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하네케의 <일곱 번째 대륙>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들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특징은 '폭력'에 관한 것이다. 하네케에게 가장 주가 되는 것은 가족이며, 그의 영화들은 가족이라는 1차적인 집단에서 생겨나는 기본적인 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집단의 이기주의가 타당한 것이라고 가정했을 때, 가족의 구성원들은 가족 집단을 위협하는 모든 대상들에 폭력을 행사하는 정당방위를 행사할 수밖에 없다. 하네케는 모든 사건의 시작점과 종결점이 이러한 가족에 위치한다는 매우 단순한 진리를 토대로 '폭력의 역사'를 창조해나간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영화들을 통해 폭력의 실체를 검증하려 하지 않는다. 하네케의 2005년작 <히든>은 한 편의 비디오테이프로 인해 모든 것이 파탄 나고 마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원점(비디오테이프)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차츰 희미해져 간다. 결국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폭력이 행해진 이후의 상황, 그리고 폭력 이후 급격하게 변화된 집단의 반작용들이다. 극 중 인물들에게 행해진 폭력의 진위에 대해 파헤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네케가 관객들에게 던져주는 유일한 단서는 그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매스미디어'뿐이다.
하네케가 영화를 통해 관객과의 이야기를 시도하는 방법은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를 사로잡는 텔레비전의 마케팅 전략과 흡사하다. 그는 다수의 영화들에서 폭력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관해 서술해왔지만 정작 하네케의 폭력성을 뒷받침하는 근거 자체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하네케는 '폭력의 깨달음'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을 철저하게 축소시켜 그것을 관객에게 돌린다. <미지의 코드>(2000)는 우연한 행동이 일으키는 파장을 사건 순으로 나열한 듯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서로 얽히는 인물들의 관계는 현실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겹겹이 쌓여만 가는 이야기들만큼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모호해지고,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을 예고하듯 소리 없는 긴장감을 남겨둔 채 막을 내린다. 하네케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특정 논의 없이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사건의 전말이 철저하게 관객의 눈에 의해 재배치되기를 선호한다. 즉 어떠한 '진실'이 목적이 아니라, 그 진실을 수용하는 ‘청자의 위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네케의 영화는 소통이 단절된 매스미디어의 형식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를 발화점으로 삼는다. 그의 영화에는 관객에게 내던져진 이미지로서의 폭력이 존재하는데, 하네케의 이미지는 단순히 폭력이라는 행위를 극으로 구사해내는 일차적 서술방식에서 머물지 않는다. 화자가 아닌 청자의 생각과 선택이 영화의 전체를 바꾸고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 하네케는, 영화에서 보이는 쇼트들만을 이용해 관객에게 간접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매체에 대한 불편한 기운을, 영화의 창을 통해 과감하게 표출해낸 것이다.
<일곱 번째 대륙>(1989)은 위에서 언급했던 폭력과 미디어에 대한 강한 비판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하네케의 장편 데뷔작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일곱 번째 대륙>은, 철저하게 감독의 시각에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재편집한 영화다. 특정한 서사 없이 이미지로만 사건의 흐름과 인물의 심경변화를 짐작케 하는 <일곱 번째 대륙>은 이후 하네케가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영화적 표현들의 초석 역할을 했던 작품이다. 영화는 ‘어떤 이유’에 의해 한 가족이 동반자살을 감행하게 되는 3년간의 과정을 보여준다. 한 가족의 마지막 3년-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가족의 세 개의 파트는, 아무런 동요 없이 계획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가족의 단면을 보여준다.
