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마주 보고 있다. 누가 현재이고 누가 과거인지 모른다. 왜냐면 둘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둘은 악수를 한다. 그리고 한 명이 손을 놓고 뒤 돌아 걸어간다. 그는 절대로 뒤를 보지 않고 앞으로 간다.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랐던 나는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저 상대적으로 남성성이 덜하고 남자아이들보다 여자 아이들과 노는 게 편했을 뿐이었는데 단지 이런 이유로 아이들의 목표물이 되었다. 우습게도 남자에게 여자 같다는 건 얕잡아 보기 쉽다는 말과 같았다. 근데 우습게도 남자에게 남자답다는 말은 대단한 칭찬에 가까웠다. 어렸을 때부터 칭찬보다는 야단에 익숙했던 난 웃음거리가 되기에도 놀림거리가 되기에도 쉬운 아이였다. 나에게는 무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태권도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었다. 축구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힘이 센 편도 아니었다. 이리보고 저리 봐도 아무래도 물리적인 힘으로는 무기를 만들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착한 건 힘이 좋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 이거다. 나는 착함을 무기로 만들었다. 이건 무기였기 때문에 보통 착한 정도로는 부족했다. 나를 놀리면 이상한 사람이 될 정도로 착해야 했다. 저렇게 착한 애를 놀리다니.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어. 이 정도쯤 되어야 했다.
타고난 기질이 나쁘지 않았던 탓에 어렵지는 않았다. 생글생글 웃고 친절한 말을 했다. 부탁을 쉽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의 착한 행동으로 인해 나타나게 될 상대의 반응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음침하다고 욕해도 상관없다. 놀림감이 되기 좋은 어린 남자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잘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내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에게 잘해주었다. 네가 그렇게 착하니. 그럼 뺨을 때려 봐도 되냐며 묻는 미친놈이 있었지만 결국 그 아이가 미친놈이 될 뿐이었다. 좋은 무기를 잘 사용한 덕분에 웃음거리 혹은 놀림거리가 되지 않았고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나처럼 무난함의 겉과 속은 달랐다. 속은 아팠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포장하는 일은 진짜 나를 숨기게 만들었고 그건 마음속에 균을 만드는 것과 비슷했다. 나를 지키기 위한 일 때문에 갉아먹는 균이 생기는 아이러니. 가끔은 뭐가 진짜 내 모습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포장지로 감싸는 걸 그만 둘 순 없었다. 웃음거리가 될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 이제 포장지를 벗기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30년을 흘러 보냈다.
문득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했다. 이렇게 살다가 결국 나는 포장이 뜯기지 못한. 아무도 내가 어떤 선물인지 모르는 가짜 선물이 될 것만 같았다, 계기 같은 건 없었다. 정말 갑자기 문득 그랬다. 포장지를 선택한 것도 행복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더 큰 행복을 위해 걸어갈 때라는 걸 몸은 알고 있었다.
진짜 나를 찾아야 했다. 해방되어야 했다. 그때부터 용기를 내서 스스로 포장지를 하나씩 벗겼다. 한 겹. 말투를 고치지 말아 보자. 한 겹. 좋아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보자. 한 겹. 화를 내보자. 한 겹. 한 겹. 이건 나에게 반란 같은 거였다. 눈치를 많이 보던 사람의 반란. 사랑받고 싶어 하던 사람의 반란. 하얀 날개를 검게 칠하는 반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던 반란.
자. 이제 누가 뒤 돌아 걸어갔는지 밝힐 차례다. 자세히 보면 세상과 그의 경계선은 조금 더 또렷하다. 표정은 조금 일그러져 있지만 미소를 띠고 있어 더 편안해 보인다. 주름은 자연스럽고 목소리는 상대방보다 조금 더 높다. 이런 내가 악수하던 손을 놓는다. 착하고 다정하기만 했던. 친절하고 우유부단했던. 남들이 하라는 대로 했던 또 다른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한다. 잘 가. 그동안 덕분에 안전했어. 하지만 이제는 안전하지 않아도 나로 살아볼게. 인사를 건네고 현재의 나는 뒤 돌아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지 본인도 모르지만 그곳엔 자유와 해방이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