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프라이데이의 시작은 창대했으나···(더보기)
** 런던 3일 차
자, 이제 시작이야, 렛츠코- 포켓몬스터 OST를 흥얼거리며 다시 뮤지컬거리로 나갔다. 어젯밤 뮤지컬 라이온킹을 본 뒤로 뮤지컬 '뽕'에 가득 찬 상태이기 때문에, 오늘도 데이시트 티켓을 구해 뮤지컬을 볼 참이었다. 뮤지컬 <알라딘> 데이시트 티켓을 구한 뒤 오늘부터 지낼 다음 숙소로 옮기기 위해 캐리어를 챙겨 나왔다.
오늘부터 묵을 숙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에어비앤비로, 런던의 부촌에 위치한 아파트라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대신, 1박 당 금액을 10만 원 정도 냈으니 나로서는 꽤 큰 비용을 낸 셈이었다.
숙소는 관광지에서 좀 떨어진 주택가에 있었고, 갈색 벽돌로 지어진 좀 오래되어 보이는 아파트였다. 층이 그리 높지 않다는-기껏해야 10층 정도 될까-점과 엘레베이터가 없다는 점, 어느 문에도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빼면, 인도를 사이에 두고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아파트 단지나 빌라촌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지 내에는 작은 공원이 있고, 공원에는 손잡이를 잡고 허리를 고정한 채 왼쪽, 오른쪽을 몸통을 돌리며 허리운동을 할 수 있는, 이름은 모르지만 등산로나 천변에서 많이 봐 온터라 눈에 익숙한 운동기구도 두어 개 보였다.
나는 캐리어를 들고 숙소가 있는 7층으로 올라가며 이곳에서, 런던에서 사는 상상을 했다. 여기 살면 저 우편함에서 편지며 고지서를 꺼낼테지. 현관 문을 열때마다 찌르릉 벨이 울릴거고, 수없이 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할 거고.
내부는 리뉴얼을 한 모양인지 넓고 쾌적했다. 부엌이 따로 있었고 침실에는 스탠드조명과 앉아서 쉴 수 이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 행거가 있어서 옷을 걸어둘 수 으며 침대도 정리를 미리 해둔 모양이었다.
화장실은 샤워부스가 따로 있는데다 청결하기까지했다! 이런 곳이라면 정말 살아볼 만 하겠어······.
이 완벽한 숙소의 한가지 문제는 난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에어비앤비 관리인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와 열띤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너무 늦어서 아무도 와줄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참말로 애석하게도, 오늘 이 숙소에 난생 처음 온 나뿐이라는 것이었다.
난방이 안됩니다만, 라디에이터 잠금장치를 풀어보세요, 그래도 안됩니다, 의 반복되는 실갱이 속에 고분고분해진것은 당연히 내 쪽이었다. 11월의 런던은 춥단 말이다. 집에 조금이라도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원리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 관리인이 시키는 대로 몽키스페너로 라디에이터 잠금장치를 조였다 풀었다 반복했다.
라디에이터를 수리하러 한밤중에 급하게 달려온 난방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출국 전 휴대폰이 제 맘대로 꺼졌다 켜졌다 한 것처럼, 라디에이터도 결국 돌아가게 되었다. 고장 난 텔레비젼을 손으로 때리고 발로 치다가 치직-켜지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한밤중의 맹렬한 노동에 탄복한 라디에이터가 내 손을 들어주었다는, 얻어걸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몽키스페너를 손에 쥔채로 이런 망할, 이 한겨울에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숙소를 하루에 10만 원이나 받아 챙겨-이 괘씸한 숙소를 어디에라도 고발해야겠다는 분노에 사로잡혀 스페너 사진을 몇장 찍었다. 블라인드가 완전히 접히지 않아 전망이 어설프게 보이는 그곳에서의 첫날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숙소 부엌을 살펴보니 계란과 식빵, 햄과 딸기잼 등 간단한 먹거리가 있어서 굳이 장을 볼 필요가 없었다. 그것들로 토스트를 만들어 아침으로 먹었다. 집주인이 준비해 놓은 넉넉한 식재료와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이국적인 풍경, 그것이 주는 감동에 한껏 젖은 나는-숙소에 대하여 급하게 솟구친 호감으로-바깥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대체 뭣이 중헌디······.
오늘은 자연사 박물관에 가서 커다란 공룡과 코끼리의 뼈를 볼 것이고, 대자연이 주는 위엄에 압도되어 이렇게 하찮은 인간사,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일에 미련하게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블라인드가 제대로 안 닫히면 어떻고, 난방이 수동이면 어떤가.
