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없습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마블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엔드 게임>이나 <인피니티 워> 등에도 시큰둥하게 지나갔는데, 마블이 페이즈4에 들어오면서 좋아하는 배우와 감독들이 대거 출연함에 따라(ex. 배리 키오건, 시무 리우) 페이즈4에 이르러 마블을 역주행하는 행태로 지난 1년을 보냈다. 원래부터 관심이 별로 없던 캡틴아메리카나 아이언맨은 차치하고, 나머지 주연의 마블을 보던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캐릭터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닥터 스트레인지'. 원체 법사를 좋아했기에 '우주 최강의 마법사'를 하필이면 호감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하는 까닭에, <닥터 스트레인지>가 영화적으로 흥미도가 높거나 엄청 매혹적인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호감을 가지며 속편을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 뭐니뭐니해도 이 속편, 게다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나오는 이 영화를 기다리는 이유는 감독이 '샘 레이미'이기 때문. <스파이더맨> 시리즈도 샘 레이미 때, 일명 '샘스파'를 가장 좋아하고, 그보다 앞서 <이블 데드>나 <드래그 미 투 헬>로 악취미 전형 B급 감성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블과 샘 레이미라니, 게다가 그가 '마블 최초의 공포 영화가 될 것'이라고 자부하다니, 수 년 만의 복귀작에 십수 년 만의 히어로 무비 복귀작이라니!
샘 레이미의 예고나 외신의 호들갑처럼,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따지고 보면 정통 호러 영화, 혹은 호러 영화의 범주에 넣을 만큼 불쾌한 기운이 가득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러의 어딘가를 훑는, 이를테면 샘 레이미의 팬이라면 단박에 '이 부분을 호러로 범주할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즐거운 영화였다. 샘 레이미 특유의 B급 호러가 좀 더 마블스럽게 다루어진 셈인데, 그 때문에 초반과 후반은 다소 마블적인 느낌이 강하고, 중반의 내러티브는 거칠게 휘몰아쳐 안정점을 이룬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확실히 '마블'영화로는 의외의 연출이며 온갖 선을 넘는 호쾌한 영화다.
주요 소재가 '멀티버스'이고, 이 멀티버스라는 조건 때문에 여러 가지 연출이 파도 타듯 밀려오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데, 이를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연출의 반 정도는 닥터스트레인지가 담당하고, 나머지 절반을 '완다'가 담당하는데 전자는 차치하고 후자를 다루는 능력이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나도 모르게 '샘 레이미 만세!'라도 부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씻을 수 없는 일을 자행했고 그 깊은 내면과 심연에 슬픔을 탑재하고 있는 이 캐릭터를, 이렇게 파멸과 공포의 화신으로 연출할 감독... 그것은 역시 샘 레이미... 굳이 따지자면 (좀 짜증나는)선과 (처연한)악의 대립인데, 이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감독의 성향을 차치하고 시각적으로 압도될 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너무 좋았다. 몇 씬들을 되짚으면, 내가 <이블 데드>를 보고 있나 <드래그 미 투 헬>을 보고 있나 느껴질 정도. 독특한 코스믹호러의 느낌이 강하고 기존 마블에선 분명 없었던 정서이기에, 만족하실 분들이 상당할 거라 생각.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관람 전이라면 디즈니플러스의 <완다비전>은 반드시 보고 가야만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 <완다비전>의 서사가 있기에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완다와 스칼렛 위치가 이해되는 수순이므로, 반드시 선 관람해야 하는 시리즈. <왓 이프>를 보고 가야 하냐는 물음도 나오지만 <왓 이프>는 그저 덤이고, 단 하나의 필수 요소가 있다면 역시 <완다비전>이다. <완다비전>을 보고 가지 않는다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흑화하는 완다를 이해할 수 없을 듯.
*참고로 쿠키는 두 개. 엔드크레딧 전과 후에 나온다. 두 번째 쿠키는 '오, 이것도 너무 샘 레이미 같네'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보고 나오는 걸 추천. 그리고 최적으로 즐기기 위해 용산아이맥스 레이져로 관람했으나, 보고 나니 화면비보단 음향과 쨍한 색감이 더 중요도를 가를 것 같아 돌비시네마도 무난했을 듯싶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보고 나와서' 이야기고, 첫 관람은 역시 아이맥스가 좋겠다. 단, 화면비가 잘 지켜지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