<일곱 번째 대륙>은 가족의 구성원과, 사회 속에서 가족의 위치와 같은 관계들을 설명하기 위해 반복적인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들은 특정 장소와 특정 앵글만을 나열하며 가족의 삶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일곱 번째 대륙>의 파트 1(1987)과 파트 2(1988)의 이미지들은 위치적으로 미세한 차이만을 보이고 있다. 영화 속 그 어떤 장면에서도 시간과 계절, 그리고 가족이 머무는 공간의 크기 같은 것들을 예측할 수 없다.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건, 예를 들면 매일 다른 음식이 차려지는 식탁이나 딸의 침대에 놓인 이불의 무늬,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의 변화들뿐이다. 영화는 가족의 생활과 그들의 사건에 대한 약간의 단서를 관객에게 흘려놓지만, 그것들만으로 관객이 가족에게 행해진 폭력(그들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에 대한)을 짐작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명확하지 않은 정보의 이미지들만으로 영화를 보는 제삼자들은 가족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이미지를 통해 부분적으로 짜 맞춰진 가족의 이미지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일곱 번째 대륙>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들춰내는 역할을 한다. 단편적으로 편집된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줄거리를 생각해내는 영화적 경험을 하는 관객들은, <일곱 번째 대륙>이 비판하려 했던 미디어와 시청자의 수용 관계를 고스란히 답습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눈으로 보이는 것’과 ‘현실’과의 거리를 두어 미디어(이미지)에 대한 강한 반발을 나타낸다.
<일곱 번째 대륙>의 파트 1과 파트 2가 진행되는 동안 가족, 그리고 가족 이외의 지인들에게 들리는 가장 큰 소음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다. <일곱 번째 대륙>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배경음’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이 항상 곁에 두고 있는 라디오의 소음이다. 정확한 시간에 켜져서 아침 뉴스를 이야기하고 어떤 때는 흥겨운 음악을 틀기도 하는 라디오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일상을 이어가는 가족의 얼굴과 대비된다.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가족을 대신해 라디오는 쉴 새 없이 조잘거리며 가족(인간들)의 감정을 대변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의 죽음 후에도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텔레비전(라디오의 역할을 대신하는)이다. 자신들이 살고 있던 모든 흔적을 파괴하고자 마음먹은 가족은 값비싼 장비를 동원해 집안을 모조리 들어 엎기 시작한다. 그들은 식탁, 탁자 등과 같은 고급 물건들을 포함해 냉장고, 세면대, 침대와 같이 기본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들까지 파괴하지만 마지막까지 남겨놓는 것은 텔레비전이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놓아두었던 선반을 부수는 역할을 맡지만 유독 텔레비전만큼은 피해 가며 망치질을 해댄다. 큰 가구를 조각내는 일 외에 자잘한 가재도구를 가위로 자르는 역할을 맡은 어머니와 딸은, 집안의 모든 것을 대신해 ‘왜’ 텔레비전만 살아남게 하는가에 대한 의문조차 가지지 않는다.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불태워버리는 대신 텔레비전만은 파괴할 수 없었던 그들은 ‘미디어’라는 매체에 예속되어 그것에 대해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아내와 딸이 죽자,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천천히 임종을 맞이하는 남자의 모습이 충격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곱 번째 대륙>의 파트 1, 2는 ‘미디어’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매일 아침 6시에 같은 목소리와 같은 리듬의 아나운서가 가족의 잠을 깨우는 역할을 하지만, 그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 행동을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하게 되는 것 자체는 미디어의 역할이라기보다는 규칙성에 가깝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종 LP판을 사들여 집안에 차곡차곡 정리해놓고 시시때때로 라디오의 음악을 듣는 아버지의 행동은 그저 취미로 읽힐 뿐이다. 