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 은밀한 손짓

아무런 연고도 환상도 없던 그곳으로

by 소로

서른 중반,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중남미 여행은 계획에 없었다. 몇 가지 퇴사의 변 중 하나로 여행을 슬쩍 끼워 넣었을 뿐이었다. 면담 자리에서, 생각해둔 퇴사의 변을 모두 동원하고 여행 계획까지 들먹인 다음에야 내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때 내 입에선 몇 달간 혼자 중남미로 여행을 떠날 거라는, 계획에도 없던 말이 술술 나왔다. 적어도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갈 정도라면 지구 반대편이 여행지로 적당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을지 모르겠다.


사실 중남미 여행을 생각하게 된 건 이미 몇 년 전 홀로 그곳을 다녀온 친구의 영향이 컸다. 친구는 애초 계획한 6개월 여행으로도 부족해 6개월을 더 그곳에 눌러앉았다. 여행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내게 바람을 잔뜩 넣던 친구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부끄럽지만 그때까지 나는 혼자 해외로 떠나본 적이 없었다. 여행을 떠나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닌 중남미라니, 내겐 너무도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곳이 나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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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퇴사를 통보하고도 두 달을 더 다니는 동안 조금씩 여행 계획의 윤곽을 잡아 나갔다. 남미 여행에 관한 책을 잔뜩 사 모으고, 웹상의 남미 여행기를 참고하면서 여행 경로와 일정을 짰다. 쓸 수 있는 여행 자금을 헤아려 보니 서너 달 정도는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듯했다. 퇴사 후 단기 속성으로 스페인어 회화도 배웠다. 여행을 앞두고 가장 불안했던 건 여행지에서 끊임없이 낯선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영어도 제대로 구사해본 적 없던 내가 스페인어의 홍수에 휩싸여야 한다니, 그저 배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가능하면 많은 나라를 둘러보고 싶었다. 멕시코에서 과테말라, 쿠바,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까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나라들에서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 그런 기대감과 더불어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싶은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고, 이륙 직전 기체의 진동을 느끼는 그 순간까지도 내가 당도하게 될 그곳으로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앞으로 겪게 될 여행의 매 순간이 나의 기억에 서서히 자리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구 반대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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