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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Mar 22. 2023

열흘만에 다시 읽기

23.03.22.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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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다 뭐다 하면서 열흘 정도 책을 못봤다. 그래도 얼추 짐이 정리되고 나니 책 볼 겨를이 생겼는데, 당장 또 며칠 후면 여행을 간다. 아마 3월은 내내 책을 보기가 어려울 것 같다. 집에 그득히 쌓여 있는 책을 책장에 다 꽂아놓고 나니, 이 책들 중 그 어떤 것도 이번 달에는 펴볼 일이 없는데 어째서 나는 이 무거운 녀석들을 꽂는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가 한탄이 자연스레 입술새로 흘러나왔다. 그래도 일단 책모임을 위해 한 권 펴 들었다. 전에 읽었던 C. 티 응우옌의 <게임 : 행위성의 예술>이다.


저번에 읽었지만 다시 읽으면서 간단히 정리한다. 본문에 더 다양하고 심도 깊은 논의가 있지만, 책 전체의 논지는 1장에 대부분 담겨 있다. 1장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장에서 제시하는 논의들은 좀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그렇다고 1장을 이해하면 책을 더 안 봐도 된다는 소리는 아닌데, 왜냐하면 1장은 자신의 논변을 제공할 뿐, 그에 대한 반론과 이에 대응하는 재반박이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슈츠의 게임 정의는 2장에서 좀 더 정교하게 논의되는데, 이는 1장의 내용을 단순히 재서술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럼에도 1장은 좋은 길잡이다...


1. 일상의 현실 세계에서는 결과를 위해 수단을 취하지만, 게임은 수단을 위해 결과를 지정받는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목적) 촬영과 편집을(수단) 행하는 게 일상세계의 방식이라면, 게임은 목적을 달성하려 이리저리 애쓰는 과정 자체를 즐기기 위해 목적을 취한다. 게임의 목표는 '특정한 과정'의 '경험'이다.


2. 게임은 목표를 제공하고(전쟁에서 승리하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능력(전차, 보병의 생산)을 지정하고, 이에 알맞는 장애물(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채취할 것, 상대방과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겨룰 것)을 제시한다. 목표-능력-장애물은 특수한 '행위성agency'을 형성한다. 이 일시적인 행위성을 수행함으로서 우리는 게임 디자이너가 제공한 특수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혹은 반대로, 특수한 경험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게임 디자이너는 목표-능력-장애물(환경)을 가다듬는다. 이것이 게임 디자이너(예술가)의 매체다.


3. 예술가 - 예술작품 - 관객으로 이루어진 구도가 게임에서도 반복된다. 게임 디자이너 - 행위성 - 게이머. 보통의 예술작품은 물리적 매체로 이루어져 있어서(아닌 경우들도 많다) 예술가의 의도와 관객의 경험 사이를 매개하는데, 게임에 있어서 이 매체는 '행위성'이다. 게임 디자이너들은 이 행위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주조하는 데 애쓰고, 우리는 그들이 빚어낸 다양한 행위성을 수행함으로써 그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기입inscription'이라고 부른다.


4. 게임은 삶의 특정한 한 순간에 즐기는 것이니만큼, 게임의 목표는 삶의 목표와 분리된 특수하고 한정적인 차원에 머무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목표로 삼고 게임에 참여하는 때에는 마치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인양, 게임 바깥의 목적을 잊어버린 것처럼 몰입해야 한다. 임시적인 몰두라는 모순적인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이 함의하는 윤리적 쟁점은 뭘까?


5. 게임을 하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행위한다.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고유한 예술 지평과 일군의 독자적인 사회적 가치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14) 무작위로 닥쳐오는 일상 세계와 달리, 게임에서 우리는 우리의 욕구에 맞추어 특정한 행위성을 채택하고 설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안에서 겪는 고투Struggle는 때로는 재미있고, 아름다울 때도 있다. 주급을 깎일 걱정 없이, 나는 피파 커리어 모드 속 한 선수가 되어 골을 넣고, 골을 놓치고, 패스하고, 패스를 놓치고, 그러면서도 성장하는 과정을 즐겁게 경험할 수 있다.


