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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Feb 03. 2023

삶을 위한 영어 공부

230202

  응용언어학자 김성우의 <단단한 영어 공부>를 읽었다. 몇 달 전 인상깊게 읽은 책인데, 불현듯 아침에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런데 도통 찾을 수가 없는 거다. 책장을 아무리 뒤져 봐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쌓아둔 책무더기를 뒤집어 봐도 없었다. 누구에게 빌려줬던가? 도서관처럼 대출 카드를 쓰지 않으니 손 떠나면 끝이다.

  시발, 시발 주절거리다가 '밀리의 서재' 앱을 켰다. 전자 기기로 책을 읽는 게 아무래도 익숙지 않아 평소에는 좀체 접속하지 않았는데 돈은 꾸준히 내고 있었다. 검색해 보니, 유레카. 오전에 짧게 읽고, 빠른 퇴근 후 후루룩 봤다. 한두시간이면 다 읽을 만큼 얇은 책이다.


사진 정보를 켜니, 22년 8월 촬영이라고 나온다


  짧지만 내용은 어설프지 않다. 영어 학습에 대한 저자의 철학이 듬뿍 묻어나는 책이다. 김성우는 서문에 이렇게 선언한다.


  성찰 없는 암기, 소통 없는 대화, 성장 없는 점수 향상을 넘어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영어공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영어를 '습득'의 관점에서 보는 행태가 저자는 불만이다. 익혀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소유의 개념 탓에 사람들이 영어를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유가 문제될 때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가졌는지, 남과 비교할 때 적은지 많은지를 두고 경쟁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학습'과 습득의 차이를 말한다. 학습은 내가 언어라는 파이를 떼어오는 행위보다는, 언어라는 세계에 뛰어든다는 감각에 가깝다.


  ‘합창의 기술을 습득한다’와 ‘합창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한다’라는 두 명제를 비교하면 ‘습득 vs 참여’로 표현되는 두 관점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전자는 단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기법을 하나하나 익혀 가는 것으로 합창을 파악하지만, 후자는 노래를 좋아해서 합창단에 들어가고 거기서 만난 이들과 친해지고 교류하며 함께 노래하는 활동을 합창으로 봅니다. 노래에 점수를 매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노래가 좋고 사람이 좋은 거니까요.
  합창 기술의 습득이 ‘완벽함’mastery에 중점을 둔다면,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는 일은 ‘누군가가 되는 일’becoming에 중점을 둡니다. 전자가 언어 습득의 목표를 네이티브 스피커로 본다면, 후자는 삶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둡니다.


  영어에 대해 한국인들이 가진 '콤플렉스'를 직시한다는 것이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이다. 영어 발음에 집착하는 풍토, 과거 R 발음을 잘 하기 위해 혀 밑둥까지 잘라냈다는 일화, 영어 이름을 지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저자는 권력 관계를 읽어낸다. '네이티브'에 대한 한국인의 환상은 가히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영어 세계의 최상층부엔 원어민이 있고, 학습자들은 네이티브에게 평가받아야하는 지위로 스스로를 격하한다. 그게 영어 학습하는 한국인들 대부분에게 내면화돼 있다.  결과 학습자들은 예문을 주워 섬기면서 자신을 잃어간다.


외국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한국어와 영어 모두 편하게 구사하지만 한국어 발음이 서툰 사람들이 ‘바이링궐’로 불리곤 합니다. 영어 발음의 후광이 강해서 한국어 발음의 어색함을 압도하는 것일까요? 그런 기준을 반대로 적용한다면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되 영어 발음이 조금 ‘서툰’ 사람들도 분명 바이링궐이잖아요? 아무래도 언어 능력을 판단할 때 영어에 가산점을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군요.


  아이가 영어 원어민을 자주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조마카 어머니의 견해를 100퍼센트 수용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친구들이나 교사가 자기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그때마다 ‘왜 내 이름을 제대로 못 부르지? 영어 이름을 만들어야 하나? 내 이름이 너무 우습게 들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의사소통을 하면서 심리적인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발음을 잘못하는 것은 그 이름을 발화하는 사람의 노력이나 상대를 대하는 태도, 언어 간 거리 등의 문제이지, 내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 모국어 화자가 발음하기 어려우니 당연히 영어 이름이 있어야 한다거나, 영어유치원에서는 반드시 영어 이름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의 이름, 나아가 서로 다른 언어의 권력관계에 대한 선입견을 은연중에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험서들은 이런 문제에 전략적으로 대비하라 외치며 “인턴 면접을 준비하느라 얼마 전에 정장과 셔츠를 샀다”든가 “1년에 서너 번 가는데 주로 록이나 힙합 공연이다” 같은 모범 답안을 정리해 줍니다.
  수험생들은 열심히 외웁니다. 외우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아니, 시험을 잘 보려면 외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문장을 자신의 상황에 맞게 고쳐 외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외우다 보니 있지도 않은 인터뷰, 사지도 않은 정장, 가지도 않은 여행 이야기를 하게 되고, 없던 동생이나 드론이 갑자기 생기기도 합니다. 관심도 없던 주제에 ‘확고한 자기 의견’이 생겨 버리고, 본의 아니게 ‘사소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충격받은 지점도 있다. 언어가 가진 사회적 맥락, 언어가 은폐하는 행위 주체 등에 관한 의문이다. 기사를 예로 들어보자. 행위 주체를 명시하려면 종종 더 많은 취재가 필요하다. '10억원 상당의 금괴가 도난당했다'는 문장보다는 'A가 10억원 상당의 금괴를 훔쳤다'는 글이 쓰기 어렵다. A의 행위임을 못박아 쓸 수 있으려면 그만한 정황 또는 증언, 물증을 얻어내야 한다. 한국어 문장을 읽을 때는 이따금 떠올렸는데, 영어 문장 앞에서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김성우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If I were a rich'라는 문장을 주된 예로 드는 교과서를 접할 때 학습자는 자연히 rich의 관점을 갖게 된다. 이런 예문은 많다. 반면 immigrant를 예시하는 문장은 거의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경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 사회의 언어 교습은 어떤 관점에서 이뤄지는가.


