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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Feb 11. 2023

'돌봄'을 약탈하기

23.02.11. 낸시 프레이저 - 좌파의 길 2

어째 <피투자자의 시간>만 보이는 거 같지만 확실히 <좌파의 길>이 토대의 자리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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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을 읽고 정신이 없어서 내버려 두었다가 어제 내리 2-3장을 읽었다. 전반적 논의 자체는 이미 1장에 설명이 다 되어 있고, 2-4장은 그 수탈의 대상으로서 인종-젠더-자연이라는 세 차원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어서, 크게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5장은 정치, 6장은 대안으로서 사회주의(이 글은 이전에 플랫폼C에 번역되어 게시된 적이 있는데, 지금은 내려간 상태고, 이 책에 실린 글은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있다)를 이야기하고 있어서 결이 살짝 다른 듯하다. 따로 자세히 읽어보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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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의 '돌봄' 부분은 그간 내가 놓치고 있던 '재생산'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좀 더 면밀히 읽었다. 임금노동자는 인간이기에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해서라도, 임금노동자는 내일 다시 일하러 나와야 한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역사는 임금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얼마만큼 착취하고, 얼마만큼 내버려둘 것인지에 대한 힘겨루기의 역사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임금노동자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생산의 필수 조건이다. 육아, 가사, 교육, 정서적 돌봄, 문화 향유 등 다양한 '재생산' 노동이 없이는, 임금노동자는 다음날 사업장에 출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재생산 노동은 마치 자연스럽게 제공되는 것처럼,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시야에서 사라진다. 낸시 프레이저는 그간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재생산 노동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경제적 수탈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젠더화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초창기 자본주의의 착취는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가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빈곤 계급의 재생산 위기를 초래했다. 또한 모두가 일을 나가면 대체 가사는 누가 하냐는, 중간계급 내부의 '도덕적' 불만도 거세졌다. 사회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은 여성과 아동노동의 제한을 통한 사회적 재생산의 안정화, 그리고 가부장의 임금으로 생계를 책임지고(가족임금) 그 가부장의 재생산에 가족 구성원이 종속되는 근대적 형태의 가족의 발명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지속된 30년간의 기간 동안, 국가와 기업은 자신의 역량을 사회적 재생산을 공적으로 책임지는 데 투입했다. 혁명의 가능성을 제한할 필요가 정치-경제 영역의 엘리트들에게 있었고, 그러려면 노동자들의 삶을 안정화시키고 자본주의 체제에 이해관계가 있도록 연루시켜야 했다. 이윤을 분배하고, 복지가 확대되는 이유였다. 노동 계급의 소비력의 증가는 대량생산된 생활용품의 안정된 수요로 이어졌다. 민주주의 정치는 이러한 협약을 공고화하고, 노동계급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프레이저는 식민지 모국인 선진국이 피식민 국가로부터 수탈을 중단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선진국의 안정적인 황금기는 개발도상국의 자원과 자산에 대한 수탈과 착취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1980년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포드주의의 위기와 맞물려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국가와 기업은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에 대한 투자를 거두고, 이 영역을 가족과 공동체의 몫으로 떠넘겼다.


떠넘김의 과정은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활발하게 이끌어내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오래된 페미니즘의 과제지만, 자본이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아니다. 복지의 축소를 메꾸기 위해 가족 구성원이 한 명 더 임금노동 체계로 편입되어야 했을 뿐이다. '맞벌이' 와중에도 가사노동과 육아 등 다양한 형태의 재생산 노동이 젠더화된 상태에서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면 오해가 덜할 것이다.


만약 맞벌이로 인해 가사 노동이 불가능해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럴 땐 제3세계의 여성 노동자를 '수입'한다. 오세훈 시장이 외국인 육아 도우미 이야기를 꺼낸 것은 (링크) 그 점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사고 과정이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모순적인 사유는 이곳에서 발생한다. 근본적인 자본의 유인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오로지 맞벌이라는 현상에서 해방의 가능성만을 바라보면, 여전히 자본이 재생산 노동을 수탈하고, 젠더화하고, 외부화하는 데 별다른 의견이 없게 된다. 


그럼 대안이 뭔가? 그건 당장 제시하지 않는다. 6장에서 제시가 될까? 현재로선 의문스럽다. 돌봄 노동에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고, 그렇다고 가부장제로 돌아가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여전히 가부장과 시장화의 양극단 사이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파울로 제르바우도가 대항 헤게모니 형성에 난점으로 지적한 '보수적 노동자'들과의 갈등을 떠올려보라. 그들과 '함께'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전략은 뭔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뭔가? 그리고 함께 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내 짧은 생각으로는 '대항 헤게모니'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은 그 헤게모니 형성의 형식적 측면을 정교화하는 데에 집중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부분들인 전략, 자원, 주체에 대해선 조금 덜 중요하게 다루는 것처럼 느낀다. 파울로 제르바우도의 <거대한 반격>이 그나마 '주체'의 영역과 '전략'의 영역에 대해 고민이 조금 담겨 있다는 생각인데 여전히 아쉬운 부분들이 있기도 하고...


혁명적 전환이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닐테고, 그렇다면 대항 헤게모니의 장기적인 지속을 위해서라도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인 정세에서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 서로 이해가 상충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운동을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한 분석이 분명히 필요한데, 이런 부분들에 대해 얼마만큼 공을 들이는지가 요새 독서하는 정치(철학)자들에 대한 나의 관심사다. 이번 책이 그 부분에 대해 얼마만큼의 충족감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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