친척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식사가 끝난 후 조용히 텔레비전을 함께 보는 행위는 여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다. 이처럼 곳곳에 매복해있다시피 하는 인간에 대한 미디어의 권력은 영화의 전반부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아 관객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하지만 파트 1, 2가 지나고 파트 3, 즉 영화의 후반부로 들어서면서부터 미디어는 다른 모습을 취한다. 타인과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전화와 초인종 소리들을 휴지로 막아버린 채, 가족이 마지막으로 듣기 원했던 것은 텔레비전의 전파음이다. 아내와 딸의 사망 후 그들의 죽음을 벽에 기록하며 자신도 어서 죽기를 갈망했던 남자는, 최후의 순간에 아무 이미지도 보여주지 않는 텔레비전의 화면을 응시한다. 지직거리는 텔레비전의 소음 사이로 우리가 마주했었던 가족의 이미지(남자의 과거)가 플래시백 되어 텔레비전과 교차편집을 이루는데, 관객은 비로소 이 장면에서 영화가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를 실감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폭력과 미디어, 두 가지의 단어 이외에 <일곱 번째 대륙>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것은 바로 ‘벽’이다. <일곱 번째 대륙>에는 정해진 앵글과 정해진 장소에서 문을 닫고 여는 행동이 주기적으로 보인다. 아이가 있는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 영화 속의 부모는 저녁이 되면 아이의 방문을 닫고,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와 다시 방문을 닫은 후 잠을 자거나 섹스를 나눈다. 아침이 되면 다시 문을 열어 아이가 있는 공간으로 향하고, 잠에서 깬 아이는 자신의 방을 넘어 부모가 앉아있는 공간으로 걸어 나간다. <일곱 번째 대륙>의 공간들은 각자의 주인들로 인해 규칙성을 띠며, 영화는 이들의 이미지를 통해 서로가 해당 공간을 함부로 침범하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정해진 시간 이외에 가족은 서로의 공간에서 길게 머물지 않으며, 죽음을 결심하고 집을 파괴할 때조차 자신이 즐겨 찾았던 공간의 물건들을 스스로 정리한다. 가족이 사용하는 공간은 거실과 복도, 부엌, 작은 방, 큰 방 따위로 나누어져 있지만, 사실상 그러한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벽의 역할이다. <일곱 번째 대륙>에서 외부의 공간과 내부의 공간을 완전하게 분리시키는 벽의 이미지는 가족이 열고 닫는 ‘문’으로 변환되어 상대방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되어있는 세 인물(가족)을 연상케 한다. 하네케는 교감 없이 각자의 생활을 하게 하는 이 공간들을 <일곱 번째 대륙>을 통해 모조리 붕괴시킨다. 가족이 어떠한 이유로 인해 파괴시켜버리는 공간들은 하나로 합쳐져 서로 소통하게 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잠을 자고 음식을 먹던 세 사람은, 그제야 머리를 맞대고 모여 잠을 자고 음식을 먹으며 숨을 쉰다. 영화의 후반부는 가족이 도구를 사용해 하나둘씩 부숴버리는 가구들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속 모든 가구들은 멀쩡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일그러뜨린 채 가루가 되어간다. 가족이 천장과 바닥, 벽을 제외하고 이런 가구들을 망치질해대는 것은, 지금까지 나누어져 왔던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정당한’ 폭력의 행위다. <일곱 번째 대륙>에서 어항을 부수자 커다란 소음을 내며 튀어나오는 물과 물고기들을 클로즈업한 장면은 가족이 직시한 죽음과 해소의 갈등을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곱 번째 대륙>은 하네케의 영화들 중 유일하게 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확고히 제시한 작품이다. 하네케는 이후 <일곱 번째 대륙>의 형식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미디어와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에게 있어 가족이라는 단어는 모든 폭력성이 가능해지는 정당방위의 공간이며, 하네케는 늘 이러한 관계(가족)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놀라운 에너지를 배출해낸다고 말한다. <퍼니 게임>(1997)에서 혼란 속에 놓인 안나가 결심한 첫 번째 행동은 바로 텔레비전을 꺼버리는 것이었다. 미카엘 하네케는 지금까지도 미디어를 향한 비관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면서, 영화를 통해 인간 본성에 관한 여러 가지 실험들을 감행하고 있다. <일곱 번째 대륙>은 하네케의 들쑥날쑥한 작품들, 그리고 그가 주장했던 ‘폭력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