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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Feb 27. 2020

읽고 쓰고자 분투한 날들의 기록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문맹』은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난민의 처지에서 첫 소설을 쓸 때까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다. 활자중독자로서 모국어를 잃고 이국의 언어로 읽고 쓰고자 분투했던 날들의 기록이다. 그런 점에서 ‘문맹’이란 제목은 정확하고 탁월하다. 이 책을 소개하는 말로 쓰인 ‘언어의 자서전’이란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 언어는 생존의 수단이자 삶 그 자체였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눈에 띄는 모든 걸 읽기를 좋아하는 활자중독자였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할머니가 자신을 침대에 눕히고 재우려고 옛이야기를 들려주려 할 때면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아이였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나예요. 할머니가 아니라.” 


조국 헝가리가 소련에 점령되고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공산 독재 정권의 폭압 통치가 이뤄지면서 수많은 헝가리인들이 죽어나간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소련이 장악한 동유럽 국가들의 문화와 민족 정체성이 말살되어가는 과정을 목도한다. 어떤 반체제 러시아 작가도 이 문제를 언급하거나 다루지 않았음을 비판하며, 조국 오스트리아에 정면으로 맞선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상기한다. 


증오와 애정, 그리고 유머를 가지고 자기 나라, 자기 시대, 자기가 사는 사회를 비난하고 공격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던 위대한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에 대해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89년 2월 12일에 죽었다. 그의 죽음 앞에 국가적인 혹은 국제적인 애도나 거짓 눈물은 없었다. 오직 나를 포함한 열정적인 독자들만이 문학에서 커다란 부분을 상실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것이고, 더 슬픈 것은 그가 자신이 남긴 원고들의 출간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네>라는 제목의 책을 쓴 천재적인 작가가 사회에 보내는 마지막 ‘아니오’였다. 이 책은 <콘크리트>, <몰락하는 자>, <음성모방자>, <벌목> 그리고 다른 책들과 함께 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네>는 내가 읽은 베른하르트의 첫 번째 책이다. 나는 어떤 책을 읽고 이렇게 많이 웃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이 책을 여러 친구들에게 빌려주었다. 그들은 끝까지 읽지 못한 채 내게 책을 돌려주었다. 그만큼이나 이 책이 그들에게는 ‘우울하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의 ‘웃긴’ 점을 그들은 정말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책의 내용이 끔찍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네’는 정말 ‘네’이지만, 죽음에 대한 ‘네’이고, 그러니까 삶에 대한 ‘아니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작가이고 싶은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모범으로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p.61-63)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다른 헝가리인들과 함께 조국을 떠나 스위스 국경을 넘는다. 난민 신분으로 뇌샤텔에 머물게 되면서 프랑스어와 조우하게 된다. 이때부터 미지의 언어와 평생의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공장 근로자로서 하루를 보낸 뒤 저녁에 아이와 함께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아이를 재우고 글을 쓰는 일과를 반복한다. 영화 <패터슨>을 떠올리게 하는 매우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시를 쓰는 데는 공장이 아주 좋다. 작업이 단조롭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기계는 시의 운율에 맞춰 규칙적인 리듬으로 반복된다. 내 서랍에는 종이와 연필이 있다. 시가 형태를 갖추면, 나는 쓴다. 저녁마다 나는 이것들을 노트에 깨끗이 정리한다. (p.88)


<패터슨>에서도 버스 운전사인 패터슨은 틈 날 때마다 노트를 펼쳐들고 시를 쓴다. 영화는 어떠한 극적 전개 없이 시를 쓰는 일상적 행위를 반복과 변주의 구조로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책의 이 대목에서도 예술의 일상성을 엿보게 된다. 나는 주로 작가들의 이런 면모에 주목하고 반응하곤 한다.


『문맹』을 읽는 내내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장에 매료되고 말았는데, 예전에 『비밀 노트』를 읽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다시 떠올랐다. 『비밀 노트』(『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1부)에는 어떠한 감정 묘사도 없다. 소설의 앞부분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장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챕터가 있다. '우리의 공부'라는 제목의 장에서 화자인 '우리'(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가 노트와 연필을 가지고 작문 공부를 하는 요령이 나오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감정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사실에 입각하여 쓴 글이 좋은 글이다. 이를테면 '할머니는 마녀를 닮았다'가 아니라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로, '당번병은 친절하다'가 아니라 '당번병은 우리에게 이불을 가져다 주었다'로 써야 한다는 얘기다. 


작가의 이러한 관점은 소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 적용되는 것이었겠다 싶다. 『문맹』을 읽어보니 납득이 된다. 작가에게 이국의 언어는 언제나 낯설고 어려운 것이었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자연히 문장은 짧고 단순해질 것인데 거기에 감정을 제거하니 문장은 건조해진다. 감정은 왜 배제되어야 했을까. 전쟁과 독재의 참혹함과 살풍경을 마주한 한 사람이자 작가로서 자기연민에 취할 여유가 없었을지 모른다. 감정에 주목하기보다 작가 자신이 본 역사의 한 단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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