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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Feb 15. 2023

'분투형 플레이'가 뭐요?

23.02.15. C. 티 응우옌 - 게임 : 행위성의 예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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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라는 것이 정말 의미 있는 행위인가? 그 시간에 다른 걸 하는 게 낫지 않나? 특히나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겹게도, 게임같은 걸 할 바에 사람들을 만나고, 게임을 할 바엔 공부를 하고... 등등 게임을 다른 사회적 행위들과 비교해서 뭔가 열등한 행위라고 낙인찍는 데 익숙하다. 반대로 게임을 의미 있는 행위라고 올려치는 경우에도 그것을 일상적인 자기 계발의 행위들과 연결짓는 데 익숙하다. 게임을 하면 어떤 능력이 더 나아진다, 가령 판단력이, 민첩성이 등등. 그러니까 게임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모두 안 하고 있는 것이다.


응우옌은 게임이 가진 고유한 가치가 있고 그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독자적인 예술의 형식이다. 결정하고, 행위하는 능력과 관계하기에 고유한 예술이며, 동시에 실천적 활동이다. 우리는 게임 속에서 디자이너가 제시한 목표들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제시한 능력과 제약의 집합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며 흥미를 느낀다. 


예컨대 이런 건데, 둠 게임을 하면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받아들인다. '둠가이가 되어 지옥의 괴물들을 죽이십시오.' 이런 목적이... 보통은 일상 생활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둠의 개발자들이 제공한 능력과, 그들이 설정한 한계 안에서 어떻게든 움직이면서 - 게임에 참여하면서 -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즐거워한다. 대체 왜 이런 걸 하고 있나?


일상 세계에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던져대는 모든 것들에 대응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닥치는 대로 동원하여 싸워야"하고 "무심하고 제멋대로인 세계"가 강제로 정해주는 방식에 따라야 한다. 일상 생활의 가치는 "대부분 보편적이며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 흥미가 없다. 반대로 게임은 일시적으로 목표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 속에서 고투하는 과정을 흥미롭고 아름답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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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슈츠Bernard Suits의 게임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응우옌은 논의를 시작한다. 게임이라는 것은 기술적 활동, 그러니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도달하려는 활동과 다르다는 거다. 오히려 게임 안에서 우리는 특정한 목표를 특정한 비효율성 안에서만 성취하려 한다. 그래야만 가치가 있다. 축구는 '손'을 쓰지 않고 공을 골대 안으로 넣어야 한다는 우스꽝스러운 제약이 있기 때문에, 골을 넣는 행위가 즐거울 수 있다. 


여기서 게임의 목표와 플레이의 목적은 구분된다. 목표는 게임을 하면서 겨냥하는 결과다. 골을 더 많이 넣는다는지, 가장 먼저 결승선에 도착한다든지 하는 게 목표(goals)라면, 목적(purpose)은 게임을 하는 이유다. 즐겁든지, 운동의 일환이든지, 스트레스를 풀든지, 타인에게 과시하든지 등등. 


목표와 목적이 동일한 사람도 있고, 목표가 달성되면 목적의 달성이 뒤따르는 경우도 있다. 한데 목표와 목적이 어긋나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마리오 파티를 생각하자. 이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목표고, 목적은 즐기는 것일 때, 꼭 목표를 달성해야만 목적도 달성되는 건 아니다. 그런 게임에서 보통 이기려고 용쓰는 사람은 민폐 캐릭터가 된다. 친교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승리라는 목표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 


응우옌은 승리를 위해서 하는 플레이를 '성취형 플레이'라고 부른다. 여기엔 목표와 목적이 동일하다. 고투를 맛보기 위해 승리를 추구하는 '분투형 플레이'는 목표와 목적이 어긋난다. 이들은 고투를 맛보기 위해 승리에 잠깐 관심을 둘 뿐이다. 응우옌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은 이 '분투형 플레이'다. 이기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며, 이기는 것은 잠깐의 문제일 뿐 진짜 관심은 그 과정에서 다시금 '고투'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올드 게임을 반복하는 나같은 사람이 왜 이런 게임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나는 왜 십여 년 전부터 무조건 이길 수 있는 게임을 왜 반복하고 있는가? 애초에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게임 디자이너가 고안한 제한된 세계에서 이기기 위해 이런 저런 방법들을 '실험'해보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면... 이런 것 아닐까?


그러한 고투는 특별한 미적인 요소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예술이라는 것인데, 나의 신중함과 우아함의 경험들이나, 근사한 수싸움이나, 자신의 능력과 주어진 과제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조화와 같은 미적 경험들은 분투형 플레이를 통해 얻을 수 있다. 게임은 우리의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과제가 주어지는 현실과 달리,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적당한 능력과 이를 활용해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의 경험을 농축하여 제시한다.


게임 디자인의 성공과 실패는 이 능력과 장애물, 그리고 목표를 적절하게 디자이너가 제시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그리하여 플레이어에게 특수한 고투의 형식을 제안하고,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일시적인 행위성, 그리고 그가 맞서 싸울 환경 모두를 제작한다. 이것이 '게임 = 행위성의 예술'이라는 제목의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까지 이어지는 논변을 이해하려면, 뒤에 이어질 장을 읽어야겠지만.


게임이 행위성을 매체로 삼아 작동하기에, 우리는 게임을 통해 여러가지 행위성의 형식을 기록하고 전파하고 습득할 수 있다. 응우옌은 게임은 기술을 넘어서는 '행위적 정신 자세', 특정 종류의 관심과 특정 능력들의 조합을 가르칠 수 있다고 본다. 동시에 일상의 팍팍함을 벗어난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게임 속에서 우리 스스로 목표, 능력, 세계를 골라 잡는다. 이것은 장점이자 단점인데, 게임은 도덕적 명료성이라는 환상으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다. (세상은 그렇게 명료하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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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1장에서 전개한 논변을 나머지 9개의 장에서 심화 발전시키고 있는데, 1장의 논변 자체가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 꽤 흥미롭게 읽힌다.  '행위성'이라는 개념을 타인에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면 나도 이 장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지금은 일단 직관적인 동의만.


