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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Feb 03. 2023

자기잠식 자본주의

23.02.03. 낸시 프레이저,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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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팀으로 이동해서 정신이 없다. 몇 년 만에 영상을 보고, 수정하고, 평한다. 의심의 연속이지만, 널브러져 있을 상황은 아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해치워야 한다. 입술이 부풀어 터졌고, 마시던 찻잔에 핏방울이 튀겼다. 잠을 못 자는 것도 아닌데, 당분간은 이렇게 피흘리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제 저널에 60번째 글이 올라왔다. 느리지만 꾸준히 하고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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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퇴근하고 오니 핏방울처럼 붉은 양장본의 책이 집에 놓여 있었다. 이제 막 나온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였다. 원제는 식인 자본주의 (Cannibal Capitalism)로, 작년에 버소(Verso)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아주 빠르게 서해문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역자가 믿을만한 사람이라 의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적잖이 놀랄만한 속도였다. 놀라움을 뒤로 하고 일단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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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프레이저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사태의 근원이 '식인 자본주의'라고 한다. 왜 식인/자본주의일까? 'Cannibal'은 식인으로 주로 번역되지만, 자기잠식을 뜻하기도 한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사회/정치/자연의 토대를 좀먹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설명하기에 딱 맞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낸시 프레이저는 단순히 경제 시스템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이윤 주도 경제"가 작동에 필요한 "경제 외적 기둥"을 포식하도록 북돋는 사회 질서라고 본다.


다양한 영역에서 자본주의라는 사회 질서는 그 스스로를 지탱하는 토대를 잠식하고 있다. 그에 따라 다양한 장소에서 '경계투쟁'이 벌어진다. 돌봄, 이민, 에너지, 기후, 국가 권력처럼 '경제적인 것'의 경계면을 따라 다양한 장소에서 이 잠식에 저항하는 움직임들이 만들어진다. 프레이저가 보기에 경제 영역의 재편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경제 영역이 현재 제 살 깎아먹기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저 모든 형태의 부가 경제 영역과 맺는 관계 역시 재편해야만 한다. 즉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 사적 권력과 공적 권력의 관계,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야 한다. (p.23)


프레이저는 이 '식인 자본주의'라는 질병의 심층적, 구조적 토대를 다루는 개혁만이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 도처에서 발생하는 시위와 저항의 목소리에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게 그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지난 몇십 년 간 마르크스의 방법론에 충실한 '자본 비판'의 전통은 단절되었고, 간신히 이어지는 전통 속에서 소위 '신사회운동'(계급 이외의 정체성 정치)은 제대로 소화되지 않았다.


우리가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위기를 명쾌히 정리해주는 비판이론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방의 해법으로 인도할 이론이 없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p.29)


이러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후, 자신의 '식인 자본주의' 이론을 설명하고자 마르크스의 <자본> 1권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생산-노동을 특권화하는 이론 모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먼저 그러한 모델 속에서 구출해낼 것은 없는지 확인해보는 거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다.


1)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 공유 자원이 사유화되면서 토지에서 쫓겨난 농노들은 도시로 몰려와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팔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

2) 자유로운 노동시장 : 이 프롤레타리아는 신분적 제약이나 주인이 없는 자유로운 존재지만, 동시에 토지나 기타 공유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로운(박탈된) 존재로 노동 시장에 던져진다.

3) 자본이라는 자기 확장적 가치 : 이 시스템의 주인공은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 그 자체인데,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도 자본의 축적이라는 목적에 자신의 행동이 종속된다.

4) 시장의 역할 : 시장은 생산요소를 투입해 상품을 생산(상품에 의한 상품 생산)하며, 사회 잉여의 투자처를 결정한다. 사회의 잉여를 어디에 투입할 지 결정하는 일은,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인데 이를 자본주의 사회에선 시장에게 전적으로 맡긴다. 시장은 공동체의 미래보단 자본의 축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부합하는 시스템이다.


여기에 낸시 프레이저는 '감춰진 장소'를 덧붙인다. 그는 시장이 모든 영역을 잠식하고 모든 요소들이 상품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은, 시장에서의 '착취'보다 비-시장영역에서의 '수탈'이 더 잉여 축적에 효과적이라는 부분을 간과한 것임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반(半)-프롤레타리아화'된 가계가 자본주의 사회 질서를 효과적으로 지탱한다고 본다.


반-프롤레타리아화된 가계란 이런 거다. 가족 구성원 일부는 임금노동자로 노동 시장에 참여하여 임금을 받으며 '착취'당하고, 그 임금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한 나머지 구성원들의 노동을 시장에 편입되지 않는 무급 노동으로 판단하여 '수탈'하는 것. 낸시 프레이저는 이를 '원시 축적'이라 부른다.


