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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타 Nov 23. 2020

추락

별 것 아니다. 파국이라는 것은 곁에서 볼 땐
별 것 아니다. 하나도 극적인 데가 없다.
앞으로 몇 걸음 더 나가면
사람은 망각의 늪 속에,
그리고 영원 속에 표류하게 된다.
- 라인홀트 메스너, <죽음의 지대>


추락을 경험한 등반가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하는 순간 자신의 과거가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정신의 심층부에 저장되어 있던 무수한 기억과 표상이 엄청난 정신적 압력에 의해 갑자기 의식 밖으로 분출되면서 마음의 스크린에 투영되는 것이다. 아마도 의지가 모두 사라지면 무의식을 덮고 있던 뚜껑이 단번에 젖혀지는 모양이다.


심리분석 이론으로는 죽음의 위험을 인식하는 순간 사고 능력이 엄청나게 증대되는데, 이러한 사고 작용은 놀라서 인체가 마비되지 않도록 인간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완전한 긴장 이완은 체념에서 오는 ‘자기 포기’의 징후다. 그래서 추락으로 인한 죽음은 의식이 분명하고 감각과 사고가 예민한 상태에서 아무런 고통 없이 다가온다.


추락하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장밋빛 구름이 둥둥 떠 있는
맑게 갠 하늘로 빨려 들어간다.
마침내 고통 없이 의식이 꺼진다.
보통 이때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순간이다.
그러나 부딪치는 소리가 본인에게 들리지만
아픈 줄을 모른다. 감각기관 중에서 청각이
제일 마지막에 없어지는 것 같다.
- 라인홀트 메스너, <죽음의 지대>


라인홀트는 추락을 멈추려고 있는 힘을 다하다가 어떤 노력도 소용없음을 깨닫게 된 순간, 포기와 죽음의 인식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곧 해방감이 밀려왔다고 한다. 푸르고 아름다운 장밋빛의 하늘 속에 포근하게 사뿐히 그리고 행복하게 뛰어들면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지면서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시공간의 개념이 없는 완전한 ‘무’의 세계에서는 절대적 평안과 고통 없는 소멸이 있을 뿐이다.


자기 보존을 위해 무의식 중에 저축됐던 에너지의 알맹이들이 흩어지면서 추락자는 의지 활동이나 논리적.비판적 사고의 완전한 차단, 자기 분열로 나타나는 자의식으로부터의 초월, 관념과 감정의 고양 등 본질적으로 꿈의 징후와 같은 상태에 빠진다.


추락은 교통사고와 달라서 체험의 깊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겹겹으로 된 정신의 층을 벗기며
사람을 뒤흔들어놓는 것 같다.
- 라인홀트 메스너, <죽음의 지대>


아마도 죽음의 인식과 함께 육체의 기능이 정지하면서 꿈의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이러한 이완 현상 이후 육체적 자아에서 영적 자아가 분리되는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난다. 버둥거려봤자 소용없음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에 자아가 분열되는 것이다.


죽음의 위협을 피할 수 없을 때 추락자는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와 ‘자기를 관찰하는 자’가 되어 떨어지고 있는 자기를 뒤쫓는다.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시간과 공간 감각도 사라지면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에 지배되지 않고 오히려 냉정해진다. 마침내 이 세상의 온갖 구속에서 풀려나 해방감이 밀려온다.


이러한 상태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뇌 속에 산소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망상인지, 현실 부정에서 오는 공상의 파급 작용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육체를 벗어나 여행을 떠난 영혼이 다시 돌아올 것인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인생이란 무한 속에서 벌어지는
막간극이라고 생각한다.
- 라인홀트 메스너, <죽음의 지대>


등반가들은 ‘죽음의 지대’라는 한계 영역에서 생을 인식하며 자신과 세계를 한데 껴안는 감정을 경험한다고 한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죽음을 피할 길이 없게 되면 존재가 확장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열린 감수성과 지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을 등반하면서 인간은 언제나 추락의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막상 추락하는 순간은 고통스럽지 않다. 진짜 문제는 추락할 때 육체를 떠났던 영혼이 다시 내 몸으로 기어들어왔을 때다. ‘무’의 해방을 체험한 영혼이 존재 인식에 있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얻게 될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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