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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영 Jan 04. 2019

짤로, 파키스탄!

인도에서 흔하게 쓰이는 욕, 왜 '파키스탄'일까?

인도에서 오랜 시간 지내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지의 ‘욕’도 접하게 된다. ‘나쁜 새끼’를 뜻하는 ‘초드’나 ‘간두’와 같은 비속어나 성교를 뜻하는 ‘지기지기’ 같은 말들 속에서 빠지지 않는 욕 중 하나가 바로 ‘짤로, 파키스탄’이다.           


내가 ‘짤로, 파키스탄’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뉴델리의 빠하르간지의 한 과일가게에서였다. ‘찌꾸’라고 하는 감 맛 나는 과일 몇 개를 사기 위해 과일가게를 찾았는데, 가게 점원이 몇 개 이하로는 팔지 않는다고 해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던 참이었다. 찌꾸 5개 이하로는 절대 안 판다는 것을 겨우겨우 달래서 3개로 흥정했고, 가게 주인이 사과도 한 번 먹어보라고 하는 걸 가볍게 거절하고 있었다. 지갑에서 10루피짜리 지폐를 꺼내려는 찰나, 한 아이가 내 앞에 나타나 구걸을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절대 구걸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구걸에 응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철칙을 지키고 있었는데, 마침 손에 과일이 몇 개 들려 있어 돈 대신 찌꾸 몇 개를 쥐어주었다. 그리곤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내가 건네준 찌꾸를 땅에 던지며 나에게 크게 소리 질렀다.     


“유(You), 짤로, 파키스탄!”     


나는 순간 그 말을 듣고 엄청 당황했다. 우선 내가 준 과일을 땅에 던져버린 아이의 행동이 너무 어이없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짤로’라는 말은 보통 ‘빨리’ 혹은 ‘알겠으니까 됐어’, ‘가 봐’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나도 힌디어를 쓸 때면 곧잘 사용하곤 했던 말이다. 그런데 이 ‘짤로’에 ‘파키스탄’이 붙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고, 그 의미를 과일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려던 그 순간 주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단번에 아이의 옷자락을 잡고 엉덩이를 때리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지나가던 사람이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이 화난 이유가  단지 과일을 땅에 던져버린 아이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짤로 파키스탄’이라는 말을 뱉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나에게 한 말은, 완곡하게 해석하자면 ‘지옥에나 가라’라는 뜻과 비슷한 뜻이었음을 말이다.


그때만 해도 파키스탄은 먼 나라처럼 여겨질 때였고, 종종 그렇게 여행자들이나 서로를 향해 ‘짤로 파키스탄’을 외치곤 하는 인도인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파키스탄이 도대체 어떤 나라이길래 저 난리를 부리는 것일지 의아했다. 인도의 타지마할만큼 파키스탄의 훈자와 모헨조다로 유적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인도인들이 서슴없이 욕으로 사용하던 ‘짤로 파키스탄’을 들으며 오히려 더욱 호기심을 키웠다. 이후 오랜 준비와 우여곡절 끝에 파키스탄을 두 번 길게 다녀오면서 그 궁금증이 비로소 풀렸다. ‘짤로 파키스탄’이라는 말이 전쟁과 종교적 갈등, 무슬림에 대한 혐오에서 탄생한 허상의 욕설임을 말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 사이. 불과 몇 발자국 건너 전혀 다른 관습과 신념의 국가가 마주하고 있다.