"어떤 목표들을 잠시 동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 목표의 달성을 정말 원해서가 아니라 그저 특정 종류의 고투를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리오 파티 게임을 하면서 상대방을 이겨먹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얼마나 밥맛인가. 하지만 나를 이길 마음도 없다면? 그것도 엿같지.


진심을 다해 승리를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적이 아닌 플레이를 응우옌은 '분투형 플레이'라고 부른다.  분투형 플레이어는 목표를 위해 수단을 취하는 게 아니라, 수단을 위해 목표를 임시로 인정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고투를 반복하며 여기서 오는 '미적 경험'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슈츠는 게임이란 전-유희적 목표(공을 림에 통과시키기)를 필수적 규칙(~을 하지 않으면서)에 따라서 추구하여 유희적 목표(점수 내기)를 달성하는 것이라 말한다. 유희적 목표를 달성하려면 규칙도 따라야 하지만 전-유희적 목표도 달성해야 한다.


제약을 통해서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만이, 그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애쓰는 활동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이 슈츠가 말하는 '유희적 태도'다. 일정한 비효율 아래에서만 우리는 '고투'할 수 있다. 다소 바보같지만, 그게 아니면 게임은 '재미가 없다'. 


예컨대 축구가 재미있는 것은 골을 넣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제약하고 신체의 가장 섬세한 부위인 '손' 이외 부위로만 공을 운반하고 골을 넣도록 강제하는 규칙 아래에서 골을 넣어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행위들은 악전고투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다고 축구를 아름답자고 하는 건 아니고... 프로 축구는 분명한 성취형 플레이지만, 회사 사람들과 함께 야간에 즐기는 축구는 분투형 플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슈츠, 응우옌의 성취형/분투형 플레이의 구별은 게임의 동기를 탐색할 상이한 차원들을 찾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것이다. 


여하간 이 '일회용 목표',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수용했다가 별 무리 없이 버릴 수 있는 목표라는 게 중요하다. 게임이라는 영역에서는 새로운 동기를 장착했다가, 그 영역을 떠나면 내려놓을 수 있다. 그 동기가 일시적이라도 있어야지, 없으면 게임은 '대체 왜 즐거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된다.


그러나 또한 일시적이어야 하는데, 계속 상대방을 이기는 데에만 집중하다가는 나는 상대방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나 안해!" 마리오 파티에서 5연승을 했을 때, 나는 그 소리를 들었고 한동안 아내와 함께 스위치를 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여야 했다...


그런데 나는 패배하기 위해서 게임을 하나? 어쨌든 이기기 위해서 게임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승리가 게임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 상대를 무자비하게 압도할 수 있게 연마해봤자 그도 재미없고, 나도 재미가 없다. 중요한 건 아슬아슬함이다. 이기는 건 부차적일 수도 있다.


응우옌은 '성취형' 플레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분투형' 플레이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최선을 다해서 이기려고 하는데, 정작 이기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동기를 가진 플레이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러한 플레이를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 '승리'가 가짜여서도 안된다. 최소한 이게 최종 목표와도 같은 '현상적' 지위는 일시적으로나마 차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게임에 몰입하고, 흥분할 수 있고, 분투할 수 있다. 몰입이 안 되면, 멀찍이 떨어져서 '이건 그냥 시간낭비일 뿐이야'라고 되뇌이게 된다. 즐거울 수도 없다.


애초에 게임이라는 게 명료하고 측정 가능한 단일 목표를 온 마음을 다해서 추구하는 활동이라면(이 세계는 그런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기에 세계로부터 물러나야 한다), 승리를 가짜로 여기도 관조하는 방식으로는 게임을 '즐기는' 것이 불가능할 테다. 금방 지루해질 것이고.


그리고 인간은 새로운 역할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관심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역량에 집중할 수 있다. 게임은 이 과정을 아주 빠르게 진행할 수 있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차용했다가 버릴 수 있는 장난감과 같다. 예컨대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을 생각해 보라. 게임은 매일 부과되고, 규칙과 역할 은 매번 바뀐다. 그럼에도 무리없이 출연자들은 이를 수용하고, 즐기고, 다시 빠져나온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응우옌의 주장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빠르게 특정한 '행위성'을 유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과정에서 미적 경험이나 즐거움을 느낀다는 거다.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할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런 방식으로 '분투형 플레이'라는 복잡한 동기 구조를 가진 게임 플레이 방식을 탐구하고, 이것을 행하는 이유, 이것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탐색하는 과정이 뒤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재밌긴 한데 혼자 읽을라니 꽤 벅차긴 하다...


여튼 게임이라는 인간의 관행을 예술로 볼 수 있는 가장 정당한 근거가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라는 게임에 고유한 감상 활동이라는 점을 어떻게 정당화할 지 좀 기대가 되는 부분이 있다. 게임으로서 특정한 행위성을 체험하고, 배우고, 전파할 수 있다면, 이것도 예술인 것이니까.


디자이너가 게임에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행위성을 담아 전달하면, 우리는 플레이를 통해 이를 수행하고 배운다. 게임 예술의 매체는 '행위성'이라는 건데, 이 '행위성'이라는 것을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며 더 명료하게 받아들일 수 있냐 아니냐가 독서의 성패를 좌우할 것 같다는 느낌이... 일단은 계속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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