5-1. 심지어 우리는 일상에서는 절대 바꾸지 않을 가치관도 게임 속에서는 손쉽게 바꾸기도 한다. 평화주의자이지만, 게임을 하면서 몰려오는 좀비들에게 총을 난사할 수도 있다. (애초에 평화주의자는 좀비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또한 평소에는 하지 못한 부도덕한 행동들도 할 수 있다. 원사운드의 TIG 카툰 #76 <게이머 자녀 확인 방법>을 떠올려 보자. 혹은 롤러코스터 타이쿤으로 하는 다양한 잔인한(!) 행동들이라든지... 중요한 건 게임이 끝나면 그 행위성을 수행하길 그만두어야 하고, 실제로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안 된다면, 그 때부턴 '상담이 필요합니다'.


6. 버나드 슈츠의 게임의 간략한 정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일은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시도이다."(15, 재인용) 게임은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우회로다. 축구를 생각해보자. 발보다는 손이 훨씬 더 발달한 게 사람인데, 구태여 그 동그란 공을 발로만 차서 작은 골대에 넣어야 득점으로 인정이 된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했나? 인간 스스로다. 손으로 공을 집어 던지면 레드 카드를 받을 것이다. 누구도 그 행위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6-1. 여기에 틈이 있다. 공을 발로 차서 사각형 골대 안에 넣는 행위는 축구라는 게임의 목표다. 그런데 축구라는 게임을 하는 목적은 승리일 수도 있고, 체력 단련일 수도 있고, 친구들과의 친교 다지기일 수도 있고, 아름답게 휘어 들어가는 공의 궤적에 흠뻑 빠져드는 것일수도 있다. 뭐 어떤 변태(나)라면 선수들 사이의 유기적인 움직임과 공이 빚어내는 군무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목표goals와 목적purpose은 항상 같지 않다. 슈츠는 목표와 목적이 어긋나는 독특한 동기 구조를 포착했다.


6-2. 물론 모든 게임이 다 '슈츠형 게임'(목표와 목적이 어긋나는 동기 구조를 가진 게임)인 것은 아니다. 특수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 형식의 게임 플레이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그리고 이에 속하는 게임은 꼭 유치한 놀이들만 포함하지 않는다. 비록 이 슈츠형 게임을 하면서 겪는 고투들이 하찮아보일지라도(몸으로 말해요 같은 게임에서 겪는 고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고 게임 바깥에 게임의 가치를 정해줄 별도의 준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게임이 유용하다는 정당화가 필요한가?


6-3. 성취형 플레이Achievement Play(승리를 위한 플레이)와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고투를 맛보기 위해 승리를 일시적으로 추구하는 플레이)로 나누어본다면, 분투형 플레이는 목표와 목적이 어긋나 있다. 분투형 플레이어는 고투를 맛보기 위해서 승리를 일시적으로 추구할 뿐이다. 이 독특한 동기의 역전이 일어나는 분투형 플레이가 슈츠형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택하는 플레이 방식이다.


6-4. 이기려고 진짜 노력은 해야 하지만, 진짜 이겨먹기 위해서 일상적 행위에서 자주 하듯이 능력을 키운다면 재미가 없다. 승률이 비슷하지 않으면 게임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져준다는 느낌을 줘서도 안된다. 즉 나의 능력은 지속적인 목표(게임하는 상대방과의 관계 유지) 아래에서 조율을 하게 된다. 이걸 못하면, 모든 게임에서 다 이기려고 죽자사자 달려들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눈치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 쎄함을 이해하려면 바로 목표와 목적의 어긋남을 인정해야만 한다. (즉 슈츠형 게임을 즐기는 분투형 플레이라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7. 지속적인 목표 아래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에 최선을 다한다는 게 중요하다. 이 최선을 다하는 승리가 '일회용 목표disposable end'다. 우리는 이것에 일시적으로 이입한다. 마치 그것이 내게 최종적 목표인 것처럼 몰입해야 한다. 하지만 또 그 목표를 달성하거나 실패한 이후에는, 게임을 끄면 우리는 이 목표를 폐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승리를 무한히 유예하며 고투를 오랫동안 즐기는(이기고 있는 상태를 계속해서 늘리는) 이상한 상황에 빠진다.


