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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Feb 18. 2023

스토커적 분열증자

23.02.15. C. 티 응우옌, 게임:행위성의 예술 2


약속이 없는 주말이 얼마만인가. 느지막히 일어나 책을 편다. <게임:행위성의 예술>을 이어 본다. '분투형 플레이'라는 독특한 방식의 행위를 계속해서 탐구한다. 이것의 존재 가능성, 그리고 의미에 대해서 논하는 장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게임은 다른 장르처럼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투형 플레이는 분열적이다. 일상적인 관심과 목표로부터 나를 분리해서, 일시적 목표가 나의 추론, 동시, 실천적 의식을 지배하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 망각적 목표를 가져야 한다. 나는 즐기기 위해 승리한다는 게 아니라, 승리하기 위해 게임하다보니 즐거워야 한다. 승리가 최종 목표인 것처럼 게임해야 하지만, 게임이 끝나면 우리는 승리를 관심의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안 되는 사람들도 많다. 게임에서 지면 길길이 날뛰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게임에 뭘 하든 심드렁한 사람도 있다. 분투형 플레이는 새로운 행위성에 이입했다가 꺼낼 수 있는 역량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그런 게 있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가 '우리는 아주 손쉽게 행위성에 이입했다가 이입이 깨지는 경험들을 한다'는 식으로 대답하는데, 정확한 대답이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이입을 일종의 분열증과 같은 게 아니냐는 비난을 제기한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것은 헌신도 요구하고 장기적인 지속상태를 요구하는데, 현타를 맞고 바로 벗어난다면 애초부터 사랑을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응우옌은 오히려 게임의 독특한 미덕이 일시적 목표의 인공성과, 그 목표를 일시적으로 채택할 수 있는 역량 덕에 가능하며, 게임이라는 맥락에서라면 이 분열증이 그리 혐오스러운 건 아니지 않냐고 반박한다.


잠깐 몰입했다가 빠지는 것, 게임에 있어서 이것을 분열이라 말하지 않을까.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배우는 것도 가능한 거 아닌가? 이 상황에서라면 이런 것이로군, 하는 이입이 가능하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게임 플레이가 특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반대항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직접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헌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어의 경우, 설령 게임 내 목표들에 대해 그때그때 커다란 헌신을 보일 수 있다고 해도, 그러한 게임 내 목표들에 대해 전반적으로는 무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내 마음 가지고 장난치지 마"Don't play games with my heart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98)


응우옌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부류의 목표에 한해서만 분열이 문제가 되며, 분투형 플레이는 일시적인 헌신의 형식만 필요하지, 목표에 대해서는 변덕스러움이 계속해서 요구된다고 본다. 행위성의 미학은 이 변덕스러움, 불충실성의 역량을 합리화할 수 있다.


물론 게임은 그렇다고 막바로 현실의 시뮬레이션이나 재현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것은 이미 어느 정도 단순화가 진행된 전혀 다른 영역의 것이다. 


게임에서 목표는 대개 명료하고, 정확하며, 측정 가능하고, 몇 개 되지 않는다. 게임에서 우리는 상충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동질적인 목표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대립하게 된다. 게임의 목표라는 것은 대개 예리하고 정확하다. 이는 미묘하고 유연하며 적용하기에 애매한, 온전한 형태의 가치화와는 아주 다르다. (107)
비현실적 결정화에 아무런 위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가끔은 우리가 세계의 가치 명료성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를 가지게끔 부추기기도 한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9장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료성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를 게임 바깥으로 전파하는 데서 비롯되는 위험이지, 게임 자체가 주는 가치 명료성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위험이 아니다. (110-111)
우리는 남들을 이기거나, 남들과 협업하거나, 가상 환경에서 가급적 오래 살아남는 등 다양한 일에 몰두하는 일시적 행위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행위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은, 게임이 행위성을 매체로 작동한다는 사실과 결합되면, 행위성을 주고받고 전파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유동성 덕분에 장기적인 자기 자신 바깥으로 나와, 소설이 가능케 해 주듯이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행위적 관점에서 직접 행위해 볼 수도 있게 된다. (117)


그런데 이렇게 이입이 가능하다는 것, 즉 다른 사람이 디자인한 행위성에 헌신하고 이입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우리의 자율성을 불가피하게 침해하는 것일까? 뭘 할 수 있고 뭘 해야 하는지 다 정해놓은 게임보다, 규칙도 목표도 제시하지 않는 행위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체스'보다 '레고'를, '마인크래프트'를 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나는 레고도 체스도 좋아하지만)


응우옌은 "행위적 매체의 제약과 특수성이 장기적인 자유와 자율성을 강화해 주는 특별한 방식"이라고 본다. 규칙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면, 독서가 외부로부터 사상을 침범당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생각해서 정말로 책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다) 응우옌은 게임이란 다양한 행위성에 게이머를 노출시키는 것이고, 그리하여 행위성의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행위성 유형을 발견하고 친해지면서 자율성이 강화된다고 생각한다. "게임은 우리에게 복수의 가치들을 접해 볼 기회를 준다."(123)


