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산책
청운동에서 상춘재를 돌아 청와대를 거닐었다.
서촌에서 출판사를 경영하는 선배님을 만나러 경복궁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사방팔방으로 길이 나 있는 지하도 출구를 따라 바깥으로 나오니 형형색색 한복의 물결이다. 대로는 물론이고 작은 골목골목마다 아시아와 서양인 관광객으로 활기찬데 이제 막 점심시간을 맞은 직장인들이 때로 몰려나오고 있다.
순간 '아! 이곳은 수도 서울의 중심이며 외국 관광객들의 핫플레이스' 임을 실감한다. 커다란 관광버스에서 사람을 싣고 내리는 모습을 보니 내가 일본 교토를 여행할 때나 북경을 다닐 때의 모습과 너무 흡사했다. 그때는 내가 여행자였고 지금은 그들이 우리나라에 나들이를 온 셈이다.
선배의 사무실은 인왕산 아래쪽의 청운동 주택가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명당자리였다.
정원이 넓은 2층집 주택을 개조해서 사무실을 만들었는데 내부의 목재도 고풍스러웠지만 사방으로 트인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이 훤이 내다 보였다. 주변 산세도 좋으니 그야말로 도심 속의 별장 같은 기분이다. 이제 봄을 지나 꽃과 나무가 사방을 물들일 즈음이면 사방은 조용해서 숲의 새소리가 더욱 요란해진다고 했다.
선배와 함께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와 커피타임을 가지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아가는 게 녹록지 않다는 것에서부터, 오너로서 중대한 일을 홀로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과 책임감, 사업의 리스크 등등……
나 역시 나름의 힘겨움을 토로했는데, 공감하며 들어주는 선배의 눈빛과 호응에서 그리고 그가 이어 말하는 나름의 처방이 간결하면서도 큰 위로로 다가왔다. 세상을 살면서 겪는 풍파는 다양하지만 그 져야 하는 무게감만큼은 비슷하기에 동병상련의 위안이 진정성 있게 전해왔다. 실은 선배에게 밥을 사주고 르완다에서 가져온 커피도 선물하려고 찾아왔는데, 오히려 내가 힘을 얻고 돌아가는 격이 되었다.
"어쨌든 이렇게 마음속에 담아 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대상이 있고, 밥 한번 같이 먹을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자산이냐"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잠시의 대화였지만 나와 선배에게 힘을 얻는 충전이기를 바라며 사무실을 나왔다.
오랜만에 좀 걷자는 심산으로 청와대 앞을 통과해서 인사동 방향에서 길을 잡았다. 청와대는 근처만 와도 경비가 삼엄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런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고 관광객을 태운 버스들이 외곽을 차지하고 있다. 청와대 앞길을 지나려니 입구 안내소에서 본관 입장이 가능하다고 알려준다. 예매하지 않아도 2,000명 까지는 현장에서 출입이 가능하단다. 생각지도 못한 호객 문구에 끌려서 모바일로 입장 등록을 마쳤다.
고궁을 거니는 마음으로 청와대 안마당에 발길을 옮겨 구석구석을 감상해 볼 요량이다.
청와대는 전체적으로 한 나라의 국격을 대표할 만한 자연의 풍광을 배경으로 아기자기하게 예술성을 강조해서 구성한 공간이었다.
북악산의 숲을 등지고 있을 뿐 아니라 경내에 조성한 나무와 녹지를 가르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시냇가의 물 흐름이 아름다웠다. 미국의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의 밋밋함과 작은 규모에 비하면 청와대의 입지와 전통의 멋은 가히 비할 바가 아닌 듯싶었다. 물론 자연미와 건축학적으로만 바라본 느낌이라 그 내부에서 연계된 실무의 유기적 조화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관저와 상춘재 청와대 본관을 둘러보면서 뭔가 퍼즐 하나 씩을 맞춰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TV와 뉴스를 통해서 곳곳의 이미지에 익숙해 있는데, 이것을 실제로 보니 지형과 위치가 서로 연결되면서 전체적으로는 큰 그림으로 연결되는 맑아지는 깨우침이었다. 대통령의 집무실이나 국빈을 맞는 곳, 청와대 2층을 향해 걸어 올라오는 카펫과 건물의 높이 넓이가 주는 공간에서 국격이 우러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각도에서 촬영을 해도 근사하게 나오도록 설계한 것이니 말이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대로 양편으로 늘어선 빌딩들이 그대로 드러나서 잘 보였다. 광장의 소리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는 거리였다.
관저와 본관 사이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침류각과 경복궁을 지켰던 수궁터와 구본관터를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해설을 겸한 안내 팸플릿 덕에 큰 어려움 없이 곳곳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안내 종이의 겉 면에는 큰 글씨로 “청와대, 국민 품으로”라고 적혀있었다. 그렇다, 아무 공로 없는 내가 외국 관광객과 뒤섞여 그 삼엄했던 청와대의 안 마당에 까지 들어와 거닐고 있으니 시대가 많이 바뀌기는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염원하는 국민 품으로 와야 하는 것은 정치적 효능감, 정의와 공의, 안정된 평화 등의 따스함이 아닐까? 평범한 사람들은 밥과 차를 함께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하는데 권력은 왜 유지하는 것만 집착할 뿐 백성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지.
금단의 공간을 밟으며 금단의 사고가 열리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