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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Feb 16. 2023

장강명이라는 이상한 소설가

230215

  요며칠 장강명 작가의 신간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읽었다. 직전엔 정치학자 이언 샤피로가 예일대 교수 동지인 프랜시스 로젠블루스와 공저한 <책임정당>을 봤는데 브런치에 적지를 못했다. 보고 읽은 콘텐츠를 조금이라도 기록해두자는 게 이 코너를 만든 당초 취지였는데 벌써 퇴색된 느낌이다. 영화 <물랑루즈>, <시카고>, <나를 차버린 스파이>, <런어웨이 브라이드>, <지랄발광 17세>를 최근 봤고, 물랑루즈는 뮤지컬로도 관람했다. 언제 정리할까 알 수 없지만 이름이라도 일단 써둔다.

  장 작가의 신간 중 일단 눈에 들어온 대목은 출판사 '창비'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장 작가는 이번 책을 창비의 자회사 '미디어창비'에서 낼 계획이었는데, 중간에 일이 생겨 '유유히'라는 신출내기 출판사에서 출간하게 됐다. '신경숙(작가)의 표절을 창비가 궤변으로 옹호하며 표절 기준을 무너뜨리려 한'이라는 장 작가의 서술에 대해 창비 측이 수정을 요구했는데, 장 작가가 이를 '부당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아 갈등이 생겼다. 여기까지는 지난달 2일 공개된 팟캐스트에서 소개된 내용이다. 책에는 조금 더 자세한 배경 설명이 실려 있다.



  구체적으로 수정 요청을 받았다. '궤변으로'라는 표현을 '나름의 논리로'로 바꾸고, 문단에 '(물론 신경숙 표절에 대해 창비와 나의 입장은 다르다'라는 문장을 덧붙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정 작업에서 편집부와 저자 사이에 오가는 정상적인 대화 내용도, 방식도 아니다.
  ... ⓐ신경숙 작가의 표절 여부는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고 장강명의 주관적인 주장일 뿐이며 ⓑ창비는 신경숙 작가가 표절을 저질렀다고 보지 않으며 ⓒ그러한 창비의 관점에도 일리가 있다는 소리를 내 책에, 내가 하는 말인 것처럼 써 달라고? 앞으로 출판사가 요구하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고 나의 주관적인 주장일 뿐이며 지구평면설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음을 밝힌다’ 따위의 문장을 덧붙이는 데에도 동의해야 할까.
  ... 미디어창비의 간부는 내 말이 옳다며 해당 문구를 고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걸로 일이 해결된 줄 알았다. ... 거의 한달이 지나 에디터리 편집자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마케팅팀 부장으로부터 '창비 이름으로 된 플랫폼에서 장강명 책 홍보하지 마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걸, 담당 편집자는 모르는 사이 이런 회의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라고 했다.
  나는 에디터리 편집자 만큼 분노하거나 배신감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나의 감정적 반응은 허탈함과 가소로움이었다." -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중


  이것은 기사거리 아닌가. 생각하고 찾아보니 오늘 문화부 선배가 기사로 썼더라. 선배는 장 작가의 말을 더 상세히 전했다.


  장씨는 “요사스러운 용어들을 덜어내고 일상 언어로 다시 쓰자면 이런 얘기”라며 이렇게 비유했다. ‘문장은 정말이지 비슷한데 신 작가가 베끼는 모습을 네가 보지는 못했잖아, 천문학적인 확률로 우연히 이렇게 된 걸 수도 있지. 그러니까 표절이라고 할 순 없어.’
  장씨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어느 누구의 표절에 대해서도 표절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누구든 바로 그 천문학적인 확률을 주장하면 되니까. 글쓴이의 의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사실상 표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진다”고 했다.
  장씨는 음주운전 여부를 가릴 때 “물인 줄 알고 마셨는데 그게 소주였나 보네요”라는 운전자의 말보다 ‘혈중알코올농도’로 판단한다며 “ ‘수치적으로 취기가 있다는 사실에는 합의할 수 있으나 의도적으로 술을 마시고 운전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장씨는 창비가 이 규칙을 무너뜨리려 했다고 말한다. “프로스포츠 선수가 반칙을 했는데 구단이 나서서 ‘그건 반칙이 아니다’라고 나선 격”이라고 했다. “업계에 영향력이 큰 구단이 그 영향력을 나쁘게 행사하려 든 만큼 더 크게 비판받아야 한다”고도 했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302141008001


  찾아보니 장 작가가 이번에 책을 낸 출판사 '유유히'는, 담당 편집자 이지은씨가 회사를 관두고 차린 1인 출판사라고 한다. 참, 별 일이 다 있다.