8. 예술의 여러 가지 특징적인 기능 중 하나가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인데, 저자는 게임이 미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플레이어의 고투가 만들어 내는 미적인 요소를 경험하고자 참여하는 게임 플레이)라는 게 가능한가? 분투형 플레이는 미적인 요소를 만들어낼 수 있나? 가능하다고 본다. 우아함, 근사함, 그리고 더 나아가서 행위-결정-해결에서 오는 쾌감이 있다. 클라이밍을 생각해보면, 높은 곳에 있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각각의 노드에 고정시키고, 힘을 주어 매달리고 끌어올린다. 이것은 "문제 해결로서 무브먼트의 경험들, 즉 까다로운 홀드의 연쇄를 통과해 낸 나의 신중함과 우아함의 경험들이다."(27) 그리고 내 능력과 과제 사이의 조화는 특별한 경험을 가져다 준다. (보통은 세상이 나의 능력에 걸맞지 않기 때문에, 매우 좌절할 뿐이다.) 게임은 여하간에 이러한 경험들을 농축한 특별한 세팅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여러 종류의 예술이 일상적인 경험의 결정체"라면, 게임 역시 "실천성의 결정체"로서 예술이다.


9. 게임 디자이너는 어떻게 이 고투를 '고안'해낼까? 무엇을 재료로 삼을까? "예술적 매체는 그저 특정 재료가 아니라 기술적 자원들technical resources의 집합"이라면, 게임의 매체는 뭘까? 목표(이 게임 안에서 달성할 과제), 규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켜야 할 명시적 원칙), 환경(컨트롤러 같은 물리적 매체) 등이 그 기술적 자원들의 요소일 것이다. "게임 디자이너는 플레이어를 위해 아주 특수한 고투 형식을 고안하며, 이를 위해서 플레이어가 취할 일시적인 실천적 행위성, 그리고 플레이어가 맞서 싸울 실천적 환경 등 두 가지를 모두 제작한다. 달리 말해, 게임 디자이너의 매체는 행위성이다. 하나의 표어로 만들어 보자면, 게임은 행위성의 예술(the art of agency)이다."(35)


9-1. 행위성은 간단히 말해 의도적 행위 혹은 이유를 가진 행위다. 규칙, 목표, 환경을 통해 게임 디자이너는 게이머가 특수한 의도적 행위 / 이유를 가진 행위를 하도록 고안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임을 수행함으로서 게이머는 특수한 고투를 겪고, 특수한 능력으로 장애물을 헤쳐나가며, 특수한 물리성과의 조화를 통해 게임 디자이너의 고안된 의도를 경험한다. 이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9-2. 행위성이 게임의 매체라면, 우리는 게임을 통해 행위성의 새로운 양상을 배우고 또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협업'을 가능케 한다. "게임은 기술을 넘어서는 행위적 정신자세(the agential mindsets), 즉 특정 종류의 관심과 특정 능력들의 조합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37) 우리는 다른 행위성에 이입하는 역량이 있기 때문에, 게임이라는 행위성의 거대한 라이브러리를 통해서 과학적 이해, 논리적 역량, 도덕성, 자기 계발 등에서 서로 협업할 수 있다. (게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특정한 행위성 그 자체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와 같은 질문은 행위성의 '탈착'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습득된다. 예컨대 this war of mine 같은 게임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한 복판에서 민간인으로서 어떤 제약과 능력을 바탕으로 어떤 결정들을 내리고 그 결정들을 바탕으로 어떤 성찰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10. 게임은 도피처다. 단순하고 유연하다. 닥쳐오는 세계에 맞닥뜨릴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겪는 좌절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지만, 게임은 나의 역량에 걸맞게 조화된 장애물을 뛰어넘음으로서 "세계와의 실천적 불화를 다독이는 실존적 위안"을 제공해준다. 심지어 이해 불가능하고 복잡한 가치들로 무장한 빌런이 아닌, 공유가 가능한 단순한 가치로 무장한 상대방은 편안함을 안겨준다. 이것은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동기적 세계관에 가깝다. 모두가 동일한 동기를 가진 합리적 행위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그런 세계관.


