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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Mar 22. 2023

구할 것인가, 찍을 것인가

23.03.22. 수지 린필드, 무정한 빛

"나치가 계획한 인간성 말살을 묘사하는 방법 중 희생자의 경험을 경시하거나 아도르노가 비난한 희생자에 대한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방법이 과연 존재하는가?"


존더코만도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나치 친위대를 대신해 일하는 수감자들이었다. 가스실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시체를 소각장으로 옮기고, 수용소의 잡일을 돕는 대신 약간의 음식을 더 받았고 수명을 살짝 더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최후도 다른 수감자들과 동일했다. 나치는 이들을 정기적으로 학살했고, 새 존더코만도들은 전임자의 시체를 불태우는 입문 의례를 치렀다. 피해자였지만 부역자이기도 했다.


그들 중 한 명의 존더코만도가 남긴 4장의 사진이 있다. 초점도 명확하지 않고, 화각도 수평도 엉망진창이다. 허나 나치 친위대가 공들여 찍은 사진에는 담겨있지 않은 끔찍한 현실이 거기 있었다. 비록 존더코만도인 그들은 살아나가 증언할 수는 없지만, 사진은 그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해줄 것이다. 실제로 사진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이 끔찍한 사진에 관심을 보였다. 논란도 이어졌다. 관객은 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전율하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현실을 살 것이다. 너무나 실재적인 이미지이게 관객에겐 그저 특별한 구경거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옹호한 사람도 있다. "저항은 불가능하다고 믿은 세계로부터 용케 건져낸 것"이라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대표적이다. 


끔찍한 재앙의 재현은 분명 불가능하다. 진짜 증인은 모두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재현이 불가능하기에 끔찍한 현실을 증언하는 것으로부터 물러나는 건 또다른 게으름이자, '그것이 없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행위의 한 기능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사진은 진짜 증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대신한 증인이다.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가라앉은 자들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증언할 수 있다. 수지 린필드는 말한다.


"아도르노의 금지는 도덕적으로 타당할지 모르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시를 쓰고, 이야기를 꾸미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우리가 형제들을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그리고 타인의 경험을 축적한 다음 그것으로 사물을 창조한다. (몇몇 수용소에서조차 수감자들은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나치는 이 변형하고자 하는 충동을 파괴하지 못했기에, 이런 행위는 배반이 아니라 승리다. 비록 그 결과물이 경험을 위조하더라도 - 위조할 수밖에 없다 - 말이다."


고통받는 신체가 담긴 사진을 오래 본다한들 우리가 희생자를 돕거나 구할수는 없다. 어쩌면 희생자를 향한 가해자의 시선에 오염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범죄란 목격자 없는 사건으로 계획되기에, 그 범죄를 기록한 사건은 아무리 혹독하고, 역겨운 것일지라도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한 그 계획을 좌절시키고 만다. 사진에 헛된 희망 - 사진이 피해자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 - 을 걸기보다, 왜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없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사진을 통해 우리는 항상 너무 늦었음을 깨닫는 것이 유일하게 그들과 연결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가장 위대한 정치가도, 철학자도, 인도주의자도 ... 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왜 사진에 그런 임무를 요구하는가?"(제임스 낙트웨이)


보지 않고 피한다고, 그것이 희생자를 위한 일이라 단언할 수 없다. 완벽하지 않은 모든 시도들을 '옳지 않다'고 거절하며 그들이 경험한 고통을 건드릴 수 없는 신비한 대상으로 고립시키거나, 재현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재현을 포기하는 방식은, 고통에 침묵하는 데 공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치와 (가라앉은) 희생자라는 이분법만을 강요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러한 고통을 생산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사진을 응시하며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지 린필드의 <무정한 빛>은 관람자의 보는 윤리를 이야기한다. 관람자는 사진이 외설적으로 사실을 전달한다고 불평하기보다, 사진이 전달하는 잔학한 사실이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물어야 한다고 말이다. 죽어간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진짜 죽음의 대리인은 누구이며, 사진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사진을 '읽어낼' 능력과 의무가 있다. 그것이 아무리 더렵혀진 시선이라고 할지라도.


"'적'은 사람들의 상처와 절망을 기록하는 이들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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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저널리즘 관련한 아이템 회의를 하다가 오래 전 읽었던 이 책이 떠올랐다. 다시 검색해보니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도 같이 들여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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