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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Feb 08. 2022

사람을 그리듯 서체 디자인하기

내가 서체 디자인을 사랑하는 이유


나에게 서체는 사람이다. 사람을 그리듯 서체를 그린다. 그 사람의 눈꼬리, 입꼬리, 얼굴의 각도와 표정, 눈빛과 분위기, 에너지, 말투가 서체로 그려진다. 어떤이의 걸음걸이는 터벅터벅, 누군가는 휘적휘적, 또 다른 이는 탕탕탕일 수도 있다.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듯 서체를 디자인한다.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서체를 만드는게 내 작업 방식이다. 상상 속의 인물이 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때면 나는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가 된 것 같다. 글을 쓰는 글자를 만드는 일이니 연관성이 없진 않겠다.


나는  BI 디자인을 주로 하다보니 로고에 사용할 수 있는 특징이 뚜렷하고 독특한 서체 위주의 작업을 한다. 가독성이 좋고 눈이 편안한 본문용 서체도 언젠가 꼭 작업해보고 싶지만 주목성이 강한 서체 작업이 지금의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거라 생각한다.



Becoming Serif Typeface 

Becoming Serif Typeface

경쾌한 굴곡과 날렵한 직선의 대비가 조화를 이룬 세리프 서체이다. 고요한 물결에 파동을 일으키는 모습으로 얌전하고 진지한 것 같지만 가끔씩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상이다. 안정적이지만 그 안에서 모험 할만한 건 시도하는, 부드러운 것 같지만 뾰족하고, 겉과 속을 때론 알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디자인했다. 


네 저에요.

Becoming Serif Typeface

서체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일도, 삶도 진정한 내가 되고자 만든 서체이다. 그래서 이름도 Becoming이라 붙였다. 영화 비커밍 제인처럼, 비커밍 다움. 


저 서체를 완성하고 런칭했을 때 그 홀가분함과 뿌듯함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오래하고 싶고 잘하는고 싶은게 이거구나. 글자를 만드는게 이렇게 재밌는거구나. 첫 서체 작업을 나를 위해 만들었다. 시작을 나를 위해 내딛였다. 모든 면에서 그 의미가 큰 서체이다.

Becoming Serif Typeface - 내 인스타그램 @deep_blue____로고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를 위해 일하는 ‘을’의 위치이다. 그러다보니 나를 위한,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은 할 기회가 거의 없다. 이렇게 나를 주제로 서체를 만들고나니 자존감까지 높아졌다. 일을 통해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다니, 이거 정말 굉장한 일이다. 



Melange Serif Typeface

Melange Serif Typeface

멜란지는 뽐므 [여인에게] 앨범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나온 로고 시안 중 하나를 서체로 발전시킨 작업이다. 그 앨범은 부드럽고 섬세한 여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빛나며 고요히 물결치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는 가사와 운율, 고요함과 따뜻함, 그 속의 강인함. 


한장의 앨범이 나오기까지 아티스트는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앨범의 완성과 함께 나비가 탄생하듯 한꺼풀 벗겨내고 진화한다. 스스로 나아가는 이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빛을 뿜어낸다. 앨범을 함께 만드는 내내 그녀는 반짝였고 자유로웠다. 빛나는 실크 리본이 훨훨 춤추는 모습. 그게 멜란지다. 

Melange Serif Typeface

이 서체의 이름을 지을 때 정말 많은 고민을 했는데, 여러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담으면서도 어감이 부드럽고 포근하고 말랑말랑하고 했으면 했었다. 그러다 멜란지라는 단어를 발견했고, 그 의미가 완벽하게 서체의 스토리와 맞아 떨어졌다. 


Melange는 여러가지의 혼합물 또는 지층이 크게 흔들리면서 복잡한 지질구조와 역단층이 발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균열을 통해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균열을 지나 단단해진 누군가의 모습을 담고자했고 만드는 내내 나 또한 강인해진 느낌이었다. 또한 혼합물에 의한 복잡합 구조라는 멜란지의 이름 뜻처럼 Serif이지만 Sans Serif의 디테일이 있는 복합적인 형상이다. 