10-1. 이것은 게임의 약속인 동시에 위협이다. 게임은 명료하기에 위안을 주지만, 동시에 가치가 명료하고 또렷이 드러나고 균일한 세계가 현실에 있어야 한다는 잘못된 기대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즉 게임은 도덕적 명료성이라는 환상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이것은 폭력적인 또는 선정적인 게임에만 해당하는 게 아닌, 게임 그 자체가 지니는 위험이다. "일상을 게임화할 때 우리는 고투 활동을 위해서 목표 자체를 바꾸고 단순화하려는 유혹에 빠질 것이다." 게임은 일상이 아니다, 일상은 게임이 아니다. 예술이 정치가 아니고, 정치가 예술이 아니듯. 정치가 예술이 되면 파시즘이 되듯이, 일상이 게임이 되면 세계는 도덕적 명료성이라는 환상으로 인한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10-2. 분투형 플레이라는, 희한한 동기 구조의 비틀림을 내포한 플레이는 반성을 요청한다. 이 목표가 그렇게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나?라고 한 발 물러나며 묻게 된다는 거다. "잘 관리된 행위적 유동성을 갖춘다면 우리는 일시적인 행위성들과 행위적 유형들을, 거기에 빠져 버리지 않고도 적절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332) 분투형 플레이는 승리와 가치 사이의 동기적 거리를 부여하기에, 지정된 임시적 목표를 벗어나 이게 가치가 있나? 라고 자문하는 태도를 가능케 한다. 애초에 그 목표가 임시적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영원히 몰두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안다.


10-3. 일상을 도구화하고 게임처럼 가치를 단순화하는 데 이미 익숙한 오늘날,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는 우리의 일상을 게임처럼 변용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맞설 수 있는 방책이다. 배달 앱이나 용역 앱에서 행해지는 별점 부여하기에 목을 매고, 은행 애플리케이션을 켜놓고 걸음 숫자를 늘리며 코인을 캐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시대에 이렇게 단순화해도 되나? 우리가 이러한 보상에 목을 맬 가치가 있나? 라고 물어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일상이 게임화되고 있다면, 우리는 미학적 분투형 플레이어로서 이에 대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이 '플레이'는 단순한 유희의 수준이 아니라, 삶의 태도의 수준으로 격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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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conomic-writings.xyz/text/textblocks1/art_is_a_game.html

같은 저자/같은 번역가의 이 글을 보면서도 한 대 맞은 기분이 드는 것인데, "중요한 건 사실 고투(struggle)이다. 우리는 그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술을 공부하거나 그에 대해 길게 대화하는 게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우리는 예술을 이해하는 작업에 뛰어듦으로써 저런 즐거운 대화를 나누거나 저 놀라운 학문으로 이끌린다." 예술에 대해 옳은/정확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 목표 때문이 아니라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고투' 때문에 수행되는 것이라는 주장은 게임의 동기 역전과 정확히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이 글을 보았는데, 아마 이 글을 먼저 읽었다면 이 책을 훨씬 더 쉽게 읽었을 것 같다. 다 읽고 나니 번역가님의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예술,언어,이론>이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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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내게 가장 독특한 부분은 목표와 목적의 어긋난 동기구조를 설명하는 '분투형 플레이', 그리고 게임의 위협으로서 '도덕적 명료성이라는 환상'이다. 분투형 플레이는 나의 게임 플레이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동시에, 일시적 목표의 탈착 개념을 통해 행위성이라는 매체의 전달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입구 역할을 한다. 즉, 행위성이 '매체'가 되려면 그것이 한 개인을 온전하게 지배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떠다녀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 목표만이 내게 유일한 것처럼 몰두해야 한다. 이 모순을 장기적 목표-단기적 목표의 구분과 단기적 목표의 탈착 가능성을 언급하며 해결하는 부분이 꽤 흥미로웠다.


또한 게임의 위험성이란 피와 살로 인한 것이 아니라, 만사를 게임처럼 여기는 그 단순화에 있음을 언급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선정적 게임도 다양한 행위성의 라이브러리의 일부이며, 이 행위성을 탈착하는 '역량'의 상실이 문제의 핵심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역량의 상실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몰두하기에 좋은 게임이 빠져나오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즉, 게임 자체가 그 역량의 증명인 동시에 역량의 상실의 근원인 것은 아닐까? 이건 같이 읽는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해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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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게임은 경제학보다 더 (경멸적 의미의)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만들어내는 장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반대로, 다양한 게임들의 경험은 가치의 통약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게임에 몰두하는 와중에도 '이게 지금 내 시간을 허비할만큼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하는, 비틀린 동기 구조로 인해 발생하는 분투형 플레이는 게임의 위협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탈착'의 역량을 길러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행위성의 라이브러리를 어떻게 하면 획일화된 가치/수량화에 잠식되어 가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제안으로서 활용할 수 있을까? 일단은 우리는 보다 더 많은, 더 다양한 게임을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나 이것이 '역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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