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를 읽다

자본의 힘으로 재편되는 질서가 유쾌하다.

by 준구

이슬아의 책 “가녀장의 시대”가 배달됐다. 봉투 안에는 소설과 브런치 독서클럽 기념품 열쇠고리, 앙증맞은 책갈피까지 예쁘게 깔맞춤 한 선물이 들어있었다.

지난 한 달간 지하철을 오가며 책을 읽었고 집과 사무실에서 펼쳐 들었던 독서 기록의 성실함에 대한 격려였다. 아마도 책방에서 출판한 책 표지는 소설에서 나오는 배경과 인물을 한 컷의 그림 속에 그렸다. 초판본에서 보았던 왕관을 쓴 이미지는 기존 출판물의 스타일에 비하면 다소 생경한 복고풍 디자인이었다면 이번 것은 따스하고 잔잔한 느낌이다.


몇 년 전, 아내가 이슬아 작가의 초판본 “가녀장의 시대”를 구입해서 읽은 뒤 내게 권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다른 친구에게 빌려주며 서가에서 사라졌다. 그랬던 책이 다시 내 손에 쥐어졌다.

작가는 50대 중반의 엄마와 아빠를 고용해 출판사를 꾸려가는 이슬아다. 젊고 싱싱한 그녀의 눈에 50대는 아주 젊지도 않고 너무 늙지도 않은 사람들이라 규정했다. 나의 나이가 그 부모대여서 작가가 내린 정의가 너무도 적절해서 공감하며 웃는다.


작은 규모일지언정 딸이 기업의 대표라 그녀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는 조직의 질서와 쳬계에서 오가는 대화와 규칙 등이 재미있다. 대표는 실내 흡연이 가능하지만 고용된 아빠는 사장의 눈치를 보며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된다는 설정.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질서와 가족의 위계가 무장해제되고 실질적인 역학관계에 의해 새로움을 갖추는 모습이 유쾌했다. 값없이 당연시 여겨지는 엄마의 가사노동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 딸의 자세에 박수를 보낸다. 구수한 된장국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콩을 수확하고 메주를 담아 장이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무수한 공력을 노동의 가치로 환산해서 지불하는 경영자의 헤아림이 현명한 오너답다. 아빠보다 가정에 더 큰 기여를 하는 엄마에게 더 많은 보수를 주는 가녀장과 그 나머지 부분을 채우기 위해 주말에는 다른 일로 성실히 노동하는 아빠의 모습도 멋지다.


자녀의 일터에 고용된 50대 중반의 가장 웅이 처한 상황과 나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 됐다.

50대의 중후반에 들어서자 싸늘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조직에서는 그쯤 일했으면 그만 일해도 되지 않냐는, 대우가 서운하면 나가라는 불친절한 위기감. 크든 작든 일터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안정적이지만 개인사업자나 프리랜서 특수고용직 형태의 사람들의 삶은 일상이 살얼음판을 내딛는 불안정함이다.

대학을 다니는 자녀의 학비를 마련해야 하고 대학에 진입하기 위해 사교육 학원비 부담에 전전긍긍한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해 생이 길어진 열로 해서 쇠해지는 부모를 돌봐야 하는 이중고에 놓여있다. 아직은 젊지만 곧 노인에 가까워질 50대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외면할 수 없는 가부장과 가모장의 짐을 지느라 무진 애를 쓰는 중이다.


저녁을 먹다가 딸이 우연히 펼쳐 든 엄마 아빠의 신혼여행 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며 말을 꺼낸다.

“아빠가 저렇게 마르고 홀쭉했어?”

“엄마 정말 예쁘고 날씬했네”

마치 엄마 아빠는 처음부터 중후한 몸매를 타고난 것이라 착각했던 모양이다.


우리도 한때는 꽃다운 20대의 청춘으로, 항상 젊고 화려한 시간을 사는 줄만 알았는데 어느덧 50의 중후 반을 거쳐가는 것뿐이다. 또래보다 상대적으로 늦게 가졌지만 아들과 딸을 얻었다.

자녀를 일찍 가진 웅이와 복희 씨가 딸의 일터에 고용되어 직원이 되는 행운이 내게 주워질 것 같진 않지만, 자녀란 존재가 나의 버팀목인 것엔 늘 감사하다.


만일 우리 가정에도 체계와 질서를 재편할 누군가가 나온다면, 웅이와 복희 씨만큼 활짝 열린 자세로 그를 겸손히 섬길 마음의 준비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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