자연사 박물관은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여행 가면 유독 창밖을 많이 보게 된다. 차창밖으로 한국에도 있는 SPA브랜드가 하나 둘 지나쳐갔다. 망고(과일 말고)···자라(동물 말고)···아, 영국에도 저 브랜드들이 있구나. 25% 할인···할인? 내가 런던에 간 때는 11월 중순, 11월 중순-말의 유럽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게 있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된 것입니다.
망고와 자라 매장에서 내가 환장하는 류-스팽글 드레스 등 모든 화려한 옷들이 쉼 없이 내게 윙크를 날리고 있었고···나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린 것처럼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대자연이 다 뭐람···난 저 드레스를 가지고야 말겠어······.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란다. 블랙프라이데이다운 빅, 빅할인이 적용될지라도 말이지. 나는···그런 생각을 하면서···스팽글로 장미 무늬를 수놓은 가방, 영국드라마 <다운튼아비>에 나오는 백작 가문 영애들이 들 법한 1920년대 유럽의 플래퍼아트데코백 등등을 내려놓았다. 이 아름다운 것들과 조금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했다. 나는 연보라색 머플러를 두르고 패딩 깃을 빳빳이 세운 다음 블랙프라이데이에 몰린 매장 내 인파를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밖으로 나가 카페로 가서 오렌지껍질이 올라간 라이스푸딩을 시키고, 핸드크림 맛이 나네···,라고 생각하며 길 건너 맞은편에서 조앤더주스를 발견하고 반가움에 희미한 간판 사진을 찍었다. 삼성이 아니라도 뭐든 한국에 있는 브랜드를 만리타국에서 발견하면 급작스런 애정이 샘솟기 마련이다.
내친김에 해롤드 백화점도 갔다. 해롤드 백화점에서 로비 장식만큼이나 호화로운 드레스에 파묻혀 있자니 오히려 저렴한 편이네···라고 생각하며(이쯤 되면 가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이집트 신전처럼 꾸며놓은 로비를 지나···거대한 돼지 뒷다리 햄이 매달려 있는 식품관을 거쳐···알라딘을 보러 다시 뮤지컬거리로 돌아왔다. 저녁으로 극장 근처 오니기리 가게에서 주먹밥과 된장국 세트를 시켜 먹고 물 한 병을 샀다.
공연 중간에 마시려고 산 물을 두고 나온 걸 눈치채고 허겁지겁 되돌아갔지만 물은 사라지고···쓸쓸하게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깟 생수 한 병이 뭐라고 그걸 가져간담.
관람 시간이 될 때까지 극장 주변을 배회하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사람이 북적이는 나타 가게에 들어갔고-현지인 맛집이려나 싶었겠지-굉장히 맛있는 에그타르트를 먹게 되었다. 베리맛, 초코맛, 플레인맛 세 개를 사서 한입씩 먹고 남은 건 내일 아침으로 먹어야지, 하고 가방에 소중히 넣어 놓았다.
이 나타(포르투갈식 에긑타르트)는 런던을 떠날 때까지 내가 영국에서 먹은 것들 모두를 합친 것 중 베스트 2에 들어갈 만큼 굉장히 맛있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나타를 찍은 사진에서 망고(과일이 아닙니다) 쇼핑백이 보이는 걸 보니, 분명 뭘 사긴 한 모양인데-그렇게 징징대놓고?
대체 무엇을 샀는지 기억이 영 나지를 않고···원하던 걸사지 못했다는 설움만 생생하게 남았기 때문에 아래 사진에서 망고에서 뭔가 샀다는 증거를 남긴 쇼핑백을 발견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뭘 사기는 샀구나? 그런것치고 굉장히···6년이 지난 지금도 억울하길래 아무것도 못사고 나온 줄 알았네. 분명히 장담하건대 허튼것을 사지는 않았습니다(을 것입니다)!
뮤지컬 <알라딘> 무대는 <라이온킹>에서 느꼈던 웅장함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영화 <물랑루주>의 공연 무대처럼 알록달록한 화려함이 가득 차 있는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무대였다(빨간 네온사인이 빛나는 하트가 난무했었다···는 기억이다). 라이언킹을 처음 보던때 느꼈던 벅찬 감동은 한 김 식은 뒤였기 때문에, 전보다 덤덤해진 기분으로 뮤지컬을 봤다.
뮤지컬 내용이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다르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고, 알라딘이 참···근육질이군, 이라고 감탄했던 것만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빨간 이층 버스를 타고 숙소로 되돌아가는 길,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뮤지컬 보고,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또···(씨스타의 '나 혼자'를 머릿속으로 재생시켜 주세요), 혼자라서 느낄 수 있는 이 고독함, 외로움은 미나리나 밤잼이 주는 기분 좋은 씁쓸함이었다. 혼자인 게 나쁘지 않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시차에 잘 적응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묵혔던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몽키스패너로 난방을 조절해야 하고, 블라인드가 완전히 닫히지 않는 7층 아파트의 내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