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
*길지 않은 단상이지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막바로 보고 나와서 기록하는 짧은 단상. 영화를 여러 가지 의미로 분석하기보단 영화를 보다가 생각한 것들에 대해 기록해두고 싶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반복하는 말 같지만 박찬욱 감독의 아주 초기작을 제외하면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의 영화는 장편이든 단편이든 드라마든 대체로 '호'가 아닌 적이 없었다. 사실 당연한 말이긴 하겠으나, 언제나 평타 이상을 보여주는 감독인데다가 등장인물들의 감정이나 관계를 극도로 밀어 붙이는 연출이 주가 되는 영화들이 항상 나의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장르는 다를지언정 최동훈 감독과 결이 비슷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때문에 <헤어질 결심>을 기다릴 때도,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정훈희가 부른 '안개'를 들으면서도, 어떤 장면과 내용이 이어질지, 어떻게 끝맺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내심의 기대가 있었다. 온전히 연출을 맡아 개봉한 근작(!) 장편 <아가씨>에서 보여주는 디테일과 감정선을 그대로 보여줄게 분명하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그래서 그 기대가 제대로 실현되었냐하면, 충분히 그랬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헤어질 결심>의 제작 발표 소식을 먼저 듣고 두 주인공과 조연 배우들의 캐스팅 소식을 들으면서 정말 많은 기대를 가지기도 했으며, 박해일은 둘째치고 탕웨이 배우가 <만추>에서 보여준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 연기와 캐릭터를 구축할지 몹시 궁금했다. 애초에 탕웨이를 배역에 넣고 시나리오를 부분적으로 수정했다고 하는데,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가 연기하는 '서쪽에서 온' 여인 서래는 영화의 중심을 대사 일부를 빌리면 '꼿꼿하게' 잡아주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그 자신이 경계에 놓여 있으며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면서도,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그대로 표현하듯 영화의 중심축을 다잡아 주었고, 그건 어쩌면 탕웨이의 빛나는 미모(...) 때문이기도 하겠고.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클로드 샤브롤, 데이비드 린, 마스무라 야스조, 비스콘티, 그리고 히치콕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히치콕은 워낙 박찬욱 감독이 오마주를 바쳤던 감독이었고 마스무라 야스조는 소재적으로 겹쳐서 생각난 것일 테다. 정확히는 클로드 샤브롤의 미스터리/범죄 영화들이 떠올랐는데(공교롭게도 샤브롤도 히치콕의 광팬) 그 이유는 <헤어질 결심>이 정말 정통적인 고전 범죄영화의 기법과 연출을 고스란히 밟고 있기 때문일 거다. 장르적 소재를 탁월하게 연출해낸 고전감독들의 작품과, 그 작품들 속의 몇 장면들이 머릿속을 헤짚고 다녔다는 건 또한 <헤어질 결심>이 탐정영화의 정석을 따라가는 연출을 적극적으로 택했음을 반증한다. 이 작품들과 결이 다른 지점이 있다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스마트기기들'-시리가 탑재된 아이폰, 에어팟, 패드, 녹음기능이 탑재된 워치, 위치추적 기능의 앱-의 적극적인 사용이다. 기기의 시점으로 보여지는 해준과 서래를 다룬 샷들이 제법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스마트기기들이 <헤어질 결심>의 후반부 감정선을 폭발시키게 만드는 주요 발판이 되는 흐름으로 진화하는 건 정말 흥미로웠다.
영화를 보면 <헤어질 결심>의 후반 20분을 지켜보며 '공무도하가'가 생각났다. <헤어질 결심>의 모든 부분이 좋았지만 유독 엔딩으로 달려가서 마지막 만조의 바다를 보여주는 장면이 꽤 오래 생각났는데, 이 장면 때문에 영화가 끝났을 때 그대로 다시 극장에 들어가 한번 영화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해준이 바로 발 아래 서래를 두고, 사라진 서래를 미친 듯 찾아 헤매는 장면을 보면서 '안개'의 가사를 되짚어보는 건 무척 즐거웠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내의 디테일들이 항상 보여주고 암시하는 은유와 비유가 <헤어질 결심>에서도 적절히 분배되었다고 생각한다. 연인들이 서로 영영 마주하지 못할 슬픔, 혹은 마주함으로 벌어지는 파국에 대한 감정선에 대한 묘사가, 지금까지 본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뛰어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소재는 자극적이긴 하지만 수위라고 할 게 없기에 정말 오랜만에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와서 지인들에게 박찬욱 감독 영화 랭크 2위에 안착했다고 이야기했는데, 나에게 아직까지 1위는 <박쥐>다. 2위는 <복수는 나의 것> 이었지만, 지금은 3위로 밀려난. 아무튼 그만큼 <헤어질 결심>은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가능하면 돌비에서 다시 보고 싶은데, 돌비 포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굵직한 영화들이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상영이 제대로 이뤄질지는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