  clean을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공간이 깨끗하다는 것은 누군가가 청소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노동 없이 스스로 깨끗한 공간은 없습니다. 청결한 공항에는 청결함을 유지하는 공항 직원들이 있고, 쓰레기가 없는 환경에는 청소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먼지가 쌓이고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자연 법칙 속에서 질서와 청결을 유지하는 노동 없이 깨끗한 환경 속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시라는 공간에서 ‘깨끗한’이라는 형용사는 ‘깨끗하게 하다’라는 동사를 전제로 존재합니다. ‘깨끗하게 하다’라는 동사는 그런 상태로 만든 사람(주체)을 내포하므로, ‘깨끗’하다는 것은 ‘깨끗하게 하는’ 사람(청소노동자)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clean의 사회적 의미, 사회 속에서 깨끗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노동이라는 키워드에 닿게 됩니다.
  이처럼 clean이라는 단어를 배울 때는 단순히 형용사와 동사의 품사 구분을 아는 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깨끗한’clean 세계와 이 세계를 ‘깨끗하게 하는’to clean 사람을 연결해 생각할 수 있어야만 두 품사의 관계를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용사가 동사가 되는 것은 언어 현상이지만, 실제 세계에서 그 변환을 가능케 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 특히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입니다.
  그렇기에 “This place is so clean”(여기 정말 깨끗하다)이라는 문장은 “Someone must have cleaned this place”(누군가가 청소를 한 게 틀림없구나)라고 읽어 낼 수 있어야 하고, “This place is always clean”(여긴 늘 깨끗하네)이라는 문장은 “Someone must clean this place on a regular basis”(여기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사람이 있나 봐)라고 바꾸어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어휘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1) Many immigrants are deprived of their rights. (많은 이민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한다.)
(2) The current immigration laws deprive many immigrants of their rights. (현재의 이민법은 많은 이민자들에게서 권리를 박탈한다.)

  두 문장은 하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동태 문장 (1)에서는 ‘박탈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민자들의 현재 상태만 그려 냅니다. 하지만 능동태 문장 (2)에서는 이민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주체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현재의 이민법을 입안하고 가결한 사람들이 존재하겠지요.
  이 같은 분석을 통해 수동태라는 언어적 장치에서 인간이 경험적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능동태나 수동태를 선택하는 일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 즉 ‘수동태의 정치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휘와 문법을 가르칠 때는 언어적 설명을 넘어 사회문화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특정한 문법 현상이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쉬는지, 때로는 세계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휘와 문법 요소를 살피면서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을 학습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If I were a bird”(내가 새라면)나 “If I were a millionaire”(내가 백만장자라면)보다는 “If I were a Pakistani immigrant worker in South Korea”(내가 한국의 파키스탄 이주노동자라면)나 “If I were a Muslim refugee in the US”(내가 미국의 무슬림 난민이라면)가 예문으로 나오는 책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삶과 어휘와 문법을 엮어 내는 공부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언어도 결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익히는 도구에 불과하다. 낮잡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배운다는 행위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배운 언어로 무슨 말을 하고 글을 쓸 것인지 목적 의식을 잊어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종국에는 나의 이야기, 내가 보는 세상 이야기를 헤야 한다. 학습법을 접하려다, 뜻밖에 썩 괜찮은 사회 담론을 본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저자는 서문에 '삶을 위한 영어 공부'라는 말을 적어 두었다.


  삶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어떠해야 할까요. 여러가지 모양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어를 인생과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love의 과거형은 loved'라고 가르치기 보다는 'I love you'와 'I loved you' 사이의 심연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과 지나간 사랑을 반추하는 일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시제의 변화와 함께 달라져 버린 I와 you를, I와 you가 나누었던 love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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