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폰과 함께 런던에서 포르투로 떠나다
** 6일째
오늘은 드디어 포르투갈의 포르투로 떠나는 날이다. 왜 리스본을 들리지 않았는지, 포르투갈 첫 여행으로 왜 포르투를 골랐는지 지금으로서는 좀 의문이다
(누구 여행 후기 보다가 꽂혔겠지 뭐). 런던 다음 행선지로 포르투를, 포르투 다음 경유지로 2박을 묵는 곳이 밀라노였으므로 나의 이동 경로란 어차피 뒤죽박죽이었다.
샤워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챙겨 욕실로 갔다. 혼자 여행을 갔다가 휴대폰을 놓고 화장실에 들어갔고 그러다 문이 잠겨 죽었다는 어느 여행객의 비극이······내게도 일어날까 걱정되기도 했고, 씻을 때 영상이나 음악을 틀어놓는 것은 내 습관 중 하나였다.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샤워부스 안에서 씻고 나왔고······아마 샤워부스 안까지 휴대폰을 들고 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설마 그렇게까지······휴대폰에 물이 들어간 탓인지 휴대폰 화면 위로 보라색 얼룩이 점점 사악한 바이러스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고 곧 화면 전체를 삼켜버릴 기세였다.
출국 전에도 휴대폰이 제멋대로 꺼지는 위기가 닥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지금 나는 만리타국에서, 그것도 런던에서 포르투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예정이란 말이다. 구글맵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어디로 옮길지 모르는 낯선 곳에서 휴대폰의 지도 기능 상실은 그 무엇보다 내게 타격이 큰 카운터펀치였다.
마침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온 형부에게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현재 상황을 전했다-위기에 닥치면 꼭 누군가에게 수다를 떨고 싶어 진다-.
- 형부, 휴대폰이 고장 난 것 같아요. 곧 꺼질지도 몰라요.
- 아이폰을 사! 지금이 기회인 것 같다.
(곧 아이폰 구매 사이트 링크가 날아온다)
(가격을 확인한다······아아······한숨이 나온다)
(TMI. 나는 쭉 갤럭시 유저로 살아왔다)
아이폰은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가격에 적응하기가······라고 형부의 조언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아이폰을 새로 사기에는 어차피 시간이 부족했다. 당장 체크아웃을 해야 했고 비행기 시간을 맞추려면 곧 지하철을 타러 가야 했다. 아이폰을 새로 사고 세팅할 정신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좀비 바이러스에 잠식해 가는 휴대폰이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바라며 근처에 휴대폰 수리할 수 있는 가게가 있는지 뒤져보았다. 예스, 다행히 포르투행 비행기를 탈 공항 가는 지하철역 내부에 휴대폰 수리가게를 찾았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으므로 나머지 지불해야 할 돈과, 집열쇠, 몽키스페너를 창가에 올려둔 다음 집주인과의 소원했던 관계를 떠올리며 혹시 뒤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방 이곳저곳 사진을 좀 찍은 다음 캐리어와 어제 꽃시장에서 산 꽃다발을 챙겨 빅토리아 역으로 드르륵드르륵 떠났다.
빅토리아 역 내부에 과연 휴대폰을 고쳐준다는
'ismash'라는 가게가 있었고(아이러니하게도 smash란 박살 낸다는 뜻이 아니던가?), 후드티를 입은 무표정의 직원이 휴대폰을 요리조리 보더니 흔쾌히 수리를 해주겠다기에 지체 없이 직원에게 휴대폰을 맡겼다.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해서 그가 휴대폰을 수리하러 사무실로 들어간 동안 위층으로 올라가 길거리에서 많이 보이던 카페 '코스타(costa)'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러다 비행기를 놓치면 어쩌지. 시간 놀리기에 휴대폰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는데. 나는 전전날 만났던 M이 챙겨 준 공책과 볼펜을 꺼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그렸다. 커피 머신, 머신 위에 놓인 컵들, 머신에 가려진 시럽통들, 가게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며 미리 예약해 둔 내셔널 익스프레스가 내게서 영영 떠나가고 있음을 탄식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리면 기차에 이어 비행기도 놓치겠다고 생각했을 때쯤 가게로 내려갔다. 처음 나를 맞아 준 직원은 역시 무표정으로 내게 투명스티커가 화면에 붙여진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은 다행히 깨끗했다. 바이러스로부터 치료된 것이다! 이렇게 실력 좋으신 분이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나를 ma'am이라고 불러준 걸 보면 정중한 영국 신사임에 틀림없어. 나는 외국에서 외국으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에 불어닥친 위기를 직접, 현명하게 해결했다는 뿌듯함에 취해 카드를 내밀었다. 수리 비용이 180불, 약 25만 원이라는 걸 알게 되자 예상에 없던 큰 지출 때문에 손이 떨렸지만 무사히 포르투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비용이야 얼마든지······얼마든지······.
다행히 비행기는 놓치지 않았다. 런던에서 포르투로 넘어가는 저가비행기였기 때문에 수화물 키로수를 맞추느라 물병을 공항 쓰레기통에 버리고, 비행기에 탄 뒤로는 공짜로 물을 달랄 수 없었기 때문에 목이 간지러울 정도로 말라갔다. 그 와중에 꽃다발에 대한 집착으로 바득바득 그 짐덩어리를 들고 비행기에 올랐으므로 머리 위 짐 싣는 칸에서 삐죽 튀어나온 장미꽃이 흔들리는 낭만적인 비행이 시작되었다. 3시간쯤 흘렀을까, 칼칼한 목을 부여잡고 포르투 공항에 내렸다.
런던과는 또 다른 이국의 낯선 향기가 공기를 떠다니고 있었다. 포르투는 참 날씨가 좋았다. 한국의 가을처럼 파아랗게 맑은 하늘과 선선한 날씨는 걸어 다니기에 정말 딱 좋은 날이었지만 내가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는 너무 언덕에 있었고, 포르투는 돌이 촘촘히 박힌 울퉁불퉁한 길이 천지로 깔려 있었기 때문에 발목에 통증이 우르르 몰려왔다.
숙소에 짐을 풀고 약국으로 가서 발목이 삘 때 바르는 약과 보호대 등을 사서 돌아왔다. 정각이면 울리는 우아한 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드디어 무사히 포르투에 도착했다는 감동이 종소리와 함께 댕댕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