  장 작가를 평소 흠모하진 않았다. 흡인력있는 이야기를 간결한 문장으로 쓰는 데다 나름의 사회의식까지 갖춘 작가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쉬웠다. '나름의'가 문제였다. 그는 과거 tvN 프로그램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한스 로슬링의 책 <팩트풀니스>를 다루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재해로 사망하고 4백만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무사히 귀가하면 언론은 무조건 전자만 보도하게 돼 있다." tvN이 꼽은 해당 방송 영상의 캐치프레이즈는 "언론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였다.

  단편집 <산 자들>에도 갸우뚱한 대목이 있었다. 생산성이 악화돼 폐업 위기에 몰린 공장이 큰 폭의 정리해고 계획을 알린다. 해고 대상으로 거론된 노동자들은 무력으로 공장을 점거한다. 회사가 파업으로 진짜 폐업할 상황이 되자, 대상에서 빠진 직원들은 한때 동료였던 해고대상자들에 맞서 싸움을 벌인다. 장 작가는 회사 대표와 해고 대상자, 해고 대상 목록에 오르지 않은 자의 입장을 고루 보여준다. 이들 모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 작가는 동시에 이들을 나름 부패하고 나름 모순된 존재들로 그린다. 누구 하나의 손을 섣불리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공정하고 균형잡힌 태도처럼 보이지만, 정말 그런가?


https://m.youtube.com/watch?v=yJ4f8tsE9J8&feature=share




  이 책을 읽으면서는 조금 인상이 바뀌었다. 며칠 동안 같은 책을 읽었다고 앞에 썼다. 글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장 작가의 평소 글, 소설처럼 쭉쭉 읽힌다. 그럼에도 오래 본 건, 그의 생각이 인상적이어서다. 곰곰 생각해볼 만한 주장이 쉬운 글에 담겨 있다.


  아파트에서 정해준 흡연 구역이 너무 멀고 겨울에 외투 차려입고 거기까지 가는 게 귀찮아서 결국 끊었다. 더러운 구석에 패배한 얼굴로 모인 흡연 동료들을 보고 있자면 기분도 가라앉았고. 혐연권이 흡연권보다 훨씬 중요한 권리임을 알고 존중하지만, 금연 캠페인도 활발히 벌여야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국 사회가 흡연자를 너무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한다. 오염 물질 배출로 따지면 자가용 운전자가 더 비난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장 작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기 일이라 해서 특별히 더 민감하지 않고, 모두가 공감하는 구호라고 해서 덩달아 흥분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등 정부기관의 지원사업에서 배제당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며 그는 이렇게 썼다. 자신의 작품을 향한 비평에 대해서는 저렇게.


  “영혼을 말살하는 행위”(더불어민주당 대변인)라든가 “문학의 존재 근거를 흔드는 것”(한국작가회의 대변인) 같은 말을 들으면 좀 머쓱했다. 그대로 넘기면 결코 안 되는 불의이고, 그런 표현이 나온 앞뒤 맥락도 있지만, 그래도 머쓱하다. 내 영혼은 아직 멀쩡하다.
  ... 시 쓰고 소설 짓는 자들에게 설사 벌금을 매기더라도 한국문학이 궤멸하지는 않는다. 그게 문학의 힘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너의 글은 문학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다. 정 신경이 쓰이면 그런 비판을 하는 이에게 '문학이 뭔데요?'하고 역으로 물어볼까나. 그가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문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뭐가 문학적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시나요?'하고 다시 물어야지. 그가 뭐라고 답을 한다면 '그건 당신의 문학이죠'라고 대꾸하고 그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 걸작들의 예를 들면 될 테고.