원시 축적은 최초의 자본 형성 시기에 1회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은폐되는 '감춰진 장소'다. 노동자는 영원히 일할 수 없고, 쉬고, 재충전해야 한다. 그래야 자식도 낳고 세대를 잇는다. 재생산은 생산의 숨겨진 기본 조건인데, 이 재생산 활동의 대부분은 시장 바깥에서 이루어지며, 재생산 노동은 비임금 노동이다. 재생산 노동 없는 임금노동자는 존속할 수 없고, 임금노동자 없는 임금노동은 어불성설이다.


생산과 재생산의 분할은 자본주의 고유의 분할이다. 특히 이 생산/재생산의 분할은 젠더화되어 재생산 노동은 사적 가정의 영역으로 유폐되고, 화폐로 매개되지 않는 노동으로 평가 절하되는 과정을 거쳐 여성 종속의 근대 자본주의적 형태가 결정되었다. "여자는 집에서 애나 봐야 한다, 왜냐하면 돈 많이 버는 남자는 다시 일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는 문장은 이 젠더화된 분할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위기, 그러니까 자본 축적의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자본은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비-경제적 영역에 대한 수탈을 심화시켰다. 참정권을 부여하고, 임금을 올리는 방식으로 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의 향상도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핵심적인 비-경제적 영역(돌봄노동과 같은)은 계속해서 무급의 형태로 남아 끊임없는 수탈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제살 깎아먹기의 역사라는 게 프레이저의 진단이다.


돌봄노동뿐일까? 자본의 자원이 되는 것은 자연도 마찬가지다. 무상의 자원이라 생각했지만 자연의 회복력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는 점차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탄소배출권의 거래만 활성화시키는 등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보려 하지는 않고 있다.


자본은 국가 없이는 자신의 축적에 방해가 되는 사회적 힘을 제어할 수 없지만, 또 자본은 국가가 축적에 방해가 될 때 국가 고유의 권한인 주권을 포기하길 요구한다. 국가는 자본 축적을 조장하고 그에 수반되는 사회적 저항을 무력화하면서도, 최종적으로 자신이 자본 축적의 최대 걸림돌임을 모르는 듯이 작동한다. 자본의 요구 앞에서 국가는 분열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기에, 여기에도 자본 축적의 위기가 일어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또한 생산계층 역시 일한 만큼 받는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착취를 당하는 계급과, 아예 정치적 보호의 바깥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수탈 당하는 계급으로 구분된다. 전자의 노동자들은 '우리'의 범주에 들지만, 후자는 '타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어떠한 보호 없이, 다양한 형태로 자본 축적의 도구가 된다.


예컨대 자본은 수탈한 땅, 강제 노동, 광물 약탈품을 획득하고 소유하기 위해 공적 권력에 기대고(일국적이든 초국적이든), 독성 폐기물 처리장과 무급 돌봄 활동 공급자로서 인종화된 지역에 의존하며, 정치 위기를 진정(또는 치환)시키거나 아니면 오히려 조장하기 위해 지위 분할과 인종적 원한에 호소한다. 한마디로 경제, 생태, 사회, 정치 위기는 제국주의적, 인종적 억압과 긴밀히 얽혀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억압과 결합해 점증하고 있는 적대와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P.54)


물론 위기의 시기에는 '비경제적' 영역이 자본 축적에 핵심적인 경제적 관행들에 저항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본주의 질서의 불가결한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단순한 '탈주'로는 문제 해결이 요원하다는 게 프레이저의 주장이다.


1장에 대한 정리를 간단히 하면 이렇다.


1) 자본주의의 비경제적 영역은 자본주의 경제 영역을 굴러가게 만드는 배경 조건이며, 자본주의 경제 영역의 존립은 자본주의의 비경제적 영역에서 나오는 가치와 투입 요소에 의존한다.

2) 자본주의의 비경제적 영역들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에 자원을 제공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에 독립적인 외부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결부된 영역이다.

3) 자본의 무한한 축적 경향은 자기 자신의 존립 조건을 침식하여 자본주의 자체의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가 된다.


이 정리를 바탕으로 2장에서부터는 자본주의의 비경제적 영역들이 경제적 영역들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맺어져 있는지 확인하고(2-5장), 6장에서는 '사회주의'의 재발명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반자본주의 대안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려고 한다. 당분간은 바쁘긴 하겠지만 나 역시 읽으며 내용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번역서의 원제가 <좌파의 길>이 된 이유를 책을 읽으며 가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노학자의 치열한 고민이, 내게 조금이나마 영감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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