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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구 Oct 08. 2021

연휴를 맞이하는 마음의 자세         

지갑을 잃어버렸을 망정 연휴를 망칠 수 없기에

9월 30일 목요일에 백신 2차를 접종한 아내가 금요일을 쉬었다.

아이는 등교를 했고 아내의 몸 상태도 과히 나쁘지 않아서 급하게 양평과 북한강 나들이를 제안했다. 전날 서종에 위치한 강변 옆 카페에 들릴 기회가 있었고 두물머리 쪽의 산책로를 익혀두었기에 이를 보여줄 심산이었다. 아내도 흔쾌히 좋다고 답하는데 목소리에는 이미 설레는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오빠 믿고 따라와 북한강변 드라이브시켜줄게!”

동갑 친구로 서로 이름 부르던 사이라 언감생심 “오빠”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나는 호기롭게

 “오빠”를 강조했다. “오빠 한번 믿어 볼게” 아내도 코웃음을 치면서 장단을 맞춰줬다. 나이 차가 있는 부부들이 쓰는 “오빠”란 단어가 풍기는 묘한 뉘앙스를 사뭇 부러워했었나 보다.     

차 키를 쥐고 소지품을 챙겨서 외출을 하려는데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늘 두었던 테이블 위에 없고 어제 입었던 외투에도 없고 가방에도 없었다. 옷장 안에 떨어진 건 아닌지 사방팔방을 뒤지다 어제 타고 이동했던 사무실 차량을 떠올렸다. 혹시 모르니 차량 안을 확인해 달라고 전화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고 했다. 어제 들렸던 동선과 마지막 지갑을 꺼내 지불했던 상점을 기억해 냈는데 아뿔싸 영수증을 받질 않아서 상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무엇부터 처리해야 하나?’ 

지갑에 있는 신분증과 운전면허증 그리고 국민카드와 우리 카드가 떠올랐고 카드 사용 정지가 먼저라고 생각되었다. 아침을 먹고 기분 좋게 출발하려는 타이밍에서 의도치 않은 난관을 맞았다. 아내에게 미안했고, 이것 때문에 일정을 포기하고 하루를 허비할 수는 없었다. 빨리 신고를 마치고 태연하게 일정을 소화하고 싶었다. 

이래저래 카드사에 중지 신청하고 신분증과 면허증도 도용방지를 위해 분실 신고를 마쳤다.

한가닥 위안이라면 은행 잔고는 그대로여서 누군가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든 마음을 가라앉히고 외곽 도로를 타고 서종으로 향했다. 

모양새는 좀 구겨졌지만, 어제 갔었던 서종의 테라로사 커피숍과 그 주변 상점을 아내도 좋아할 거라 믿었다. 먼저, 물건을 샀던 가계에 들려 혹시 습득한 지갑이 있었는지를 확인했는데 없었다. 그래도 테라로사에서 갓 뽑아낸 커피와 디저트의 맛은 달고 감미로웠다. 아내는 상점에서 파란색이 은은한 도자기 잔을 샀다. 구워서 만든 질감에 매혹적인 빛깔을 띠고 있었다. 흡족해하는 아내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다.      


테라로사에서의 커피 한잔


오른쪽으로 북한강을 끼고 양평으로 향하는 길은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였다. 사귀던 무렵에는 차가 없었으니 와보지 못했던 길이고, 아이들을 기르면서는 둘이서만 차를 타고 나설 기회도 드물었다.

양평에서 이름난 두부집에서 점심을 했다. 2인분에 파전이라도 추가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조금은 간소하게 먹고 수종사에 오르고 싶었다. 고바위를 올라야 하고 양쪽에서 차라도 지나면 약간의 위험이 따르는 길이었다. 이번엔 이곳을 그냥 지나치고 다른 곳으로 안내할까 했는데 아내는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가파를 길을 차로 오르고 더 험한 계단을 걸어서 수종사에 이르렀다. 

고색창연한 절의 외연과 오래된 나무와 꽃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내도 사찰의 구석구석을 돌며 처마를 덮고 있는 아름다운 빛깔을 담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단연코 수종사의 백미는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산아래의 풍광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높고 시원스러운 산마루의 선물이었다.

한적한 한강변의 국도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지갑을 잃어버린 조바심을 잠시 내려놓고 아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을의 정취를 즐겼다. 혹시나 지갑을 주웠다는 연락이 오지나 않을까 핸드폰을 주시했지만 그냥 하루가 지나갔다.


수종사에서 바라본 양평
운길산 수종사

 


다음날 토요일.

청명한 가을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이번엔 북쪽에 위치한 한탄강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콧바람을 쐬는 김에 장인 장모님과 딸을 대동해서 38선을 넘어 DMZ에 가까운 포천의 오랜 퇴적 지형을 찾아갔다. 교통량도 적고 으슥하기까지 한 길을 따라 들어가니 갑자기 확 트인 물가가 펼쳐진 곳이다.


 “화적연” 경기도 포천시 한탄강 상류에 위치한 연못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명승지
 - 2013년 1월 4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3호로 지정되었다.

주상절리와 퇴적암이 벽을 두르고 흐르는 강물 주변으론 각양각색의 조약돌이 펼쳐있는데 

강이 호수처럼 넓어지며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가 솟구쳐 있었다. 옥빛 물 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어르신들은 떨어진 도토리와 은행에 더 마음이 가시는지 가을 수확에 한참이다.

사람의 손길이 덜 간 자연 그대로인 듯한 한탄강가를 거닐다 출렁다리를 건넜다.

바닥을 유리로 덮은 구간에서는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은 아찔함이 몰려왔다.      

지갑을 잃어버린 불편함과 나의 칠칠치 못한 부주의 함을 자책하면서도 연휴의 기분을 망치지 않고 

모두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 안도했다. 허기진 배를 맛난 저녁으로 채우고 집으로 돌아오니 밤이다. 대체 휴일인 월요일까지만 일말의 희망을 걸어봤지만 신용카드를 급히 정지시키느라 하이패스가 안된다는 것을 도로 위에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화적연
출렁다리와 주상절리의 한탄강


화요일 사무실에 출근해서 정지시킨 카드를 재발급하고 신분증 만드는 서류도 꾸몄다. 

비생산적인 곳에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키고난 늦은 오후,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노원경찰서입니다. 신분증 분실하셨나요?”

“네 맞습니다. 바로 찾으러 가겠습니다.”

나의 검은색 지갑 안에는 신분증과 카드가 고스란히 꽂혀 있었고 심지어는 현금도 그대로 있었다.

눈물이 핑 돌고 감사한 마음이 불쑥 솟구쳤다.

“감사합니다. 어떤 분이 이걸 찾아주셨나요?”

민원담당 경찰이 답했다.

“개인정보 부분이라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아!...... 아무튼 너무도 감사합니다." 


훈훈한 기운이 번져왔다. 

믿을만한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이에게 깊이 감사했다.


"맘고생은 했지만 덕분에 연휴를 잘 보냈습니다. 

칠칠맞고 부주의한 오빠로 찍힐 뻔한 저를 회복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젠틀하고 배려심 깊은 오빠가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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