  신문기자 경험을 토대로 '구조'를 얘기한 장이 인상깊었다. 애매한 개념인 '구조'가 장 작가의 주장 안에서는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문학장에서 다루지 않는 소재에 대해 그가 던지는 질문도 꽤 강렬했다. 종사자들에게 동의받기 힘든 주장일 것으로 예상됐고, 나도 전적으로 수긍하지는 못하겠다. 장 작가의 비유를 빌리자면, 자기력선을 충실하게 그려내면서도 힘의 근원인 자석에 대해, 자석을 그러한 모양으로 놓아둔 외력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아서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주장을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많은 언론사가 어째서 그때까지 다문화 가정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외압이 있었나? 취재하기가 어려웠나? 아니면 기자들에게 인종차별적인 편견이 있었을까? 나는 내가 몸담았던 시스템, 언론사의 정보 수집 구조 자체가 문제였다고 본다.
   ... 상당수 독자가 '한국 소설에는 유난히 대학 시간강사와 출판사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창작자들의 이력이나 활동 반경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또 나는 한국 소설에서 부유층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드물다고 느끼는데, 이는 한국 소설가의 소득 수준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한국 현대 소설을 읽다가 회사 생활을 그리는 대목에서 맥이 풀린 적이 몇 번 있다. 줄곧 치밀한 서술을 이어가다가 업무 내용이나 조직 내 인간관계를 다룰 때 갑자기 묘사가 성기고 거칠어지면 작품은 미학적으로 덜컹거린다. 이런 회사가 어디 있나 싶을 지경이면 몰입이 어렵다. 갈등 주체 중 한쪽의 사연이 생략되면 주제에 힘이 실리지 않으며, 윤리적으로도 위태롭다.
  ... 한국문학장의 관심사가 특정 영역에 치우쳐 있지는 않은가? 한국의 자영업자가 700만명이고 대부분이 고사 직전이라는데 그런 현실으니 한국 소설에서 충분히 재현되는가? 자영업자 문제가 성소수자 이슈만큼 한국문학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가(이는 한국문학이 성소수자 이슈에 대한 관심을 줄여야 한다는 의미가 절대 아님을 밝혀둔다)? 한국문학은 남한 정부의 공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자세로 북한 인권에 대해서도 언급하는가?


  내가 만약 아부그라이브 수용소를 소설로 재현한다면 나는 철가루가 아니라 자기력선을 묘사하는 방향을 택할 것 같다. 그래야 이 참혹한 인간성 상실을 일으킨 진짜 원인인 자석의 위치와 형태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향을 택한다면 나는 아마 교도관들이 하루에 몇시간을 일하고 자는지, 무엇을 먹는지, 어디서 묵는지를 꼼꼼히 묘사할 것이다. 또 수용소 이곳저곳과 그 명령 체계를 보여주려 애쓸 것이다. 자기력선이 어디에서 촘촘한지, 어디에서 드문드문한지, N극과 S극이 어디인지를 보여줘야 자석의 모양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시도는 문학과 저널리즘의 경계선 부근에 있는 분석 행위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이런 방향을 택한다면 수감자의 고통에만 전적으로 집중할 수는 없게 된다. 수감자의 고통에 내가 연민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다. 고통을 받는 이의 내면 묘사가 자기력선의 형태를 보여주는 데에는 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방향을 택한다면 작품이 학대자를 얼마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가 그런 행동을 벌인 데 대한 설명을 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학대 행위를 두둔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기계적 균형 따위를 추구하는 것도, 중립적인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아울러 이런 방향을 택한다면 나는 교도관이 극적으로 회개한다거나 무너진다거나 수감자와 연대한다거나 하는 결말을 주저하게 될 것 같다. 그것은 '감동'을 위한 손쉬운 타협처럼 느껴지고, 철 가루가 멋대로 움직여 자기력선을 벗어나는 것처럼 느껴질 것도 같다.