단순히 제한 없는 것이 자유라는 관점은 소박하고, 손쉽게 반박 가능하다. 규칙이 없는 상태에선 당신이 죽는 것도 자유롭다. 오히려 우린 서로 죽이지 말죠, 라는 규칙 아래에서만 서로의 삶은 다양한 방식으로 풍성해지는 게 가능하다. 스스로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더 자신의 자유를 증진할 수 있는 것이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행위를 제약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역으로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다. 응우옌은 더 나아가서 게임이 우리의 자율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코만도스라는 게임을 생각해보자. 7~8명 때로는 더 적은 숫자의 팀원들만을 가지고 특정한 인물을 암살하는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게임인데,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조종할 수 없고 오로지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조종할 수 있다. 각각의 인물은 장단점이 명확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변장을 통해 이동할 수는 있지만 공격력은 없어서 들키면 바로 죽는 스파이나, 원거리에서 저격은 가능하지만 단거리 전투는 불가능한 저격수처럼 각각의 조종 단계에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한계와 능력이 명확하다. 이것을 여러번 반복하는 과정에서, 게이머는 다양한 행위성의 형식을 경험할 수 있다. 대안적인 행위성을 갈아타면서, 우리는 행위성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여허 행위성 유형을 오갈 수 있는 역량과 자신에게 맞는 행위성 유형을 찾는 능력도 키울 수 있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러한 경험적 몰입에 의거하여 내러티브가 갖는 도덕적 중요성을 옹호한 바 있다. ... 내러티브는 세계에 대해 인지적으로 풍부한 감정적 경험을 형상화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누스바움은 감정이 인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분노는 불의를 이해하는 방법이고, 슬픔은 잃어버린 무언가의 가치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 감정은 정확히 조율되기도, 잘못 조율되기도 한다. 잘못 조율된 분노는 부적합한 대상에게 쏟아지지만, 잘 조율된 분노는 진짜 불의에 맞선 행동을 촉발한다. 경험의 범위가 폭넓다면 우리의 감정을 더 잘 조율할 수 있다. ... 내가 주장하는 바는 게임이 이와 유사한 형식의 경험적 몰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128-129)


다양한 행위성 유형을 경험하는 것을 옹호하는 논변은 읽으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간단히 말하면 분석철학자가 되기 위한 다양한 능력들은 체스로부터 배웠고, 강의는 <수화> 게임으로부터, 정치는 <스파이폴>에서 발휘해야 할 행위성 유형과 닮았다는 것이다.


나는 철학적 진리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데 관심이 있는데, 이 관심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매우 다른 여러 과제들을 수행해야만 한다. 때로는 철학적 연구에 매진해야 하고, 다른 때에는 비전공 학부생들에게 철학 입문을 가르쳐야 한다. 또 가끔은 우리 철학과가 경영 대학에게 예산을 빼앗기지 않도록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가 가득한 대학 행정의 진창을 헤쳐 나가야 한다. 이 각각의 과제들은 서로 다른 행위적 유형을 요구한다.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결정적인 무언가를 선사한다. 게임은 새로운 행위적 유형에 나를 노출시킨다.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하면 선택 가능한 행위적 유형이 더 폭넓게 들어 있는 메뉴를 가지게 된다.(139)


위험도 있다. 게임은 매우 협소화된 행위성 유형에 집중하는 주목의 구조를 적극 활용한다. 한정된 수의 이유만을 신경쓰면 된다. 그렇다면 게임 플레이에 영감을 받은 게임 바깥의 행위적 유형은 협소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것은 '자율성' 요구와 충돌하는 것은 아닐까? "각 구조는 좁지만 깊이 파고들어 간다. 그러므로 협소화된 주목의 구조를 적절하게 이어 붙이면 장기적으로 보아 더욱 많은 것을 파고들 수 있다."(141) 우리는 인지적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때 그때 역량을 협소화된 범위의 문제에 집중하고, 그것을 빠르게 좌우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인데...


게임을 그렇다고 무조건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1) 게임만이 새로운 행위성 유형에 닿을 수 있는 경로가 아니다. 2) 게임을 한다고 자율성이 무조건 강화되는 게 아니다. 게임 하느라 다양한 행위적 유형에 대한 노출이 감소되면 자율성의 발달 역시 가로막힐 수 있다. (중독성 게임의 문제)


게임 플레이는 보다 폭넓은 행위적 유형들을 접하게 하며 서로 다른 행위적 유형들을 유동적이고 적절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이 특수한 장점이 자유로운 플레이보다 구조화된 게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 구조화된 게임은 행위성을 기입하고 주고받는 방식이며, 행위적 유형을 전파할 기체vessel이다. 그렇기에 구조화된 게임은 우리가 자율성을 함께 강화하는 협업적인 사회 사업에 있어서 특히나 유용한 도구이다. 구조화된 게임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독창성을 결합하고, 행위성의 발달을 협업적, 사회적 프로젝트로 만들어 줄 방법이다. 게임을 통해 우리는 고도로 결정화된 행위성 유형을 약호화하고 전파하며 저장할 수 있게 된다. 즉, 게임은 행위성의 라이브러리이다.(155)


명쾌한 결론이다. 이것이 게임의 예술로서의 근거, 게임 예술의 매체, 게임의 유용성이다.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제 게임의 '미학적' 차원을 다루는 2부 앞까지 온 것이다. 예술이려면, 미학적 경험이 있어야 한다. 게임의 미학적 경험의 재료는 무엇인가? 그 경험의 독특함은 무엇인가? 일단 한 박자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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