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간 눈. 자연스러운 코와 입. 얇지도 넓지도 않은 적당한 턱. 중단발의 검정 생머리. 원색이 잘 어울리는 피부. 투명함. 섬세함.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재능. 호감을 주는 힘. 레몬이나 자두 혹은 천도복숭아. 깊은 사색. 그를 생각하면 대체로 이런 것들이 생각난다. 맑은 힘을 가진 것들. 가득 차 있는 사랑. 이런 것들.
중단발이 잘 어울리는 그는 우리가 처음 마주했을 때도 중단발을 하고 있었나.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확실한 건 눈이 참 예뻤다. 그는 웃으면서 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는 자주 미소를 짓고 자주 웃는다. 그 웃음은 전염병 같은 거여서 보고 있자면 상대방도 저항 없이 웃게 된다. 그런 힘이 있는 사람이다.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나와 주파수가 맞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빠른 속도로 친해졌으면 체 했으려나. 우리는 더디게 친해졌다.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지 않아 그랬고 내가 그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다. 그는 잠깐 나누는 대화에서도 섬세함이 드러났다. 예쁜 언어를 쓰며 조곤조곤 말하는 그. 어떤 언어를 써도 어색하지 않고 사랑스러운 그. 봄 공기 같았다. 맑고 시원하고 따뜻했다. 시시때때로 나오는 그의 배려는 터득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오는 중심과 가치관은 꽤나 단단해서 그가 많은 생각 끝에 얻어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제 부쩍 친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서로에게 스며들 듯 안전한 속도로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친해질수록 그에게는 봄의 공기뿐 아니라 사계절의 공기 모두 있다는 걸 알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계절 사이의 어떤 것까지. 이것 그리고 저것. 그리고. 그리고. 그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그리고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어쩜 그리고 게다가 그리고. 우리의 수다는 시답지 않은 말장난을 하거나 우울에 관한 이야기. 과거와 미래. 희망 따위가 섞여있는데 농담과 반농담의 비율이 적절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참 적당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장점들을 질투한다.
그는 나에게 필름 사진과 수영을 알려주었다. 필름 사진은 나에게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방법이어서 나는 그에게 기억하는 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고 수영은 나에게 해방감을 주기에 나는 그에게 해방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겁먹지 않고 보채지 않고 차분히 알려주는 그의 눈. 그 눈은 진한 갈색 산호초 같구나. 그가 나에게 처음 수영을 알려주던 때가 생각난다. 제주도의 바다에서 그는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을 함께 헤엄치자고 했다. 나는 해방감이 엄청날 그걸 매우 해보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손. 그는 하얀 다섯 손가락이 있는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줄 테니 저기까지 가보자고. 할 수 있다고 웃던 그 웃음을 나는 기억한다. 말간 웃음. 상대방도 웃게 만드는 무서운 전염병. 나는 헤엄쳤다. 무서웠지만 그럴 때마다 바다의 풍경을 느끼려고 했고 몸에 힘을 빼려고 헸고 무엇보다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를 보려고 했다. 그는 나를 헤엄치게 만들었다.
우정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 본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 원뿔과 정사각형. 모양이 없는 것의 장점은 어떤 모양으로든 설명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정. 우정은 말간 눈. 자연스러운 코와 입. 얇지도 넓지도 않은 적당한 턱. 전염병 같은 미소. 중단발이 잘 어울리는 얼굴. 투명함. 뭐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