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수안 Jan 28. 2024

잊지 못하는 장소: 학교 미술실


   나는 중학생 때, 경상북도 경산에 있는 기숙형 중학교를 다녔다. 교장선생님은 우리 학교를 명문학교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그래서, 훈화 말씀을 하실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튜던트는 스터디를 베리 하드 해야 합니다. 아워 스쿨은 대명문 00중학교가 될 것입니다.” 식의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문장을 구사하셨다. 그분의 뜨거운 열정으로, 우리는 매일 10교시 수업을 했다. 9-10교시는 선택이라 쓰여있지만 필수였다. 세 반으로 나눴는데, 영어/수학 집중반, 악기부, 미술부가 있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선생님과 엄마의 등쌀에 떠밀려 영어/수학 집중반에 들어갔다. 악기부는 대명문중학교답게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구성되었는데, 장교 출신 음악 선생님에 의해 하나의 군대였다. 철저한 위계질서로 선배의 무서운 군기가 오케스트라의 칼박을 만들었다. 미술부는 나른한 분위기의 미술 선생님에 의해 운영되었다. 나의 선택은 미술부였다. 


  미술부는 전교에서 달랑 10명 남짓의 부원만이 있었다. 1학년 중에는 은희와 나, 이렇게 두 명이 신입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미술실에서 널찍한 자리를 차지하고 과자를 먹으면서 그림을 배웠다. 미술부의 분위기는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에 미술실은 내 공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은희는 그림을 잘 그리네, 색감도 좋고!”

  “음……..…, 안백수는 참 성실해.”

선생님은 최선을 다하셨다. 하지만 난 알아차렸다. 그렇다. 나는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선생님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중학생 시절 동안 미술부를 떠나지 않았다. 성실하게도 말이다. 대부분 부원은 학년을 올라가면서 학업반으로 옮겼고 실력이 좋았던 은희는 일진 무리와 어울리다가 결국 자퇴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술부 인원은 10명에서 3명이 되었다. 그리고 학교 내 미술 관련 잡일의 1/3은 내 차지가 되었다. 선생님이 건내주신 책자를 바탕으로 디자인 프로그램인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익혔다.학교 행사에 쓸 포스터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또, 명문 중학교에 맞는 ‘엘레강스한 입구’를 미술선생님께 지시하신 교장선생님 덕분에, 온몸에 페인트 묻어가며 교문 바닥에 영어 지구촌 모양을 칠했다. 이 외에도 학교 생활동안 학교에 필요한 잡다한 그림 작업은 미술선생님과 부하들 같은 느낌으로 해치웠다.  


  중3이 되자마자 자연스럽게 미술부장이 되었다. 미술 실력은 크게 성장한 건 없었지만 잡다한 기술은 많이 익혔다. 1학년 때는 수채화와 구성을, 2학년 때는 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웠다. 열심히 하긴 했지만 다른 친구들처럼 성과는 없었다. 미술대회 상도 전무했다. 그러던 중, 가을에 경상북도 미술 대전이 열린다는 공고가 떴다. 풍경화 부문에 작품을 제출해야 했는데, 선생님은 나를 지목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물감인 아크릴을 소개해 주셨다. 아크릴 물감은 다른 물감과는 속성이 달랐다. 틀리면 망하는 수채화와는 달리, 수정이 용이했다. 틀리면 그냥 다른 색을 덮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선을 그을 때, 색을 칠할 때마다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색을 과감하게 덕지덕지 얹을수록 지저분하기보단 깊이감이 느껴졌다. 평소 지저분한 그림체였는데, 아크릴과 잘 맞았다.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앉아 지치지 않고  재미있게 그리는 나의 미래가 희미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에게 물감을 사야 한다고 전화할 때마다, 수화기 너머로 ‘우리 형편’, ‘그림은 취미’, ‘공부’라는 단어가 한숨과 함께 돌아왔다. 나는 엄마에게 “이건 그냥 미술부원이라 나가는 거지 ” “중학교 때까지만 하는 취미지.”라고 답했다.  말보다 실력으로 보여주면 부모님의 생각이 달라질 거라 기대했다. 그래서 이번 미술 대전을 통해 부모님을 설득하기로 했다. 미술실 키를 받아, 평일 저녁과 매주 일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홀로 미술실에 가서 캔버스에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5개월 동안 그린 여러 개의 아크릴화 중에 내천과 다리가 걸쳐진 시골 풍경화를 골라 대회에 제출했다.   


   그 후 한 달 즈음 후, 미술 선생님께서 우리 반 수업에 와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번에, 효선이가 동상 받았더라.” 드디어 됐다! 속으로는 만세를 외쳤지만, 소리 없이 얼굴만 빨개졌다. 다음날, 상장이 도착했다. 상장을 받자마자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다. 망했다. '동상'이 아니라 [입선]이었다. 선생님이 착각하셨다. 잘못 알려주신 미술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주의깊게 상장을 읽고, 알려주시지. 하루 전날 높게 들뜬 마음만큼 충격은 컸다. 입선이 아니라 가망없음으로 읽혀졌다. 그 날, 엄마에게 입선 소식을 알리면서 공중전화 박스에서 펑펑 울었다. 엄마 말이 맞았다. 선생님 말이 맞았다. 내가 미술실에 시간을 쏟는 건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미술실 키를 선생님께 반납했다. 


   중학교 이후, 미술과 전혀 관련 없는 진로를 선택하고 취업했지만,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미술과 연관된 직종이나 분야를 보면 두근거린다.  미술 선생님의 칭찬을 곰곰이 곱씹어본다. 어라, 은희보다 날 더 칭찬한 게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성실성이 오히려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필수 요건이지! 오래 버틸 수록 하나라도 더 남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 인터스텔라 주인공처럼 시공간을 돌아갈 수 있다면, 재능따윈 없다고 공중전화 박스에서 쭈그려 앉은 나한테 속삭여주고 싶다. "그거 특급 칭찬이야!"라고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림을 그리려 노력한다. 그러다가 가끔 자신이 없어질 때가 생긴다. 중학교 때 그림으로 목표한 걸 못이뤄서 한이 되서 이렇게 집착하는 건가 하고 말이다. 그러다가, 이 걸로 지인과 대화를 나눴다.  

"내가 그림을 계속 하는 게 중학교 때 못한 미련일까?"

" 어떤 일을 10년 넘게 배우고 꾸준하게 하는 것은 좋아하는 거야." 

 결국 성실함은 좋아한다의 다른 말이다. 무엇인가 꾸준히 한다는 건, 좋아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집착이나 한이나 미련이 아닌,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어쩔 수 없는 방향성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누구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