊고 있던 책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일이 있다. - 109p


  "저는 아빠가 주신 그 책을 읽지 않았어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저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 후로 우리 집은 자주 이사를 했고 그런 와중에 아빠에게 받은 책이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그게 너무 후회되더라고요.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제가 아빠를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었을까요?" - 114p   


  두 사람과 한 권의 책. 이들은 운명이라는 끈으로 여전히 연결되어 지내는 게 아닐까? 그 끈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두 사람의 운명도 역시 끝은 아니다. 내가 오래된 책 다루는 일을 하며 얻은 여러 배움 중에 가장 깊이 의미를 새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에 책이 남아있는 한, 그 책과 함께한 사람들의 인연도 사라지지 않는다. - 235p


  "고등학교 때 읽은 책과 내용은 똑같은데, 왜 그렇게 전혀 다른 감정이 생긴 걸까요?"
  S씨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책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가 변했으니까요. 50년이라는 인생을 살다 보니 잔느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녀의 운명도 역시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고요. 소설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일생을 판단하려면 그 사람에게도 일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꽃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런 걸 자주 느낀답니다. 저도 처음엔 꽃이 예쁜 건 활짝 피었을 때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가엾다는 마음도 자주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알아요. 꽃은 싹트고 잎이 나오고 활짝 피어났다가 시들어 고개를 숙이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아름다운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내 인생에서 더는 싱싱한 젊음의 아름다움 같은 건 없겠지, 라고 생각했던 일을 깊이 반성했다. 아름다움이란 어떤 한 시기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한다면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 318~319p


  책과 상관 없이 써둔 문장도 좋다. 매끄러운 것을 떠나(문장이 조금 예스럽다) 통찰이 빛난다. 그가 쓴 문장이 아니어도 그렇다. 사연 속 내용 자체가 흥미로워서다.


  인연은 때로 책상 서랍 안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사진 한 장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크기로 남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히지 않는 삶의 한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영화로 치자면 잠깐만 비췄다 지나가는 아주 짧은 장면 말이다. 하지만 그 부분이 없다면 세 시간짜리 영화를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 없는, 그만큼 소중한 기억의 한 조각이 내게 있다. - 259p


  여행은 제아무리 탄탄하게 계획을 세우고 떠난다고 해도 실제로 그대로 되지 않는다. 예상 못했던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한참 머무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계획이 쓸모없어지는 이 순간이 여행의 진짜 재미라고 말한다. - 279p


  "석가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가 아는 걸 완벽하게 구현해놓지 않고 떠났습니다. 미완성인 채로 남겨놓은 것이지요. 루소 역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읽는 내내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S씨는 아이러니하게도 불교 경전이 아닌 루소의 책을 읽고 승려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 296p


  너무 인용을 많이 했나. 그래도 하나 더. 아니 둘 더. 책 좋아하는 이들이 가슴에 품을 만한 말이다. 두번째 인용은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서삼치"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책에 관한 세 가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가 책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이요, 둘째는 빌려달란다고 순순히 빌려주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빌린 책을 돌려주는 사람, 혹은 빌려준 책을 돌려받으려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이런 세 가지 어리석은 일을 한 번도 안해봤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책은 묘한 물건이다. 책은 사람을 똑똑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똑똑하게 살려면 약간 바보 같은 면이 있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준다. - 217p   


  가끔 귀한 삶의 깨달음을 얻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숙연해진다. 누군가에게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낡은 책 한 권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일생을 통해 찾은 소중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손님에게 받은 아름다운 삶의 가르침을 망음에 담고, 어디 있을지 모를 책 한 권을 찾아 길을 나선다. - 319p




아래는 윤성근을 인터뷰한 기사. 내가 쓴 건 아니지만... 이런 대목이 특히 흥미롭다.

  "윤 대표는 요즘 헌책에 적힌 메모를 모아 글을 쓰고 있다. 책 뒷면에 적힌 1995년 메모 하나가 재미있다. '이 책, 어느 인간에게 빌려주었는데, 또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모르겠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주문하다.' 그 옆에는 '도대체 주문을 언제 했는데… 이제 오다니'란 푸념이 적혀 있다."

  이건 내가 에세이로 쓴 소재와 같잖아! 이분 언젠가 꼭 만나봐야겠다.


https://naver.me/Ge51IO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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