  장 작가가 소설 번역 과정에서 겪었다는 에피소드는 흥미로웠다. 읽을 땐 누구나 끄덕끄덕하겠지만, 맞닥뜨려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금성을 배경으로 하는 SF 단편 「당신은 뜨거운 별에」를 영어로 옮기던 번역가와 나는 함께 한참 골치를 썩였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국어 ‘별’을 ‘빛을 관측할 수 있는 천체 가운데 성운처럼 퍼지는 모양을 가진 천체를 제외한 모든 천체’라고 풀이한다. 즉 스스로 핵융합을 하는 태양 같은 항성과 그 주변을 공전하는 행성, 지구로 떨어지는 작은 운석인 유성까지 포함한다. 그러니까 금성을 ‘뜨거운 별’이라고 불러도 된다. 그런데 영어로는 항성은 ‘스타’, 행성은 ‘플래닛’이라고 꽤 엄격하게 구분한다. 별똥별을 ‘슈팅 스타’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사례라고 한다. 그러니 ‘당신은 뜨거운 별에’를 영어로 직역하면 영미권의 잠재 독자들은 한국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이미지를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태양 표면처럼 엄청난 빛과 열이 끓어오르는. 영어에서도 금성을 ‘모닝 스타’라고 부르는 표현은 있다. 그러나 행성은 항성들에 비하면 온도가 턱없이 낮다. 그러니 금성은 ‘뜨거운 별’은 될 수 있어도 ‘뜨거운 스타’는 될 수 없다.
  ... 해프닝도 있었다. 단편 「알바생 자르기」에는 알바생이 다니는 회사 사장이 직원들과 스킨십을 강화하기 위해 회식을 자주 가졌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대목을 두고 독일어 번역가와 일본어 번역가가 똑같은 질문을 해 왔다. 사장이 직원들의 몸을 만졌느냐는 것이다. ‘스킨십’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피부의 상호접촉에 의한 애정의 교류’라고, ‘살갗 닿기’나 ‘피부 접촉’으로 순화하라고 나와 있으니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같은 단편에는 별 설명 없이 ‘소폭’이라는 단어도 나온다. 이 단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으면 두 가지 뜻이 나오는데, ‘환율이 소폭 올랐다’고 할 때 쓰는 그 ‘소폭(小幅)’과, 작은 폭포라는 뜻의 소폭(小瀑)이라는 단어다. 나는 그 두 가지 뜻이 아니라,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만든 폭탄주’의 준말인 소폭(燒燒)을 쓴 거다. 한국인 독자라면 다들 알아들을 테지만 외국인은 사전을 봐도 헷갈릴 것 같다.


  무엇보다 장 작가의 '문학관'이 와닿았다. 더 읽고 쓰다보면 나도 그처럼 단단해질까. 단단한 것이 꼭 좋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문학이 뭔가의 도구가 아니라, 내가 문학의 도구인 것 같다"는 질문 정도는 단단히 움켜쥐고 싶다. 자신이 속한 세계(그에게는 문학장, 문학계일 것이다)에 대한 비판적 감각도 함께. 아마도 기자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이 그를 '소설가의 세계를 의심하는' 이상한 소설가로 만든 것이 아닐까.


  문학이 뭔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몇 번 던지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제일 정직한 답은 '잘 모르겠다'이다. ... 나는 문학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든가,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든가, 아름다워야 한다든가 하는 말들도 다 조금씩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그런 말로 잡을 수 없으며, 어떤 규정도 내릴 수 없는 것이 예술의 근본 속성 중 하나다. 문학에는 목적이 없다는 말에도 반대한다. 문학에 목적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 문학은 내게 그저 돈벌이의 수단은 아니다(물론 문학으로 돈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문학이 내게 사회 변혁의 도구도 아니다. 세상을 바꿀 선전물을 쓸 것인지, 훌륭하지만 조용하고 모호한 작품을 쓸 것인지 선택하라면 이 역시 답은 정해져 있다(물론 내 글이 세상에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란다).
  농담처럼 노벨문학상 받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는 나지만, 노벨문학상 같은 건 받지 못해도 괜찮다. 좋은 작품만 쓸 수 있다면 무엇이 좋은 작품인지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좋은 작품의 예는 구체적으로 들 수 있다. 문학은 앞으로 내게 그런 작품들, 그리고 그런 작가들과 관련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 이쯤되면 '문학이 내게 무엇일 것인가'는 주어가 바뀐 질문이지 싶다. 내가 할 일과 그 일에 임할 태도는 정해져 있으므로, 지금 내게 중요한 질문은 '내가 문학에(문학계에? 문학장에? 문학사에?) 어떤 작가일 것인가'다. 그러고 보면 문학이 뭔가의 도구가 아니라, 내가 문학의 도구인 것 같다.

  덧붙임 :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만큼 어렵다. 다만 나는 좋은 문학이란 고통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희미한 추정을 한다. ... 문학이 위안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위안이라는 게 문학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체험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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