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의 연시조인 <어부사시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노래로 이어진 40수로 구성되어있는데 다른 부분은 어쨌든 상관없고, 이 <어부사시사>를 좋아하는 까닭은 바로 봄, 그러니까 '춘사'에 해당하는 후반부의 6, 8수 때문이다.
석양이 비꼈으니 그만하여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버들이며 물꽃은 구비구비 새롭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공을 부러워할쏘냐 만사를 생각하랴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련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낙홍이 흘러오니 도원이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세 홍진이 얼마나 가렸는고
하사, 추사, 동사를 버려두고 굳이 춘사의 이 부분이 처음 이 고시조를 배울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배 위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석양이 가까워짐에 따라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는 화자 때문이었다. 따지고보면 별 것 아니기도 하거니와 비슷한 구절은 최근 유행가의 가사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으나 <어부사시사>를 처음 들었을 때 당시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나는 이 춘사의 6, 8수에 해당하는 구절을 읽으며 이런저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건 주로 연애에 관련된 별 중요하지 않은 생각들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이번 주 과외 수업을 준비하며 <어부사시사>의 화자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정박해있던 배를 띄우고 물 위를 흐르듯 노닌 다음 다시 배가 정박해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순서는 결국 궤도 진입과 궤도의 이탈을 반복하게 되는 꼴이 될텐데, 그렇게 따지면 배가 정박해있던 곳에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무언의 약속을 전제로 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혹은 머물러 있겠다는 약속을 한 채로 그 안팎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용수철처럼 돌아오게 되는 행위의 정당성은 결국 '반드시 다시'라는 단어가 전제가 되는가, 라는 생각을 했다.
확실히 제법 많은 연애 속에서 특정 궤도에 진입하여 머물다가 말 없이 사라져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의 전제 하에 그것을 결국 지키기 못한 적은 제법 많았다. 한 행성을 중심으로 37번쯤 되는 회전을 진행하고 있을 때 무언가 반짝거리는 다른 곳으로 축을 옮겨 또 다시 그 행성에서 회전하기를 17번쯤, 그리고 그 17번의 1/2 바퀴째를 지날 때 또 다른 행성이나 혹은 행성이 아닌 운석 비슷한 무언가를 향해 회전하기를 9번쯤. 그런 무수한 궤도들이 이어지고 끊어지며 살아왔다면 그런 나에게 '언젠가 다시 돌아올께' 혹은 '반드시 다시 돌아올께'라고 말하는 것은 소중하지 않은 듯 하지만 매우 간절하게 내뱉어지는 문장이라 여겨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자주 바뀌지 않는 궤도를 아주 살짝 이탈했을 때, 내가 한 행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신이 바탕이 되어 그에게 닻을 내리고, 먼 곳이 아닌 바로 앞 바닷가 정도 되는 곳을 산책하며 우리가 아는 궤도로의 빠른 진입을 보채지 않겠다는 각인 같은 것이 나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했었고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나와 상반되는 태도를 권하거나 강요한 적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그 끈에 대한 확신이 이쪽에서 정확히 있기만 해준다면 나는 항상 궤도를 이탈함과 동시에 궤도로 돌아왔었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합이 맞지 않아 내가 너무 먼 곳까지 사라져버려 돛을 수거할 수도, 닻을 내릴 수도, 그렇게 되어 다시 '반짝' 소리를 내어 완벽하게 어떤 궤도에서 벗어날 때, 일이 그렇게 흘러가는 상황만 되지 않는다면 나는 대체로 오랜 시간동안 한 회전축을 중심으로 머무는 것을 좋아해왔었다. 확신이 있다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종 그른 선택도 있었긴 하지만.
그래서 '반드시 다시 돌아올게'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참 매력적이다. 그런 약속이 전제되지 않는다 해도, 설령 거짓말로 점철된 문장이라고 해도, 이 각자의 단어들로 조합된 문장에 대한 묘한 안정감과 기대감은 사라질 줄 모르고 머릿속을 지속적으로 부유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확연히 잡히는 환상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