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을 통해 100년 전의 세계를 감상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일제 강점기 중이던 조선의 여인이 어떻게 세계일주를 다녀올 수 있었을까?
의구심에 가득 차 책의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오늘에도 불가능한 세계만유기의 첫출발은 1927년 6월 21일 자 조선일보가 기록했다.
“여사는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먼저 러시아를 거쳐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의 유럽 국가를 거쳐 미국을 순회하고 돌아오는 데 1년 반의 시간 동안 각국의 예술품을 구경하고 올 예정이다. 여러 해 동안 있으면서 착실한 공부를 하고 싶지만 어린아이를 셋씩이나 두고 가는 터이므로 모든 것이 뜻과 같지 못합니다.”
중국의 하얼빈을 거쳐 시베리아의 드넓은 대륙을 가로질러 바이칼호에 다다르며 올려 보았던 오로라를 묘사한 부분이 경이롭다.
“하늘은 거울같이 투명하고 어지러이 빛난다. 그리고 거기에는 갖은 형상이 다 보였다. 이것이
오로라다.”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 주변에서 예수의 초상에 입 맞추고 성전에서 나오는 신도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시내의 교회당 정문에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문구도 걸려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위스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깊은 공감이 일었다.
“금강산을 보지 못하고 조선을 말하지 못할 것이며, 스위스를 보지 못하고 유럽을 말하지 못할 만큼 유럽의 자연 경색을 대표하는 나라가스위스요, 그중에도 제일 화려하고 사람 운집하는 곳이 이 제네바다. 제네바호수의 특색은 녹음 빛이다. 거기 햇빛이 쪼이면 황색이 되어 숲의 색깔과 분간하기 어렵다.”
금강산 일만이천봉도 가봤고 제네바 호수도 거닐었지만 아직 횡단철도는 타보지 못해서 부러웠다.
이때 영친왕 일행이 제네바에 방문해서 영국 일본 미국 프랑스 대표들이 나누는 군축회의에 참석했는데 파행되는 것에 안타까워했다고 적었다. 벨기에 네덜란드의 지형과 도시를 세세하게 묘사했고 틈틈이 그렸던 풍경은 미술 작품으로 남아있다.
벨기에 네덜란드의 지형과 도시를 세세하게 묘사하고 틈틈이 그림으로 남겼다.
“네덜란드는 평탄한 들판을 질주할 때 물 냄새가 나고, 지면이 낮아진다. 강이라 하면 흐르는 물이 없고 호수라 할진대 주위에 산이 보이지 않고 바다도 아니나 사방에 산이 보인다.”
헤이그에서는 “이준”을 생각하며 그의 묘소라도 찾아가고 싶었으나 알 수 없어서 경성에 계신 그의 부인과 딸에게 그림엽서를 보냈다고 했다.
프랑스에 머물면서 나혜석은 자유 평등 박애로 넘쳐나는 예술의 도시를 목격했다. 이태리의 곳곳에서 만나는 미술과 조각 예술의 향연이 매일매일 그의 예술혼에 지대한 자극을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삼천리 1932. 1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도 갔다. 영친왕과 각국 대신들의 연회석상에도 참석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성참정권자도 만나보았다."
교육받은 신여성이 인간평등과 자유가 만연한 유럽에서 더욱 강력하게 여성의 평등을 실현하고 있는 현장을 살았으니 조선의 처지와 여성과 아동의 지위에 얼마나 큰 좌절과 책임감을 느꼈을 것인가?
예술과 문명의 세상에서 고국을 현실이 떠올랐을 것이다.
베를린을 방문해선 교통신호등에 맞춰 안전하게 차량이 오가는 것을 보며 문명과 과학의 힘을 느꼈다고 기술하고, 영국에서 일어난 여권운동을 보며 조선의 여권운동에 관한 마음 가짐을 갖는다. 귀국길에 미국을 들러 마천루로 즐비한 뉴욕의 단상을 적는데 맨해튼의 고층빌딩에서 내려보는 도시 건물이 성냥개비를 쌓아 놓은 것 같다는 표현을 한다.
서재필과 김마리아 등을 만나 조선의 앞날을 이야기 나눴다는 대목과 메트로폴리탄의 대도시와 나이아가라 폭포 요세미티 공원에 대한단상이 오늘 우리가 느끼는 느낌과 너무 흡사해서 글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귀국선으로 이용한 배는 이천 명 이상을 수용하는 호화유람선으로 각기 다양한 시설과 오락이 제공되고 있음을 기록했다. 그 끝에 와닿은 요코하마 항과 마침내 도착한 부산항의 정경과 그를 맞아준 가족의 환대.
작가의 남편은 일본유학 후 일제치하에서 법조일로 장기근속을 한 터라 포상 차 유럽연수의 기회를 얻어 아내 나혜석과 함께 유럽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친정에서 자녀를 맡아준 덕에 조선의 여류 예술가이며 문인인 작가는 새로운 문물과 문명 그리고 인연을 만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성의 삶을 옥죄는 제도와 현실에 눈을 떴고, 세계여행이라는 해방구에서 만난 연인으로 인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손가락질과 냉대를 받았다. 백 년 후였다면 그냥 일상의 해프닝이나 로맨스였을 일인데.
읽는 내내 생생한 느낌이 되살리는 공감각의 복원으로 인해 즐거웠다. 조선시대 여인의 감성이 오늘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음에 묘한 희열을 느낀다.
“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로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랄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텅 빈 나는 미래로 나가자……
4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해라.
네 어미는 과도기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 나혜석 -
표지 : 나혜석 그림 " 스페인 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