‘짤로 파키스탄’은 있지만, ‘짤로 인디아’는 없다


현재의 인도가 중심부로 자리 잡은 인도 아대륙의 전체는 원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넓게는 근접해있는 버마(미얀마)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인도는 독립 직후 중앙정부를 다져가면서 인도 내의 무슬림과 힌두교도들의 커다란 분열을 겪어야 했고 이를 토대로 혼란에 빠진다. 힌두와 이슬람의 대립은 고대 인도 때부터 이어져왔던 것이긴 했지만 영국의 식민지 하에 머물면서 이 대립이 더 극심해졌고, 급기야 독립 이후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의 불씨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인도 내의 무슬림 밀집지역,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한 무슬림연맹은 무하마드 알리 진나를 필두로 인도 동쪽의 '파키스탄'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인도의 독립과 비슷한 시기에 파키스탄의 건립이 추진되었고 이 과정에서 인도의 1/3에 달하는 국민들이 이주를 하거나 강요받았으며, 수천의 사상자가 비극적인 사태가 생겼다. 선 하나를 사이에 둔 이념과 종교의 대립으로 인해 수많은 가족들이 서로 칼을 겨누고, 눈물을 머금고 생이별을 해야 했다(이후에는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가 분할되어 탄생하기도 한다). 인도-파키스탄이 분리되던 시기는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남한과 북한의 역사와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47년 분리되던 시기 이후 주기적으로 국경을 사이에 두고 크고 작은 테러 사건들로 인해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여전히 카슈미르 지방 같은 국경지대에서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도인들, 특히 델리나 아그라 등지의 북인도인들의 파키스탄에 대한 증오는 정말 상상을 초월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파키스탄과 인도가 대립하고 있는 국경지대를 넘을 때마다 인도인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소리였던 '파키스탄에 가면 죽는다' 때문이었다. 덕분에 파키스탄에 직접 가보기 이전에 인도에서 머물 때는 그들로 인해 파키스탄에 대한 편견이 생겼고 '안전하게 살아서만 돌아오자'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파키스탄의 국경인 라호르로 첫 발을 내디뎠던 기억이 난다. 막상 파키스탄에 들어가고 보니,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은 역시 불 보듯 뻔한 결말이었지만 말이다. '짤로 파키스탄'이라는 말을 뱉는 사람들에게 두 눈 똑바로 뜨고 "파키스탄이 어때서, 너 거기 가 봤어?"라고 물으면 99.9%는 대답을 이어가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사라진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대립하여 쌓인 분노와 혐오, 정부와 미디어의 극우들이 전방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이미지의 실체를 경험해 본 적은 당연스럽게도 없으니까.

 

파키스탄 라왈핀디의 한 시계수리공. 파키스탄은 확실히 어려운 곳이긴 했지만 금세 적응되었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 훈자.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틈틈이 다시 가고 있다.  


'짤로 파키스탄'이라는 욕이 여전히 유행하며 유효한 까닭은 막연한 분노를 표출할 길이 그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터무니없는 논리를 전개할 때 종종 뜬금없이 '북한', '북한에서 내려온 지령' 등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인도도 마찬가지였다.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이 스스로 사원을 파괴하고 이를 무슬림 탓으로 돌리거나 폭탄 테러의 추종자가 힌두 우월주의자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무슬림 사상자를 낳고 나서야 밝혀지기도 한다. 인도에서 '테러방지법'이 잠시 실시되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폐지되었으나 이 시기에 100명이 넘는 무슬림 사망자가 생겼다. 이 중에는 12, 13세의 어린이들도 있었고 당연스럽게도 전부 무슬림이었으며 누군가 이들을 향해 '의심이 된다'는 제보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불과 1년 사이에 저 정도였다. 개중에는 여전히 실종 상태인 사람도 있다. 이 법은 [90일 구금 가능/불특정 다수를 도청 및 감시할 수 있음/경찰과 군인의 임의대로 불시 면담과 소환조사에 응할 것] 등과 같은 조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사실상 무슬림을 숙청하기 위한 혐오의 지평 위에 세워진 법이었다. 이러한 차별을 막기 위해 인권변호사 '샤히드 아즈미'가 몇 년 동안 많은 인도인들을 대변해 싸워왔으나 그는 인도 정부가 수시로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던 '테러분자'가 아니라, 그의 사무실에 우유를 배달하던 힌두 극우주의자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한살 메타 감독의 <샤히드>(2012)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영화 <샤히드>의 한 장면

여성에 대한 인권이 한창 바로 세워지고 있는, 심지어 제3의 성도 인정하며 억압받는 모든 차별에 대한 금지를 선언해 마지않는 인도는 유독 종교로 인한 차별만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차별은 현재에 이르러 '짤로 파키스탄'으로 발화되고 있다. 신기한 것은 이 보편화된 혐오의 욕설이 인도 북부지방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남부지방은 원래 드라비다족이 살던 곳으로 그들 역시 아리아인을 피해 완전히 남부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이런 유래 때문에서인지 남부의 인권 지수는 북부의 평균을 훌쩍 웃도는 수준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더 깊게 들어가면 지역별로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국경에 인접한 북부와 국경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남부 현지인들의 삶과 생각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좀 흥미로운 사실임은 분명하다.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를 촬영할 때 만났던 방글라데시의 배우 '마붑 알엄'과의 짧은 인터뷰에서 여행자들에게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경지대가 여전히 불안전하고 기피해야 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나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국경은 원래 하나였고 종교전쟁 때문에 나눠진 거지요. 파키스탄도 언어가 달랐기에 떨어져 나왔고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죠. 모든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챙기게 되잖아요. 그런 것 때문에 충돌이 잦은 편이죠, 방글라데시에서 가져가는 자원도 많지만 우리는 아무 이야기 못하죠, 사실. 인도의 도움도 많이 받고 있으니까요. 한국-미국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짧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는 현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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