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마지막 여정, 칸쿤
한국에서 멕시코로 날아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나는 여전히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멕시코를 벗어나 쿠바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멕시코에선 칸쿤만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나로선 이미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주도로 개발된 고급 휴양지라는 이미지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고 고급 호텔과 리조트가 철옹성처럼 늘어선 호텔 존(Zona Hotelera)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칸쿤에서도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은 여행자들은 센뜨로에 머물기 마련이다. 해안가를 끼고 있는 호텔 지역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버스를 잡아 탔다. 조금 과장을 보탠다면 여행지에서 시내버스를 탈 때만큼 긴장되는 일이 없다. 투어를 가려면 현지 여행사를 통해 교통편을 예약하면 되고, 택시를 타면 목적지에 알아서 내려주지만 버스는 그런 여유로움이 없고 노선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수시로 지도를 봐 가며 눈치껏 내려야 하므로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초호화 시설을 갖춘 호텔들의 벽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호텔들이 내륙과 해안가를 구분짓는 격벽의 기능을 하는 셈이다. 바다를 보려면 대부분 호텔을 통해야 한다. 하지만 호텔을 통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잇길이 있긴 했다. 건물을 통과하여 반대편으로 나아가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신비로운 빛깔을 띤 투명한 바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때 여기도 한적한 해안가였을 것이다. 탁 트인 경관을 자랑하는. 덤프트럭과 굴착기가 줄지어 다니며 이 땅을 잔뜩 헤집어 놓기 전까진.
연한 청록 빛깔의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한참 걷다 보니 어디쯤엔가 휴양을 즐기러 온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싶은 곳이 있었다. 그곳에는 현지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놀이를 즐기는 어린아이들 틈에서 물에 뛰어들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하고 아주 살짝 발을 담그는 데 만족했다. 칸쿤의 바다는 아름다웠지만 왠지 정을 붙이기는 어려웠다. 발 붙이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몰려드는 고급 휴양지는 내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나마 카리브해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감사하며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음날, 여행 가이드북을 사러 서점을 찾아 나섰다. 쿠바 이후 여행지인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에 <론리플래닛>을 살 생각이었다. 구글 맵으로 찾아보니 서점이 많지 않아 보였다. 드문드문 서점이 있었는데 가이드북이 있을 법한 큰 서점은 꽤 먼 곳에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버스를 타고 라스 아메리카스 광장까지 갔다. 그곳엔 멀티플렉스 극장과 각종 브랜드 매장이 들어선 종합 쇼핑몰이 있었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서점을 찾았다. 내가 가려던 곳은 ‘간디’라는 이름의 서점이었는데, 몰 안에도 서점이 하나 더 있었다. 그곳 상호는 ‘단테’였다.
단테에는 가이드북이 없었고, 간디의 여행 서적 코너에는 <론리플래닛>이 있긴 했지만 내가 찾는 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돌아서기 아쉬워 영문 서적을 뒤적였다. 하루키 소설도 눈에 띄었다. 트루먼 카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스페인어 사전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샐린저와 피츠제럴드 책의 판형과 표지가 마음에 들어 사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지만 잠시 망설인 끝에 등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인터넷 카페에 들렀다. 한 시간에 20페소였다. 외국에서 처음 가보는 PC방. 살짝 긴장했다. 프린트가 가능한지 먼저 살핀 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일을 확인하고 여행자보험 가입증명서를 출력하려는데 언어 변환부터 보안 메일의 첨부파일 실행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시간은 흐르는데 좀처럼 파일이 열리지 않아 초조했다. 5분쯤 남겨 놓고 간신히 문서를 출력하는 데 성공했다. 프린트 값을 치르고 문을 나섰다. 별것 아닌 이 미션을 해냈다는 것이 어찌나 뿌듯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