Melange Serif Typeface


서체 이름을 짓는 나만의 법칙


1) 철자

서체의 이름을 지을 땐 그 의미는 물론 철자도 중요하다. 디자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주요 철자가 들어간 단어여야하기 때문이다. 멜란지는 소문자 a,e, g등의 리드미컬한 요소가 특징인데 Melange에 다 들어가 있다. 멜로디의 멜이 연상되기도 하는 발음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내가 찾던 이름이었다. 


2) 철자 갯수

그 다음으로 고려하는 것은 철자의 갯수이다. 철자가 길어지면 웹사이트에 업로드되는 이미지에 글자가 작아질수 밖에 없다. 그러면 디자인이 잘 안보인다. 주목성이 좋으려면 3-7자 내외의 갯수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3) 한국어 발음

또한 영어 서체이다 보니 한국어 표기는 크게 신경쓰진 않지만 내가 한국인이라 발음하기 편하게 하고 싶어 어느정도 고려한다. 내가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서체가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위의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는 이름을 찾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내가 영어권 사람도 아니다보니 사전과 구글링으로 단어를 찾아내야란다. 그래서 얼른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고 싶다. 절호의 순간 영어가 내 길을 막게해선 안되니까. 공부하자!



DANGER Slab Serif Font

영국에 여행을 갔을 때 거리에서 건물을 공사중인 크레인을 보았다.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공사장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이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숙소로 돌아와 공사장의 철근 구조와 크레인의 특징을 담은 서체를 러프하게 스케치했다. 

런던 거리에서 만난 공사장 풍경


왜 그 풍경에 매료되었을까? 


분명한 이유를 찾지 못한채 작업을 시작했고, 이유를 정립하지 못했기에 작업의 진행이 더뎠었다. 한 조각, 한 조각씩 이유를 찾아갔고, 서체에 살이 붙으며 구체적인 형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체가 완성될 무렵 나는 확실한 이유를 찾아냈다.


영국에 갔을 당시 나는 아직 자아를 덜 찾은 때였다. 디자이너로서 정체성 또한 흐릿한 시기였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었기에 건물을 짓는 과정에 있는 공사장이 나와 비슷해 보였던 것 같다. 


단단해지는 과정은 위험하다. 다치기 쉽고, 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 하나씩 돌을 쌓아가다보면 어느새 안전한 집이 완성된다. 튼튼한 결과물은 위험을 감수해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끄럽고 어지러운 공사장 풍경에서 오히려 안전함을 느끼고, 철근과 크레인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건 내가 단단해지는 과정 중에 있어서였다. 


그래서 이름이 Danger가 되었다. 위험하지만 실상은 가장 안전한 이름으로.

DANGER Slab Serif Font
DANGER Slab Serif Font

한가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사방 모서리가 직각으로 떨어지는 슬랩체의 경우 소문자가 거의 없는 편이다. 모서리 각도 때문에 소문자 s나 g같이 디테일이 많고, 내부의 여백이 좁은 글자는 표현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만들고 싶어지는 거다. 까짓거 내가 해내겠어!! 하면서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턱턱 막히는 소문자에서 세상 모든 의욕을 잃었었다. 하지만 결국 소문자까지 완성했다! 온 동네 방네 소문내고 싶지만 소심한 관종으로서 겸손히 내 자랑은 내가 하는게 아니야 입닫아..! 하고선 글로 적는다.



내가 서체 디자인을 사랑하는 이유

최근 작업 중인 서체는 똑똑하고 진지하지만 자유롭고, 냉철하지만 다정한 인물을 상상하며 스케치했었다. 철학자이지만 고리타분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사람을 그려나갔다. 그런 실존 인물이 어디 없을까 하던 어느날, 알베르 카뮈의 책을 읽었다. 내 상상 속 인물은 바로 그였다. 저 서체는 카뮈를 주제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카뮈의 말투, 표정, 제스쳐 등 만나본 적은 없지만 꼭 만나보고 싶은 인물을 서체를 통해 만난다. 

서체를 만들며 나를 알아가고,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었다. 서체가 얼마나 매력적인 분야인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도 싶다. 자기다움을 찾는 이에게 용기를, 아름다움을 보는 이에게 사랑을 주며 그렇게 서체를 만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 즐거운 작업을 최대한 오래, 나이들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하고 싶다. 


서체 구매 링크

https://creativemarket.com/Dauum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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