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일에 나는

by 김은우

1월 1일. 완전한 시작. 다른 날과 다를 것 없지만. 똑같이 동쪽에서 해가 뜨지만 똑같이 24시간이지만. 뭔가 특별해야 될 것만 같은 강박이 생기는 날이다. (자매품으로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남자친구는 휴일이지만 출근을 했다. 아침에 나에게 뽀뽀를 하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잠결에 이런 생각을 했다. 새해 첫날을 의미 없게 보내는 것보다 출근이 훨씬 나을 수도 있어. 아이쿠. 휴일 출근 하는 사람들이 들을라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한다고 그 생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렇게 한다. 뭐 아무튼 나는 새해 첫날에 스스로 부여한 엄청난 의무감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작년 1월 1일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을 봤다. 너무 감탄해 입을 틀어막았던 기억이 있다. 잔잔하지만 단단한 쇠파이프를 구길 만큼 강한 영화였다. 작년 새해 시작으로 <괴물>을 관람한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올해도 첫날 영화나 볼까 생각한다. 첫날 영화. 앞으로 새해 첫날엔 영화 관람을 일종의 루틴으로 삼아 그걸 ‘첫날 영화’라고 불러 볼까도 생각한다. 나는 정말이지 생각이 너무 많다. 보고 싶던 영화 <아노라>의 상영시간표를 찾는다. 마침 가까운 영화관.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관에서 알맞은 시간에 영화를 상영한다. 난 운명을 믿는다. 션 베이커 혹은 마이키 매디슨과 나는 운명일 수도 있다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나갈 준비를 한다.

나는 전생에 이화여대 학생이었으려나. 이대는 언제 와도 좋다. 마음이 편하다. 내가 항상 사람이 없을 때쯤 방문해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넓은 캠퍼스 안의 우아한 건물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직각. 직사각형. 내리막길. 계단. 커다란 유리창 등이 있는 이화여대 캠퍼스 콤플렉스. 아 여기가 진짜 좋지. 난 이대 중에서 여기가 제일 좋더라.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리며 영화관으로 향한다. 영화관은 진짜 좋은. 내가 이대 중에 제일 좋아하는 이화여대 캠퍼스 콤플렉스(ECC) 안에 있다. 아트하우스 모모. 여기서 내가 무슨 영화를 봤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보통 겨울에 왔던 걸로 기억한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과 ECC의 큰 유리창이 참 잘 어울린다. 겨울의 유리창은 정말 묘하기도 한데 얇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어떤 사람은 두터운 옷을 입고 눈을 맞으며 어떤 사람은 얇은 니트를 입고 커피를 마신다. 그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맞출 수 있는 게 재밌다. 마치 다른 우주에서 사는 두 사람이 만난 거 같은 그림이다.

12시 20분 <아노라> 한 장 주세요. 위치와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아트하우스 모모는 가격까지 저렴하다. 11,000원이요. 보라색 조명이 눈부신 스트립 클럽의 노동자들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션 베이커의 재치 있는 각본. 잘 정리된 편집. 도전적인 마이키 매드슨의 연기. 화려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영화. 유머러스하지만 인간의 깊은 곳을 이야기하는 영화. 시끄럽게 소리 지르다가 이내 침묵하는 영화. 모든 것을 벗지만 마음만큼은 숨기는 영화. ‘첫날 영화’ 올해도 성공.

찬바람을 맞으며 조금 걷다가 집에 돌아와 책을 읽었다. 집중이 안 돼 40페이지 정도만 보고 덮었다. 나는 집중력이 참 약하다. 병원에서는 미약한 ADHD라고 했다. 때문에 관련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변비만 생길 뿐 별 효과는 모르겠다. 책 읽기를 포기하고 떡국을 만든다. 남자친구가 돌아오면 따뜻한 떡국을 줘야지. 검색한 결과 떡국 만들기는 라면 끓이기보다 쉽다고 했지만 아니다. 라면 끓이기보다는 조금 더 번거롭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떡국을 완성했다. 때맞춰 남자친구가 돌아왔다. 1월 1일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출근이 더 낫다는 아침의 생각은 비밀로 한 채 휴일에 일 한 그를 안아준다. 고생했어. 어서 먹어. 맛있다며 맛있게 먹는 남자친구. 그걸 바라보는 나. 미소 짓는 나. 기분이 좋아 설거지까지 내가 한다.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서로를 안고 있다. 그가 나를 안아줄 때면 나는 내 겉에 있는 얇은 보호막까지 풀게 된다. 머리를 그의 가슴에 비빈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붙어있고 그의 손이 내 몸에 붙어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두 사람은 사랑한다. 나는 한 때 서로 좋아하는 사람 둘이 만나는 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몇 십 년 동안 떨어져 지냈던 사람 둘이 만나 죽을 듯이 서로를 아끼는 것. 그 기적은 널리고 널렸지만 기적이라는 건 널리고 널려도 좋다. 그래도 특별하다. 나는 속으로 아 완벽하다고 말한다. 2025년 1월 1일은 완벽하구나. 사랑은 특별한 거니까 그 특별한 걸 지금 하고 있으니까 1월 1일은 특별해야 하는 거니까 나는 원하는 바를 이뤘구나. 너와 내가 연결된 이 순간. 지금. 특별하고 완벽하다. 가만있자. 이건 언제나 할 수 있는 거잖아. 좋아하는 곳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저녁을 먹고 안는 삶. 나는 이걸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아 그럼 매 순간 1월 1일처럼 살 수 있는 거잖아. 나는 내 앞에 있는 기적을 안고 깨달았다. 매일 이렇게 살아야겠다. 매일 좋은 걸 보고 너에게 안겨 살아야겠다. 새해 첫날에 대한 강박적인 의무감이 어느새 사라지고 내 안에는 분홍색 기적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