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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구 Jun 10. 2024

다산초당에서 삶의 자세를 배운다

유배지의 절망에서 학문의 꽃을 피워낸다

마을에 차를 대고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산기슭에 자리한 고택에 이르기 위해선 곧게 뻗은 대나무 군락과 오랜 세월을 버티느라 뿌리를 드러낸 나무숲 언덕을 올라야 한다. 숨이 조금 가빠 올 무렵 맞이한 다산초당(茶山草堂).

초당의 열린 방문 안에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다산의 초상화가 놓여있다. 쓸쓸한 유배객을 찾아먼 길을 달려온 방문객을 맞이하는 반가움이 실린 느낌이랄까!. 18년간이라는 오랜 격리와 고립의 시간을 그는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다산초당의 정약용 초상화


한때 정조대왕의 신임 속에서 그의 정치철학을 뒷받침하며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축조하는 대역사를 담당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어떻게 권력에서 밀려나서 버림받게 되었는지……

학문적 스승이며 총명한 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집권이 종료되면서 천주교를 구실 삼아 정약용이 내쳐진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지 모른다.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난 집안은 뿔뿔이 귀양살이와 죽임을 당하는데 그런 역경 속에서 어찌 이십여 년 가까운 인고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위당 정인보-


그의 초상화가 더욱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지는 데에는 안경이 한몫을 한다. 시력이 점점 떨어져서

글을 읽고 책을 저술하기 힘들었을 때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학자의 면모가 오늘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물론 그의 이전 초상화를 다시 재해석해서 현대적으로 그려낸 것이라 세련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앙의 다산초당 양 옆으로는 제자들이 묵었던 서암(西庵)과 다산이 기거했던 동암(東庵)이 있는데, 유배 중에도 학문을 가르치며 사람을 만나고 의욕적인 저술활동을 하면서 학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했다. 초당과 동암 사이에 자그마한 연못을 만들었는데 이는 양수리 두물머리부근 생가를 떠올리며 늘 물 흐르는 소리를 그리워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일각

산기슭을 따라 조금 더 걸으니 강진만의 바다가 굽어 보이는 천일각이 보인다. 마음이 답답하고 가족이 그리울 때면 한 번씩 이곳을 찾아 산보했을 것 같은 위치의 정자다.흑산으로 유배가신 형님의 안부가 궁금하고

두고 온 아들과 딸들의 자라는 모습이 아련하고 그리워서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사무치게 먹먹해서 눈물지으며 스산한 마음을 다스려보곤 했을 '천일각.  

 

천일각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임말”


천일각


백련사

천일각을 지나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웅장한 고찰인 백련사를 맞이한다.

동백나무 숲을 지나는 상큼한 향기에 바다 바람이 불어오면 다산은 한층 상쾌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숲을 벗어나면 탁 트인 구릉이 나오고 이 높은 곳에선 자생하는 차밭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차가 많이 자라는 다산茶山의 유래다. 바다와 차밭 사이로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이 언덕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고찰로 향한다.

만덕산에 자리한 천년 고찰 백련사에는 그의 벗이 되어 준 혜장선사가 계신 곳이었다. 다산보다는 십여 년 아래였지만 둘은 서로의 학문과 식견 사상과 종교를 기탄없이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 깊고 풍부한 식견과 인품에 감화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가 다산을 지탱해 준 힘이 되어준 것은 아니었나 생각했다.   


"통일신라 말기인 839년 문성왕1년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이때부터 백련사라고 불렀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렀다.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백련사
녹차밭과 강진만


녹우당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것은 불행 중 다행히 아닌 천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귀양은 맞지만 “위리안치”와 같이 거주지에 울타리를 쳐서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도록 심하게 다루지 않고 어느 정도 눈치껏 편리를 보아주는 것이 상례였다. 더구나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 윤 씨의 고향은 강진에서 지척이다. 종가인 녹우당에는 공재 윤두서와 윤선도를 길러낸 집안이니 다산이 가장 아쉬울 수 있는 수많은 책과 문화적 자산을 맘껏 빌려다 볼 수 있었다. 그로서는 외가가 지척이었던 것이다.


"귀양은 귀향(歸鄕)이라는 말이 변형된 것으로 당초에는 관리가 잘못을 저질러 문책을 받아야 할 경우 벼슬에서 면직시키고 나서 서울에 살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벌이었다. 나중에는 이것이 바뀌어 되도록이면 해당자의 고향이 아닌 연고가 없는 먼 지방으로 보내어 불편하게 지내도록 하는 벌(罰)의 일종이 되었다."


자연히 윤 씨 집안에선 후손들의 학업을 위해 기꺼이 자손들을 다산초당으로 보내어 배우게 했다.  

다산이 해남의 외가에서만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말년에 저술과 교육에 몰두할 수 있도록 다산초당을 지어준 사람들은 강진 귤동의 해남윤 씨들이었다. 나중에 자신의 외동딸을 시집보내 다산과 사돈을 맺은 집안도 강진 목리의 해남윤씨 가문이었다.  


강진과 다산초당 일대를 돌아보면서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18년이라는 절망을 보물 같은 명저의 집필로 승화해 낸 인간 정약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늘도 그의 곧은 선비정신을 높이 평가해서였는지 유배에서 돌아와 여유당에서 20여년을 더 살며 학문을 집대성할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후대의 큰 스승이며 대학자이고 실천적 실학자이며 좌우의 틀에 매이지 않았는 사상가.  

무엇보다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고 애틋해하는 한 가정의 아비로서의 절절한 따스함이

내게 깊은 울림으로 전해졌다.



대나무 숲 길과 초당 앞 연못
다산초당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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